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전주의 우승 청부사' R.F. 바셋의 짧고 굵었던 영향력
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1년 10월호에 게재됐습니다.(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R.F. 바셋은 KBL에서 오래 뛴 선수가 아니다. 그러나 외국 선수 트레이드가 이어질 때면 어김없이 거론되는 이름이다. 바셋의 경우를 최초로 국내 무대에서 외국 선수와 향후 국내 선수 지명권이 포함된 거래가 단행됐기 때문이다. 우승을 위해 전력 응집을 원하는 팀이 향후 드래프트픽을 내주는 트레이드는 당시만 해도 흔치 않았다. 그 시작을 전주 KCC가 끊었으며, KCC는 바셋을 영입해 우승을 차지하며 연고 이전 이후 첫 우승을 달성했다.
바셋의 대학 시절과 쉽지 않은 프로 생활
바셋은 NCAA 올드도미니언 모나크스에서 네 시즌을 보낸 후 외국 선수로 다른 리그를 뛰었다. 올드도미니언은 NCAA 1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 컨퍼런스USA(C-USA)에 속해 있다. 이전에는 2부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이후 1부로 승격했다. 바셋이 뛰던 지난 1995년과 1997년에 NCAA 토너먼트에 참가한 경험도 있다. 바셋이 뛸 당시 올드도미니언은 CAA(Colonial Athletic Association) 컨퍼런스 소속이었다. 4학년 때 팀의 주축으로 나서면서 자교가 컨퍼런스 2위에 오르는데 기여했다. 정규시즌 후 치른 컨퍼런스 토너먼트에서 탈락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결승에 올랐으나 마지막 관문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는 지난 1995년에 입학해 졸업했다. 당시에는 대학을 마친 후 NBA에 도전했던 만큼, 대학 졸업이 지명 가치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바셋은 1학년 때 크게 두각을 보이지 못했다. 출전시간도 평균 10분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2학년 때 주전 자리를 꿰찼다. 31경기 중 23경기에서 주전으로 출장했다. 경기당 18.6분을 소화하며 5.7점(.511 .--- 768) 5.1리바운드 1.8블록을 기록했다. 전 시즌 대비 출장시간이 늘어난 덕을 누리면서 자신의 기록을 두 배나 끌어올렸다.
3학년인 1997-1998 시즌에 평균 26.4분을 소화했다. 대입 이후 처음으로 평균 20분 이상을 뛰면서 본격적인 주요 전력으로 거듭났다. 기록도 나아졌으나 다른 팀의 대표적인 선수에 비해서 아쉬웠다. 그는 경기당 7.6점(.459 .--- .582) 7.5리바운드 1.7블록을 올렸다. 필드골 성공률은 소폭 하락했으나 가장 많은 리바운드를 따내면서 안쪽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았다. 마지막 해에는 34경기에 모두 주전으로 출장해 평균 24.1분 동안 9.8점(.545 .--- .659) 7.6리바운드 2.2블록을 기록했다. 졸업반이 된 그는 가장 많은 평균 득점과 평균 블록을 뽑아냈다.
NBA 진출은 당연히 쉽지 않았으나 생애 최고의 활약을 펼친 만큼, 프로농구선수로 살아갈 가능성을 충분히 엿봤다. 당시 NBA에는 하부리그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G-리그로 하위 리그가 공식적으로 일원화되지도 않았다. 이에 바셋은 여러 리그를 오가야 했다. 슛 성공률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높은 필드골 성공률을 자랑했고, 미국과 달리 다른 나라에서는 센터로 경쟁력이 충분히 입증이 됐다.
대학 졸업 후, 바셋은 하부리그 중 하나인 USBL의 캔자스 케이거즈에서 프로 선수로 나섰다. 1999-2000 시즌부터 사이프러스에서 완연하게 한 시즌을 치르며 본격적인 외국 선수로 자리를 잡았다. 시즌 후, 독일로 건너갔다. 독일의 각기 다른 팀에서 두 시즌을 보낸 후 다시 대서양을 건넜다. USBL의 다지시티 레전즈에도 몸담았다. USBL은 겨울에 열리는 리그가 아니라 여름에 진행이 됐다.
