[대영제국에서 온 편지][17] 누가 왕의 목을 치는가②

장일현 기자 2021. 11. 23.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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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바베이도스는 영국 BBC 방송이 선정한 ‘죽기 전에 꼭 여행을 가봐야 할 50곳’ 중 하나입니다. 국토 면적은 약 440 ㎢로 남한의 229 분의 1 밖에 안되고, 인구도 28만7800여명에 불과합니다.

이 작은 나라가 최근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영국 언론들이 유난히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유는 바베이도스가 400여년 만에 처음으로 영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홀로서기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지난달 20일 바베이도스 의회는 샌드라 메이슨 총독을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했습니다. 그는 오는 30일 취임식을 갖고, 바베이도스 역사상 첫 대통령에 오를 예정입니다.

◇바베이도스와 여왕의 건강, 그리고 영연방

바베이도스는 16세기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했다가 포기한 후, 17세기부터 영국 지배하에 들어갔습니다. 제임스 1세 때인 1625년 영국 배가 도착해 영국 땅이라고 선포했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627년에는 영국 정착민이 터를 잡았습니다. 1966년 11월 30일 영국에서 독립했지만, 그 이후에도 영연방 일원으로 남았습니다. 지난 55년 동안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이 나라의 국가수반이었습니다. 대통령이 취임하게 되면 바베이도스는 입헌군주국이 아닌 공화국으로서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윈저성에서 직접 운전하는 모습이 포착됐다./가디언

영국에서 6300km 이상 떨어진 작은 섬나라의 행보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이것이 영연방의 미래와 관련해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특히 최근 엘리자베스 여왕이 건강상 이유로 공식 일정을 취소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앞으로 영연방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우려와 관심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바베이도스가 초대 대통령을 추대한 날, 엘리자베스 여왕은 예정됐던 북아일랜드 방문을 돌연 취소하고 런던의 에드워드 7세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버킹엄궁은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의 ‘사전 검진’을 위해서”라고 설명했지만, 여왕의 건강은 영국과 영연방의 최대 이슈 중 하나로 급부상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후에도 3 차례 공식 일정을 취소했습니다. 지난 14일에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세너타프(Cenotaph·전몰장병추모비)에서 열리는 영령기념일(우리의 현충일) 추도 예배도 막판에 참석을 취소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 행사를 대단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BBC에 따르면 1953년에 즉위해 69년째 재임하고 있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 행사를 건너 뛴 건 단 6차례라고 합니다. 4번은 해외순방 때문에, 2번은 출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번에 7번째가 됐네요.

만약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시대가 끝나게 된다면, 영연방은 어떻게 될까. 정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도, 상상도 어렵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어쩌면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보다 더 큰 충격파가 영국을 강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선, 국내적으로는 군주제에 대한 폐지 논쟁이 격렬해질 수 있습니다. 여론조사업체 유고브가 지난 5월 영국인 487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영국이 이제 “군주가 아닌 선거로 뽑힌 국가원수를 가져야 할 때”라고 응답한 사람이 41%에 달했다고 합니다. “군주가 있어야 한다”는 응답은 31%에 그쳤다고 합니다.

다음 왕위를 물려받게 될 찰스 왕세자의 인기가 신통치 않은 것도 골치입니다. 영국에서는 차라리 찰스를 건너뛰고 곧바로 윌리엄 왕세손으로 넘어가자는 여론이 꽤 높습니다. 지난 8월 유고브 조사에서 응답자의 80%가 “윌리엄 왕세손을 지지한다”고 답한 반면, 찰스 지지율은 58%에 머물렀습니다.

이 또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윌리엄이 왕위를 물려받는다해도 엘리자베스 여왕만큼 영국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영국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영국인들의 애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베이도스의 바다 풍경.

영국 밖 영연방 앞에 놓인 미래의 날씨도 ‘흐림’ 또는 ‘매우 흐림’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번 바베이도스 움직임에서 볼 수 있듯이 영연방에 속한 국가들 사이에서 “우리도 독자적인 국가수반을 가질 때가 됐다”는 분위기가 빠르게 형성될 수 있습니다. 현재 영국 왕을 국가수반으로 하는 나라는 15국입니다. 캐나다와 호주, 뉴질랜드, 자메이카 등입니다. 이들 나라에서 영국 왕을 국가수반으로 하는 현 체제를 바꾸자는 여론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지난 2월 여론조사업체 입소스가 캐나다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60%가 “여왕이 국가수반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호주 등에서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영국인들에게 ‘왕이 없는 영국’은 과연 상상이 가능한 모습일까요.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을 듯 합니다. 앵글로색슨이 영국 땅에 발을 들여놓은 5세기 중반 이후 현재까지 그들에게 왕이 없었던 때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경험이 ‘전무(全無)’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공화정을 가졌을 때가 딱 한 번 있었습니다. 17세기 중반 때입니다.

◇공화정, 단 한 번의 경험

유럽 대륙이 30년 전쟁의 종반기에 접어든 1640년대 전후, 영국에선 혁명의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었습니다.

왕권신수설을 창도한 아버지 제임스 1세에 이어 아들 찰스 1세 또한 왕의 절대적 권한을 믿는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출신의 스튜어트 왕가가 잘 몰랐던 게 있었습니다. 잉글랜드에선 이미 의회가 만만치 않은 존재로 성장해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 국민들을 상대로 가혹하게 징수되는 세금, 여기에 빠르게 세력을 확장한 청교도가 맞물리면서 왕과 의회는 전쟁을 피할 수 없는 단계로 다가가게 됩니다.

