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 "가져라, 그러나 제일 크게 가져라"..이공현 원불교 교무

이임정 2021. 11. 16.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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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플렉스! 몸에 맞는 삶 - [핏] 2회
이공현 원불교 교무를 만나다
▶플렉스! 몸에 맞는 삶
[핏]은 자신의 몸에 맞는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변화가 빠른 시대에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꾸려가고 있는지, 그들의 생각과 고민을 들어본다.

이공현의 핏

“스승들도 옷이 몇 벌 안 되지만, 당신의 체형이 바뀌어서 맞지 않으면 물려주신다. 나도 어른들께 물려받은 옷을 입는다. 딱 맞지는 않지만 입을 때마다 다시 마음이 챙겨진다. 이렇게 우리가 지켜야 할 정신들은 철학적 언변이 아니라, 삶의 사소한 하나하나에서도 다 전해지는 것이다.”

이공현 (원불교 교무, 문화사회부장)

1968년 전라북도 익산 금마 출생. 원불교 교무. 여수교당에서 부교무로 첫 근무. 일본 도쿄대 종교학 석·박사과정(2000~2008년)과 영국 옥스퍼드대(2014~15년) 종교학 연구과정 수료. 2016~18년 원불교 은덕문화원 원장이었고, 2018년부터 원불교 중앙총부 문화사회부 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매일 같은 출근 시간, 같은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 얼굴 말고는 아는 게 없지만 치열한 아침 그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게 묘한 연대감을 느끼게 한다.

사회로 치자면 원불교도 우리에게 그런 존재가 아닐까 싶다.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부대끼며 살지만 아직 인사조차 나누어 보지 않은 조금은 서먹한…우리.

누군가는 산업화·과학화가 진행되면서 탈종교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했지만,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일성으로 원불교는 지난 100여 년을 우리와 함께해 왔다.

원불교의 이야기, 원불교 사람들의 이야기를 원불교 문화사회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이공현 교무를 통해 들어 본다.(※인터뷰는 지난 여름 진행되었습니다.)

—쪽진 머리에 흰 저고리, 검정 치마를 입은 분을 보면, ‘아 원불교구나!’라고 인식된다. 원불교 여성 성직자의 특징적인 복식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1916년 원불교가 시작할 때 대종사(원불교의 창시자, 1대 종법사)께서는 남녀의 차별도, 출가·재가의 복식 차이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여자 선진들은 자신을 지키고 상징할 옷이 필요했다. 대종사는 “꼭 그렇게 입어야겠느냐? 만들긴 쉽지만 없애긴 어려울 거다”라고 말리셨다고 하는데 아마도 원불교 여성 교무들의 기운이 셌나 보다. 시간을 두고 안팎의 여러 의견들이 취합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뿌리 깊은 나무>를 펴낸 고 한창기 선생은 이선종 교무(전 참여연대 공동대표·전 서울교구장)님께 쪽진 머리가 좋겠다고 조언을 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이 원불교에 심어졌다.

복식규정집 같은 건 없다. 봄·여름을 포함한 4월1일부터 10월30일까지는 위는 흰색·아이보리·회색에 아래는 검정치마를 입고, 늦가을·겨울엔 검정·회색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는다. 한복이라 허리살 걱정을 할 필요도 없고, 적당히 맵시가 있고 선택의 고민도 없어서 좋다.(웃음)

나는 봄·여름용과 늦가을·겨울용으로 두 벌씩 정복을 가지고 있다. 명주로 된 저고리는 대외용이고. 면, 레이온 저고리는 생활용이다. 어른분들께 물려 입을 때가 많다. 핏이 딱 맞진 않아도 입을 때마다 마음이 챙겨진다. 이렇게 우리가 지켜야 할 정신들이 철학적 언변이 아니라, 사소하지만 오래된 물건에서 전해진다.”

—2019년부터 여성 교무에게 복식의 자유가 주어졌다고 들었다.

“대종사님께서 애초에 말씀하신 대로 가는 것이다. 입기는 쉬워도 벗기는 어렵게 되어 버린 면이 없지 않다. 더욱이 새로운 세대에게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이 개벽하는 셈이다.

이제(2019년, 원기 104년)부터 여자 교무도 결혼이 가능해졌다. 선택의 영역이라 강요하지 않고, 자율에 맡기고 있다. 앞으로 육아 등에 대한 법이 보완돼야 할 것이고 복식도 실생활에 맞게 자유롭게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전처럼 입는 것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나는 이러한 복식을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약속으로 삼고 있다.”

—화장이나 다른 미용은 하지 않는가?