연고지 옮긴 이지스의 쉽지 않았던 우승 도전
KCC는 지난 2001-2002 시즌에 대전에서 전주로 연고지를 옮겼다. 구단명도 대전 현대에서 전주 KCC로 바뀌었다. KCC는 전주에 둥지를 튼 이후 우승을 달성하지 못했다. 지난 2001-2002 시즌에 재키 존스를 다시 영입해 우승 도전에 나섰다. 리그 후반기에 연승을 내달리기도 했다. 당시 KCC는 ‘이상민-추승균-양희승’으로 국가 대표급 라인업을 자랑했다. 국내 선수들이 공격을 주도했으며, 존스와 제런 콥이 기존 선수들과 좋은 조합을 선보였다. 리그 3위로 정규시즌을 마쳤으나 준결승에서 서장훈이 이끄는 서울 SK에 패해 결승 진출이 좌절됐다.
이후 KCC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2002ㅡ2003시즌은 외국선수 선발부터 여의치 않았다. 1라운드에서 호명했던 요나 에노사는 힘을 쓰지 못했으며, 그나마 벤 퍼킨스를 대신해 데려온 칼 보이드가 제 몫을 했으나 하위권을 전전해야 했다. 이는 전화위복이 됐다. KCC는 이듬해 외국선수 지명에서 1순위 지명권을 갖고 있었다. 원주 TG삼보(현 DB)가 기존 선수와 재계약을 체결했기 때문. KCC는 이 때 1라운드 1순위로 찰스 민렌드를 지명했고, 2라운드 마지막 순위로 무스타파 호프를 품었다.
바셋도 이 때 KBL에 처음으로 진출했다. 2003 외국선수 드래프트에 명함을 내밀었다. 당시 울산 모비스는 1라운드 마지막 순번으로 바셋을 지명했다. 최희암 감독이 이끌었던 모비스는 높이에서 열세였기 때문에 바셋의 활약이 중요했다. 그는 KBL 진출 초반부터 골밑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바셋이 힘을 내면서 모비스도 플레이오프 진출을 노릴 수 있는 팀으로 변모했다.
외국 선수 트레이드 때마다 언급이 되는 그 유명한 바셋 트레이드
KCC는 민렌드를 주득점원으로 내세우며 승승장구했다. 민렌드는 시즌 내내 인천 전자랜드의 앨버트 화이트와 함께 평균 득점 1위 자리를 두고 팽팽하게 맞섰다. 이전만 하더라도 KCC는 외국 선수들의 부진으로 추승균이 공격을 주도했다. 그러나 민렌드가 공격을 확실하게 주도하면서 KCC가 빛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호프도 후순위로 합류했으나 서울 삼성에서 우승을 경험한 이답게 안쪽에서 나름의 역할을 잘 맡았다. 하지만 KCC는 높이에서 밀리기 일쑤였다. 호프로 다른 외국선수와의 안쪽 경쟁에서 여의치 않았다.