우선 찰스 1세는 결혼과 신하 등용에서 의회와 갈등을 빚었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프랑스 왕녀를 부인으로 맞은데다, 가톨릭 의식을 장려하고 청교도를 억압한 윌리엄 로드를 캔터베리 대주교에 임명해 잉글랜드 청교도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의 불신과 분노를 샀습니다.

1628년 3월 소집된 세번째 의회와 ‘권리청원’에 합의했지만, 찰스 1세는 의회와 잘 지낼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왕과 의회는 턴세·파운드세 징수 문제, 종교 문제 등으로 사사건건 충돌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의회 없는 통치를 선택했습니다. 1629년 의회를 해산하고 이후 11년간 의회는 열지 않은 것이지요.

1640년 의회가 다시 소집된 건 찰스 1세가 전쟁에 쓸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637년 장로교가 국교인 스코틀랜드에 국교를 강요하는 정책을 도입하자 스코틀랜드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반란을 진압하려던 찰스 1세의 계획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돈이 궁해진 왕이 다시 의회를 소집한 것입니다.

일단 의회가 소집되자 왕의 대권에 대한 의회의 반발이 폭발적으로 분출됐습니다. 왕의 각종 권한을 대폭 줄이고, 왕이 총애했던 신하들을 사형에 처했습니다.

한편, 이 과정에서 의회 내에 분열이 나타났습니다. 특히 종교 문제를 놓고 생각이 크게 갈라졌습니다. 주교제 폐지 등 급진적 주장을 하는 ‘뿌리와 가지’파 등의 과격파와 옛 제도의 폐단은 없애더라도 기존 제도는 유지하자는 온건 퓨리턴 등이 대립했습니다. 양측은 왕권에 대한 입장도 갈리면서 결국 왕당파와 의회파로 나뉘게 됩니다.

1641년 말 아일랜드 봉기 진압 문제와 관련, 의회가 군대 지휘관을 임명하는 법안이 제출되자 왕과 의회의 대결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이듬해인 1442년 8월 찰스 1세는 노팅엄에서 군대를 일으키게 됩니다.

왕당파는 능력있는 지휘관과 실전 경험이 있는 기병대를 중심으로 전투를 이끌어 갔습니다. 반면, 의회파는 인구 50만명이 넘는 유럽 최대 도시 런던과 결속력이 강한 해군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초반 전세는 왕당파에 유리하게 돌아갔습니다. 이런 불리한 전세를 뒤집으며 혜성같이 등장한 인물이 올리버 크롬웰 입니다. 잉글랜드 동부 헌팅턴의 젠트리 출신인 크롬웰은 내전이 시작되자 고향으로 가서 60명의 기병대를 조직해 의회군에 합류했습니다.

올리버 크롬웰

크롬웰은 오합지졸의 시민군과는 달리 엄격한 규율과 투철한 신념을 가진 기병대, 즉 철기병(the Ironsides)를 앞세워 왕의 군대를 격파해 나갔습니다. 크롬웰은 철기병을 토대로 신형군(New Model Army)를 편성했고, 이 군대는 1645년 6월 네이즈비에서 국왕군에 결정적인 패배를 안겼습니다. 승기를 잡은 의회군은 여세를 몰아 계속 승전보를 올렸고, 1646년 5월 찰스 1세는 의회파와 손을 잡은 스코틀랜군에 투항하게 됩니다. 이듬해 1월 스코틀랜드는 찰스 1세를 잉글랜드 의회에 넘겨버립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의회파는 또 다시 분열했습니다. 전쟁 승리 이후 어떤 정부와 개혁 교회를 만들 것인가를 놓고 장로파와 독립파로 갈라졌는데, 최종적으로 의회를 장악한 건 군을 기반으로 한 독립파였습니다. 찰스 1세의 처형을 결정한 것도 독립파가 장악한 의회였습니다.

1648년 12월 토머스 프라이드 대령이 이끄는 군 병력이 의회에 진입, 장로파 의원들 입장을 막고 독립파 의원들을 들여보냈습니다. ‘둔부 의회’ 또는 ‘잔여 의회’라고 불리는 이 의회는 찰스를 재판하는 특별 법정을 설치했습니다.

찰스 1세는 재판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아니, 국왕은 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떤 법정도 국왕에 대해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다. 왕의 통치권은 신에게서 부여받은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1649년 1월 27일 특별법정은 찰스 1세에 대해 ‘이 나라의 선량한 백성에 대한 압제자요 배반자요 살인자이자 공적’이라며 사형을 선고했고, 3일 후인 1월 30일 찰스 1세는 화이트홀 궁전에 마련된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게 됩니다.

당시 의회를 쥐락펴락했던 크롬웰도 처음엔 찰스 1세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찰스 1세가 왕비에게 보낸 편지가 발견되면서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고 합니다. 편지에는 “지금은 크롬웰을 비롯한 의회파에게 사로잡혀 있어 좋은 말로 속이고 있다. 나중에는 남김없이 (이들의) 목을 칠 것이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합니다.

찰스 1세는 참수 당일 오전에 셔츠를 두 벌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는 “날씨가 너무 추워 내가 몸을 떨 수 있다. 그러면 국민들이 내가 두려움에 떠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할 수 있다. 내가 그런 비아냥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영국 역사에 따르면 집행인은 단 한 번 도끼를 휘둘러 찰스 1세의 목을 잘랐다고 합니다.

왕을 제거한 의회는 이제 영국 역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정치 실험에 돌입합니다. 아예 군주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한 것이지요. 영국은 처음이자 지금까지 마지막인 ‘왕 없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영국이 다시 왕정으로 복귀한 건 이로부터 11년이 지난 1660년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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