“명상을 많이 하면 피부가 좋아진다는 건 잘못 알려진 말이다.(웃음) 스킨로션만 바르다가 자외선 노출이 많아 선크림까지는 바른다. 머리는 나이가 드니 흰머리를 감출 정도로만 염색을 하고 동백기름을 발라 빗는다. 많이 걷는 편이라 신발은 신중하게 고르는 편이다. 이 신발 브랜드(가버·Gabor)는 승무원들이 많이 신는다고 들었다.”

—출가의 과정에 대해 듣고 싶다.

“익산 원불교 총부 근처, 백제의 옛 고도인 금마가 고향이다. 원불교 집안에,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다. 7남매(5녀2남) 중 다섯째다. 우리집은 종가집이어서 해마다 28번의 제사를 지냈다. 거의 공동체 생활과 같아서 사람 때문에 고독하진 않았다. 반대로 내면에선 사람들 속에서 나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됐다.

언니 둘이 교무님이어서 성직 생활 하는 곳을 어릴 때부터 가서 보며, 교무가 되는 게 어떤 것인지 옆에서 볼 수 있는 환경이었다. 언니들은 재밌고 열심히 사는 분들이셨다. ‘무슨 인연과 생각으로 자기 생을 저렇게 몰입하고 사나?’ 하는 생각을 했고, 그들을 보고 출가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시골에 살면서 어린 시절부터 이런저런 일들이 마음에 남았다. 학교에서 근처 군부대의 장교 자녀들에게 특별대우하는 모습도 그렇고... 초등학교 6학년 수학여행 때 떠드는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려다가 오히려 담임 선생님에게 난데없이 따귀를 맞았던 기억도 있다. 오해에서 비롯되었을 텐데 그땐 아무 말도 못했다. 그때 ‘왜 그러시냐’고 따지고 했어야 건강하게 극복이 되었을 텐데 그땐 말이 안에서만 울릴 뿐이었다. 이런저런 트라우마들을 해결하려는 몸부림도 출가의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서울 흑석동에 있는 원불교 중앙총부 교정원장실에서 본 창 밖 풍경
사진 왼쪽은 원불교 대종사의 친필이다. ‘일상삼매 동정일여, 일행삼매 영육쌍전’라고 쓰여 있다. 액자 속 사진은 원불교 정산종사(왼쪽부터), 소태산 대종사, 대산종사의 모습이다. 사진 오른쪽 아래는 원불교 중앙총부 문화사회부 사무실이다.

몸으로 하는 체험은 젊을 때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고 직관도 살아있다.

26살에 깨달음을 얻은 소태산 대종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앞서간 종교에 대해 존경과 감사가 있다.

그들이 있어서 원불교가 존재하는 것이다.

—출가가 온전히 자신의 선택이었나?

“어린 시절, 언니가 근무하는 총부에 가면 지금의 내 나이가 되는 교무님께서 “이번 주는 어떻게 지냈어?”라고 물어보시곤 했다. 한 번은 고아원 봉사활동한 걸 자랑했더니 “뭘 느꼈는데?” 물으셨다. “왜 아이를 낳고는 버리는 부모가 있는지 속상했다”고 했더니, “아이를 책임지지 않는 부모가 왜 생길까? 왜 누구는 행복하게 사는데, 누구는 불행하게 사는 걸까?”라고 눈을 마주하고 근원적 질문을 던지셨다.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왜 누구는 고아로 지내고, 누구는 아빠가 차로 학교까지 데려다 주는 집에서 살까. 삶에 대한 궁극적 물음들이 어른들이 훅훅 던지는 질문에서 시작됐다.

익산이 원불교 성지이나 학교에서 종교 조사를 할 때면 원불교는 나 혼자이곤 했다. 이 종교는 옳은가? 미래가 있는가? 혼자라는 무게감과 함께 질문들이 있었다. 원불교가 나와 내 가족의 문화인 것은 맞지만, 동시에 종교적 질문과 화두의 시작이기도 했다.

원불교학과에 89학번으로 입학했는데 이 시절 선을 경험한 것 또한 내겐 특별한 것이었다. 원불교학과 교육과정은 1학년 때부터 하드트레이닝이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5시부터 공동좌선을 1시간 반 동안 하는데, 몰입과 집중 위에 생각을 비우는 시간이다. 어느 순간 무한히 커지고 가벼워진 나를 경험하곤 했다. 죽은 듯 앉아있는데 죽지 않는 나는 내면에 활발하게 살아있는 체험! 인간 한계를 넘어 우주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느낌이었다. 아침 좌선이 끝나고 돌아올 때는 발로 걷는 게 아니라 양쪽 어깻죽지에서 천사 날개가 나와 날아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 경험 속에 ‘이 삶이 나한테 맞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신비적 체험’이라고 봐야 할까?