KCC는 결단을 내렸다. KCC는 모비스와 외국선수 트레이드를 단행한 것. 모비스의 핵심 전력인 바셋을 데려오는 대신 호프를 내주기로 했다. 당시에는 외국 선수를 막론하고 주요 전력 트레이드에 향후 지명권이 포함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이후 KCC는 2004 국내선수 1라운드 지명권을 모비스에 내주기로 최종 합의했으며, 이로써 바셋이 우승 도전에 나서는 KCC에 전격적으로 가세했다. 결정적으로 당시 트레이드는 바셋이 시즌을 마친 후 다시 모비스로 돌아오는 조건이었다. 바셋의 계약권리를 KCC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 트레이드 개요
전주 get R.F. 바셋(시즌 후 울산 복귀 포함)
울산 get 무스타파 호프, 2004 국내선수 1라운드 지명권(양동근 지명)
해당 트레이드로 KCC는 이상민, 조성원, 추승균, 민렌드, 바셋으로 이어지는 막강한 라인업을 구축했다. KCC는 일약 확고부동한 우승 후보로 떠올랐다. 당시 KCC에는 정재근도 자리하고 있어 KCC는 승승장구했다. KCC는 바셋 합류 직후 바셋과 민렌드의 공존을 도모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잠시 주춤했으나 이내 자리를 잡았다. 바셋이 TG와의 높이 싸움에서 경쟁력을 선보였다. KCC는 바셋 가세 이후 추진력을 얻었다. TG와의 선두 경쟁에서 뒤지지 않았다. 시즌을 치른 결과 KCC는 39승 15패로 리그 2위로 정규시즌을 마쳤다. 아쉽게 1위를 차지하진 못했으나 준결승에 직행하면서 우승 도전에 나설 채비를 마쳤다.
바셋은 당시 베스트 5에도 선정이 됐다. 가드에 이상민과 김승현, 포워드에 추승균과 김주성이 선정된 사이 민렌드는 표를 받지 못한 것. 그러나 그는 외국선수상을 수상했다. 센터에는 바셋이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즉, 바셋의 합류로 KCC가 얼마나 많은 전력 상승을 일궈냈고, 마지막 약점을 메웠는지가 단연 돋보였다. 바셋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수비 5걸에도 이름을 올렸다. 공수 양면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우승 이후 잔류와 교체
KCC의 전력은 돋보였다. 1라운드를 통과한 창원 LG를 단 세 경기 만에 따돌렸다. 민렌드가 공격을 확실하게 이끌었다. 이상민이 코트 위에서 어김없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민렌드가 내외곽을 오간 사이 바셋이 골밑, 조성원이 외곽에서 이름값을 해냈다. 민렌드는 LG와의 준결승 1차전에서 홀로 42점을 쓸어 담으며 LG의 림을 사정 없이 두드렸다. 2차전에서 KCC는 고전했다. 그러나 경기 종료 직전 식스맨인 최민규의 쐐기 득점으로 KCC가 웃었다. 시리즈 첫 두 경기를 접수한 KCC는 3차전에서 민렌드가 홀로 30점을 책임졌고, 무려 33점 차로 LG를 따돌렸다.
결승에 진출한 KCC는 예상대로 TG와 격돌했다. TG도 준결승에서 전자랜드를 단 세 경기 만에 돌려 세웠다. 결승은 진검 승부가 예상됐다. KCC는 TG와의 정규시즌 상대 전적에서 4승 2패로 앞서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주전 센터인 리온 데릭스가 부상을 안고 있었다. 즉, TG가 KCC를 상대로 앞서가기 쉽지 않았다. 그나마 데릭스와 김주성을 중심으로 하는 높이가 이점이었으나 바셋이 KCC 유니폼을 입으면서 TG의 장점이 상쇄됐기 때문이다. 반면, KCC는 이상민과 조성원이 책임지는 백코트에서 우위를 점했다.
KCC는 시리즈 첫 두 경기를 따내면서 무난하게 출발했다. 적지에서 열린 두 경기에서 먼저 이긴 것. 그러나 안방에서 TG에 승리를 헌납했고, 5차전에서 민렌드의 33점 활약을 내세워 웃었다. 6차전을 내줬으며, 최종전에서 83-71로 이겼다. 7차전에서 이상민과 조성원의 외곽 공격이 주효했다. 시리즈 내내 민렌드의 공격과 조율하는 이상민이 TG를 상대로 어떤 모습을 보일 지가 중요했다. 조성원과 추승균의 지원도 잇따랐다.
