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중산층 주방의 필수품.. '냉온·제빙·커피머신 정수기'에 밀려 퇴조

기자 2021. 11. 15.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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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급격한 도시화로 상수도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으면서 수돗물 불신이 생겼고, 이로 인해 정수기가 각 가정에 들어가게 됐다. 렌털과 정비 점검이라는 한국 특유의 구독자 모델을 만든 정수기는 이제 각 가정과 사무실의 필수품이 됐다. 게티이미지뱅크
1988년 한 일간지 신문에 난 맥반석 생수기
김태호 전북대 교수

■ 기술이 지나간 자리 - ⑦ 맥반석 정수기

페놀 방류·다이옥신 검출 등 수돗물 불신에 80년대말 등장… ‘맥반석 필터로 거르면 깨끗하고 안전’ 믿음에 불티

기술 발전으로 흡착여과 → 역삼투압 → 이온교환수지 거쳐 최근엔 직수식 인기… 물 마시는 문화 바꿔놔

약 한 세대 전인 1980년대에는 식당에 가면 ‘엽차’를 내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가정에서도 보리차를 늘 충분히 우려서 냉장고에 식혀 두는 것이 주부의 일과 중 하나였다. ‘훼미리쥬스’ 유리병은 보리차를 넉넉히 담아 냉장고에 보관하기 안성맞춤이어서 집집마다 물병으로 애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식당이나 가정에서 보리차 구경하기는 어려운 일이 됐다. 어디를 가든 정수된 물을 차게 뜨겁게 바로 뽑아주는 기계, 즉 냉온정수기를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이가 시릴 만큼 차가운 냉수를 한 통씩 놓아주는 것이 예사고, 인심이 후한 곳이라면 입가심을 할 수 있도록 커피믹스와 종이컵을 나가는 길에 놓아두기도 한다.

수돗물을 믿을 수 없었던 시대

깨끗한 물은 인간이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 중 하나다. 하지만 집집마다 벽에 붙은 수도꼭지만 틀면 깨끗한 물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상수도는 하수도, 전기, 도시가스, 쓰레기 수거 시스템 등과 더불어 근대 도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인프라 네트워크 가운데 하나다(그리고 최근에는 인터넷도 여기에 추가됐다).

한국은 매우 급격한 도시화를 겪었던 만큼, 그에 필요한 인프라도 속전속결로 갖춰야 했다. 본격적 도시화의 초기 단계라 할 수 있는 1960년, 한국의 상수도 보급률은 16.8%에 지나지 않았다. 도시화에 박차를 가하던 1970년과 1980년의 보급률도 각각 32.4%와 54.7%에 머물렀다. 평균적으로 한국 가정 중 절반 정도는 상수도 없이 우물 등 안전을 보장하기 어려운 수원에 의존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는 1990년 78.4%까지 높아지고 2000년대 후반에 가서야 사실상 100%에 가까운 수치에 도달했다.

문제는 급하게 상수도 시설을 갖추다 보니 그 질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었고, 이런 경험들이 누적되면서 사람들이 수돗물을 잘 믿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수돗물의 품질에 대한 불만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자 정부는 1989년 공식적으로 전국 정수장의 수질을 조사했고, 8월에는 정수장 중 17%의 수질이 중금속, 세제, 세균 등에서 식수 기준에 못 미친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1990년에는 물을 염소로 소독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해 부산물 트리할로메탄(THM)이 논란거리가 됐고, 1991년에는 낙동강 상수원 지역에서 두산전자 등 일부 기업들이 페놀 성분 폐수를 무단 방류해 전국에 충격을 줬다. 그 뒤로도 2004년에는 미군기지 토양에서 다이옥신이 검출되고, 2012년에는 구미 취수장 상류에서 집단 폐사한 물고기가 발견되는 등, 시민들이 수돗물은 불안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사건들이 끊이지 않았다.

거실을 장식했던 맥반석 정수기

가정용 정수기 시장은 이 불안의 틈새를 파고들어 1980년대 후반부터 무섭게 성장했다. 일본에서 일찍이 유행했던 ‘맥반석 정수기’가 이 무렵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맥반석(麥飯石)이란 ‘보리밥 덩어리처럼 얼룩덜룩한 돌’이라는 뜻으로, 사실 과학적으로 명확한 이름은 아니다. 특정한 광물의 이름이라기보다는 석영과 장석(흰색) 그리고 운모(검은색)가 섞인 반암(화성암의 일종) 계열의 돌을 뭉뚱그려 부르는 이름에 가깝다. 동아시아에서는 옛날부터 맥반석을 약효가 있는 돌로 여겨 ‘본초도경’과 ‘동의보감’을 비롯한 여러 전통 의서에 소개하고 있다. 그 약효란 주로 해독이나 정화에 관련된 것인데, 오늘날의 과학 용어로 풀자면 광물질 표면에서 흡착 작용을 통해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말하자면 맥반석 정수기는 광물질 필터를 이용한 정수기의 일종이다. 다만 동아시아에서는 ‘전통 의서에도 그 효능이 기록돼 있다’는 말을 앞세워 소비자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 들어온 맥반석 정수기는 1980년대 말 중산층 가정의 거실 또는 주방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황토나 옹기 항아리 바닥에 맥반석을 깔아둔 형태의 정수기도 있었지만, 당대의 유행을 반영해 등나무로 멋스럽게 틀을 짜고 유리 수조를 2단으로 올린 정수기도 인테리어를 겸해 인기를 끌었다. 유리 수조에 깔린 맥반석 필터를 통과해 아래쪽에 정수된 물이 모이는 모습은, 믿을 수 없는 수돗물이 내 눈앞에서 깨끗하게 걸러지고 있다는 느낌을 생생하게 전해주기도 했다.