“원불교는 신비한 것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법과 이치에 맞는 삶을 지도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선정에 드는 기술적인 가이드가 없었다. 행복했지만 한편으로 ‘여기서 더 넘어가면 어쩌지?’하는 생각에 두려워 주춤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방목한 채 누구는 큰 그릇이 되고 누구는 그렇지 못하게 두는 것보다는 체계적인 지도가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좀 후회스럽다. 그때 끝까지 더 깊게 가 봤어야 했는데. 몸으로 하는 체험은 직관이 살아 있는 젊을 때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26살에 깨달음을 얻은 소태산 대종사를 보면 알 수 있다. 20대라면 하고 싶은 일에 몰입하라고 말해 주고 싶다.”

—선의 가치는 무엇인가?

“신비적인 무아의 경험은 그 시기나 방식이 다른 것일 뿐 어느 정도 수행하는 분들은 누구나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선의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작은 부분이다.

선은 기본적으로 나를 모시는 연습이다. 내가 사람들에게 존중받고 보호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남들에게 잘 보이려 하기보다 나를 잘 알고 받드는 것이 중요하다. 원불교에서는 그것을 ‘자기불공’이라 한다. 내 몸이 나의 법당이다. 외모를 잘 가꾸는 것도 좋지만 내면을 건강하게 가꾸는 일도 중요하다. 아침에 선을 하는 시간이 내 법당을 가꾸는 자기불공의 시간이다. 나를 비움으로써 편견과 오만을 내려놓고 새 마음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욕망이 있나?

“욕심이 없진 않다. 성불의 욕심. 대종사님은 “가져라, 그러나 젤 크게 가져라!”라고 하셨다. 긍정의 욕망이다. ‘뭐 하지 마라’가 아니라 정말 큰 욕심을 위해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일원상(一圓相), 저 자리에 합일하고 위력을 얻을 때까지 가보자. 이게 가장 큰 욕심이다.”

—선계를 떠나서 좀 더 현실적인 얘기를 듣고 싶다. 교무 급여는 얼마나 되는가?

“기본급여 44만원에 부가용금(생활지원금) 30만원, 상여는 일 년에 4번, 44만원씩. 총 월급이 85만원이다. 남자 교무는 생활부양금이 추가된다. 교무 월급은 막 출가한 새내기 교무부터 부장, 차장, 종법사도 같다.”

—돈을 모으는 것은 고사하고 현실적인 생활도 어렵지 않을까 싶다.

“살 곳과 노후의 생활 정도는 간소하게라도 교단이 해결해 준다. 그렇다고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대종사 당대 땐 무보수였다. 오히려 자신의 것을 내놓고 일하셨다. 종교인의 삶을 경제적 논리로 따질 수는 없는 것이다. 출가한다는 것은 그러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종교인의 삶은 각오하는 것이다. 경제적 논리는 적용되지 않는다. 공적 영역의 삶을 선택한 이상 사유 영역은 배제해야 한다.”

—교무님들의 은퇴 후 생활은 어떻게 되나?

“노후는 교단에서 책임을 진다. 정산종사님(2대 종법사)은 회갑 때 모아진 기금으로 법은사업회라는 전무출신 요양 재단을 세우도록 하셨다. 익산, 천안, 영산에 수도원이 있다. 은퇴한 교역자들의 건강도 원광대 병원에서 돌봐주는 시스템도 갖추었다.”

—문화사회부의 일은 어떤 것인가?

“원불교 문화사회부는 말 그대로 원불교의 문화사회 분야의 일을 총괄하는 곳이다. 문화예술 분야와 대(對)사회 업무를 본다. 원불교 안에서 이곳은 사회를 향해 가장 큰 문이 열려 있는 곳이라 늘 긴장 상태에 있다. 아침에 뉴스와 신문 사설을 꼼꼼히 챙겨보며 사회의 현장과 진짜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원불교는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종교다. 근현대를 겪어오면서 한국이 헝그리 정신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시기였잖나. 그 대표적인 게 원불교다. 해외원조나 오래된 기반이 있었던 게 아니었기에 지금까지 원불교는 자력갱생으로 교육과 교정을 정비하고 교구체제를 강화하고 학교를 세우고 세계로 나갔다. 문화가 중요하다는 걸 알아도 기획해 볼 여유가 없었던 거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가깝게는 기존의 대각개교절 같은 원불교 문화를 사회적으로 안착시키는 게 과제다. 그저 즐기는 게 아니라 마음을 챙기고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문화로 만들어 내고자 고민하고 있다.”

—원불교 문화사회부장이라는 높은 자리에 계신데?

“우리 급여가 보여주듯이 근본적으로 종교인이 된다는 것은 높고 낮은 자리를 떠난 삶을 살겠다는 약속이다. 출가하는 사람들은 끝없이 비우면서 자기 인생을 완성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출가자와 출가하지 않은 사람의 평가 기준이 다른 것 같다. 그래서 영화 <두 교황>에 공감을 많이 했다. 조직사회에서 어떤 직을 갖고 일하다 보면 사실 수행자로서의 시간은 많이 줄어든다. 공적인 시간에 자기를 많이 안배해야 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좋은 자리라는 것이 스스로에게는 좋은 자리가 아닐 수 있다. ‘내가 회사원처럼 살려고 교무한 건가?’ ‘이런 업무를 해야 한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다면 과연 출가했을까?’라는 질문도 내면에는 있다.”

—하루 일과는?

“9시 출근해서 30분간 문화사회부 교무들 각자 사경이나 교리공부를 한다. 공부하는 사람이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다.

9시 반에는 일의 상황을 확인한다. 회의하기 전에 문화사회부 기도문을 읽고, 교전봉독, 업무 보고, 일 나누기를 한다.

10시부터 각자의 할 일을 자유롭게 하고 5시부터 퇴근한다. 퇴근시간은 제각각이다. 나는 좀 오래 남아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기록하고 책을 읽는다. 그렇지 않으면 6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한강을 따라 숙대 입구까지 걸어간다. 9천보 정도 된다. KBS 클래식 FM 라디오 <세상의 모든 음악>이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하는데 딱 그 시간 동안 음악을 즐기며 걷는다. 갈월동 쯤 가서 버스를 타고 창덕궁 앞에 내려 거처가 있는 은덕문화원에 들어서 흙마당을 걷는다. 그러고 나면 숙면을 한다. 실무에 예민하고 꼼꼼한 편이라 걷기를 많이 해서 몸을 피곤하게 만든다. 그래도 새벽 3시 반이면 깬다.”

—사적인 시간, 쉬는 시간에는 무엇을 하나?

“무엇보다 책읽기를 좋아한다. 그게 스트레스 해소에 제일이다. 가만히 앉아서 책의 행간을 느끼거나 EBS 강의를 듣기도 한다. 유튜브는 거의 보지 않는다. 문화사회부장 임기를 마치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는 게 버킷리스트 중 하나다.”

—만나는 사람, 연인이 있는지?

“나는 사람의 장단점이 너무 잘 보인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잘 홀리지 않는다.(웃음) 어릴 때부터 인기는 많았다. 연애편지를 많이 받았는데 한 번도 뜯어본 적이 없다. 읽지 않고 태워버렸다.”

—개인적인 삶의 계획은?

“앞서 대종사 말씀처럼 종교인은 사적인 ‘나’가 아니라 모두의 ‘나’를 통해 더 큰 내가 되고자 하는 거대한 욕심을 가진 사람이다. 때로는 밑에서 누군가를 위해 밑알이 되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음 단계가 온다. 과거 종교의 순교는 죽음을 택하는 것이었지만, 진정한 순교는 ‘사무여한(死無餘恨), 죽지 않고, 죽을 힘을 다해, 죽은 것 같이 세상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지금 장년기인 30~50대는 사회를 위해 내 에너지를 쓰는 시간이고, 이후의 60~80대는 나를 위해 내 에너지를 함양하는 나를 위한 응집의 시간이다. 퇴임 후에는 수도하면서 다음 생을 준비하는, 내 에너지를 함양하는 응집의 시간을 가질 것이다.

돌고 도는 삶의 사이클을 생각한다면 지금 생은 끝이 아니다. 잘 살아야 다음에 잘 태어나고, 다음의 나를 만들어낸다. 인간인지라 스스로에게 불만스러운 것들이 있다. 그러나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 부족함 속에서 삶을 조율하고 중용을 탐색하며 사는 것이다.”

—성불과 제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

“성불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불은 목적지나 결론이 아니다. 제중의 전 단계라고 본다. 개인의 수행이 중요하지만 수행의 최종 목적이 제중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인 활동도 중요하고 일 속에서 단련하는 교무님들도 분명 깨달음이 있다. 대종사 당대에도 대중이 노동하는데 혼자만 수행하고 있으면 야단하셨다.