정수기와 함께 생수 시장도 크게 성장했다. 특히 대도시의 아파트 단지와 같이 인구가 밀집돼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는 곳에서는 생수를 정기적으로 배달받는 것이 일상의 일부가 됐다. 생수 회사들은 대용량 생수를 배달하는 가정이나 사무실에 냉온수 기능을 갖춘 분배기(디스펜서)를 무료로 대여해 주기 시작했다. 냉장고나 커피포트 없이도 언제든 간편하게 냉수와 열탕을 쓸 수 있게 되면서 커피믹스와 티백 등 간편하게 마실 수 있는 따뜻한 음료의 소비가 크게 늘어나기도 했다. 더 이상 냉장고에 보리차를 식혀 둘 필요가 없게 되면서 훼미리쥬스 병도 차츰 씻어서 다시 쓰는 대신 분리수거함으로 직행하게 됐다.

놀랍게 진화한 한국의 정수기

‘수돗물은 믿을 수 없다’는 공통의 인식에서 출발한 이 두 가지 흐름은 냉온정수기에서 다시 만나게 됐다. 생수 시장이 성장해 냉온수 분배기가 친숙한 기술이 되자, 정수기에 냉온수 기능을 붙이자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나오게 됐다. 물이 떨어질 때마다 무거운 생수통을 거꾸로 들어 꽂아야 하는 생수 냉온 분배기에 비해 냉온정수기는 몇 달에 한 번 정도 필터만 교환해 주면 됐기 때문에 편리해 큰 인기를 끌었다.

정수기 업계는 정기적으로 필터를 교환해 주거나 수조를 세척하는 등 유지관리가 판매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새로운 사업 모델을 개척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구독경제’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이다. 한국 냉온정수기 시장을 개척한 기업 중 하나가 이미 아동도서와 학습지 방문판매를 통해 전국적 네트워크를 구축했던 웅진(현 코웨이)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정수기 업계는 ‘정기적 방문을 통한 가정 환경의 유지 개선’이라는 새로운 시장의 문을 열었고 비데, 공기청정기, 매트리스 렌털 등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계속 개발하고 있다.

기술적으로도 한국의 정수기는 놀라운 진화를 거듭했다. 정수 방식도 단순한 흡착 여과를 벗어나 역삼투압 필터와 이온교환수지 등 여러 가지 물리, 화학적 공정을 추가했다. 정수된 물을 저장하고 분배하는 기술도 까다로운 한국 소비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끊임없이 개량됐다. 세균 번식을 막기 위해 수조를 자주 청소해 줘야 한다는 요구는 결국 아예 수조가 없는 ‘직수식’ 정수기의 개발로 이어졌다. 또 냉온정수기를 뛰어넘어 제빙기와 결합한 정수기, 에스프레소 머신과 결합한 정수기까지, 나날이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고 있다.

정수기와 한국사회의 공진화

이렇게 한국의 정수기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로 진화했고, 이제는 세계 시장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호사스러운 기술로 무장하고 방문판매 모델로 관리하는 한국 정수기는 동남아시아 등 한국 문화를 선호하는 지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런데 최근의 정수기들은 보편화할수록 오히려 가정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점점 크기도 작아지고, 매립돼 있다가 사용할 때면 모습을 드러내는 형태의 제품들이 선을 보이고 있다. 당연히 있어야 하는 기본 요소로 여겨지면서 굳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자기 존재를 과시할 필요가 없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등나무 틀에 올린 커다란 맥반석 정수기는 시대에 맞지 않는 물건이 돼 버렸다.

한편, 한국인이 정수기를 당연한 필수품으로 여기게 되면서, 정수기를 거치지 않은 물은 오히려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이 돼 버렸다. 과거의 문제점을 많이 고친 결과 오늘날 한국 수돗물의 품질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개선됐다.

그러나 이미 집집마다 정수기가 놓인 마당에 구태여 정수하지 않은 물을 마시려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이 현실이다. 정수기는 고도성장기 한국사회라는 맥락 안에서 성장한 기술이지만, 이것은 다시 한국사회의 물 마시는 문화를 바꿔 놓았다. 이렇게 기술과 사회가 ‘공진화’하는 것은 기술의 역사에서 보편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매일 마시는 물처럼 예사롭게 지나치는 사물에서도 공진화의 흔적을 읽어내는 느낌은 사뭇 다르기도 하다.

김태호 전북대 교수

■ 용어설명

기술과 사회의 공진화(共進化, coevolution) : 공진화는 진화생물학에서 비롯된 개념으로, 한 생물 집단이 진화하면 이와 관련된 생물 집단도 진화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과학기술사에서는 기술과 그것을 둘러싼 사회, 문화적 요소가 서로 맞물려 영향을 미치며 변화해 나가는 현상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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