나 스스로도 성불에 대한 개념이 달라졌다. 성불에 천착하지 않는다. 영국 옥스퍼드에서 공부할 때 프랑스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성당을 다니면서 오래되고 친근한 감흥을 받았다. 내가 전생에 프랑스의 수도사를 여러 번 했나보다 싶기도 하고, ‘너무도 조급할 게 없구나. 이번 생은 이번 생의 과제만 하자. 충실히 살고, 못하면 다음 생에 하자’ 하는, ‘복습은 철저히, 예습은 느긋이’의 깨달음이 왔다. 같은 생각으로 업(카르마)에 대한 생각도 변했다. 카르마가 무거운 게 아니고 즐겁고 창의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 운명은 무겁거나 고민스러운 게 아니라 가볍게 받아들이면 된다는 깨달음! 물에 빠졌을 때, 빠졌다고 전전긍긍하는 게 아니라 서핑을 할 수도 있는 것이라는 긍정! 책임에서 무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날을 즐겁게 발산하는 삶! 문화사회부 일도 최대한 즐기며 하려 한다. 행정 시스템 안에서 일하는 것은 또 다른 경험이고 재미도 있다.”

—코로나19 시대가 오래 이어진다.

“원불교는 국가의 지침에 충실하려고 한다. 벌어진 일이야 어쩔 수 없지만 선진국이 자국 중심으로 백신을 돌리는 것이 문제다. 코로나는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원불교의 사은(천지·부모·동포·법률의 은혜) 사상이 사람들에게 공유되어질 때, 지금 있는 것에 대한 감사와 한 사람 한 생명이 존중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실천하게 될 것이다. 한국이 도덕의 부모국이 될 것이라는 대산종사(3대 종법사)의 말씀은, 우선은 우리가 분발하라는 것으로 삼으면 좋겠다.”

—불신의 시대, 무종교의 시대가 도래한 것 같다는 얘기도 있다. 신앙인도 줄고, 성직자를 지원하는 사람도 줄고 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탈종교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했지만, 오히려 베이비붐 시대를 지나 1970~80년대 종교가 다시 부흥했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끝없는 불안감이나 삶에 대한 질문들 때문에 종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추구한다면 그 끝에는 종교적인 부분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기존의 종교를 무조건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인간의 다양한 삶에 도움을 주는 종교의 형태가 요구된다. 그런 면에서 종교도 노력하고 있다. 천주교에서 우리 원불교의 마음공부법을 배우고, 우린 기독교 통성 기도의 좋은 점을 배운다. 열린 시대로 가고 있는 중이다. 원불교는 앞서간 종교에 대해 존경과 감사가 있다. 동학·천도교의 한울님이란 개념은 조선시대 왕 밑에서는 존립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사람이 한울님이고 모두가 평등한 사람이라는 것, 민족종교의 핵에 해당하는 한울님·마음개벽 사상이 원불교 사상과 맥이 통한다. 그런 것들이 원불교가 나올 수 있던 기반이 된 것들이라 생각한다. 그 사상 위에 원불교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게 우리 어른들의 가르침이다.

힐링과 명상 너머 어떤 형태로든 인간 내면을 탐색하고 깊은 안정과 평화를 찾는 법에 기여하는 종교가 번영할 것이다.”

—대종사께서 물질개벽을 얘기하셨지만, 20~30년 안에 벌어질 변화가 앞서 온 모든 변화보다 클 거라고 한다.

“원불교는 물질이 개벽된다는 걸 부정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있을 수밖에 없는 시대의 흐름으로 본다. 세상이 변화하고, 시간이 빨라지고 공간이 확장된다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확 열리는 거다. 이럴 때 자기 주체·주관·자기라는 존재가 없다면 휩쓸려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나의 소중함이 더 부각된다. 물질의 개벽에 상응하는 정신의 개벽으로 변화 속에서 자기를 단순화시켜 내면을 볼 수 있는 자리를 갖자는 거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물질과 정신, 이 두 개를 어떻게 병용·선용해서 갈 것인가에 대한 화두로 보는 거다. 종교가 기술을 지배할 순 없어도, 기술을 운용하는 인간이 있고 마음·정신이 있다.”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법문이 있는가?

“‘원망 생활을 감사 생활로 돌리자!’ 하지만 실천은 여전히 쉽지 않다. 그래서 신앙인이고 그것을 거듭해서 하는 생활이 수행자의 삶이라 본다.”

글·사진 이임정 기자 imjung@hani.co.kr

일러스트 김대중 mayseou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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