당연히 바셋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기록에서 돋보이진 않았으나 트윈타워를 구축하고 있는 TG의 빅맨들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일당백이었다. 민렌드와 추승균은 TG의 김주성과 앤트완 홀에 맞서기 어려울 수 있었다. 그러나 바셋이 포진하고 있어 높이에 대한 의문이 일거에 해결된 점이 결정적이었다. 바셋도 KBL 진출 첫 해에 처음으로 우승을 합작했다. 시즌 때 리그 최고 센터로 존재감을 떨쳤던 그가 없었다면 KCC도 TG를 꺾기 쉽지 않았을 터. 그만큼 바셋의 활약이 중요했다.
그는 우승이 확정된 7차전에서 무려 25점 15리바운드를 올리기도 했다. 바셋의 모교인 올드도미니언은 그가 KBL에서 최고 센터가 된 후 대학 소식지를 이용해 한국에서 그의 실적을 알리기도 했다. 참고로, 그의 한국에서 등록명은 R.F. 바셋이나, 국제적으로는 레지 바셋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름(Reginald)에서 앞 글자를 따서 레지(Reggie)로 불렸다. 한국에서는 당시 KBS N 스포츠에서 권성욱 캐스터가 중계 당시 바셋의 이름을 ‘레지 바셋’으로 호명하곤 했다.
KCC의 우승, 모비스의 재건, TG삼보의 반격
시즌 후 바셋은 울산으로 돌아가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모비스는 감독을 교체했다. 최희암 감독과 함께 하지 않기로 한 것. 모비스는 유재학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유 감독은 전자랜드에서 앨버트 화이트, 문경은, 제이슨 윌리엄스로 이어지는 탄탄한 프런트코트 전력을 내세워 팀을 준결승까지 이끌었다. 비록 2라운드에서 TG에 가로 막혔으나 충분히 인상적인 시즌을 보냈다. 유 감독은 정들었던 인천을 떠나 울산에서 새로운 지도자 생활에 돌입하게 됐다.
그 사이 2004 드래프트에서 KCC는 양동근을 지명했다. 양동근은 KCC의 부름을 받았다. 이후 바셋 트레이드 조항에 따라 양동근의 지명 권리는 모비스로 양도됐다. 모비스는 유 감독과 양동근을 영입했다. 양동근 지명은 유 감독이 설계한 것이 아니다. 이전에 진행된 것이었다. 유 감독은 부임 이후 슈팅가드인 양동근을 포인트가드로 육성하고자 했다. 이후 양동근은 엄청난 노력으로 유 감독이 추구하는 수비 농구에서 최고 포인트가드로 자리하기 시작했다.
외국 선수 제도도 바뀌었다. 드래프트에서 자유계약으로 바뀐 것. 모비스는 크리스 윌리엄스와 계약했다. 윌리엄스는 공격 주도부터 경기 운영까지 많은 부분을 담당했다. 당시 양동근은 엄연히 포인트가드로 나섰으나 운영에 대한 부담은 많지 않았다. 윌리엄스가 공격을 모두 풀어갔기 때문. 그러나 이후 양동근은 리그 정상급 포인트가드로 도약했다. 이내 그를 빼놓고는 모비스의 전력을 논하기 쉽지 않아졌을 정도로 그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이윽고 정규시즌 MVP를 비롯한 각종 수상 경력은 물론 문태영, 함지훈과 함께 역사상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3연패를 달성했다. 모비스는 리그 최고 명문으로 거듭났다.
KCC는 양동근을 놓쳤다. 그러나 KCC는 이상민이 있었다. 전력은 충분했다. 외국선수 제도가 바뀌면서 바셋이 울산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됐고, KCC는 그와 재계약을 체결했다. KCC는 다시금 민렌드와 바셋으로 재차 우승 도전에 나서고자 했다. 그러나 민렌드가 자유계약선수가 활약하는 와중에도 제 기량을 펼친 반면 바셋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몸 관리에도 작은 아쉬움이 있었다. 결국, KCC는 외국 선수 교체를 단행했다. 임시로 그레고리 스템핀을 영입했고, 이후 제로드 워드를 데려왔다.
KCC는 2년 연속 결승에 진출했다. 다시 TG삼보를 만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TG삼보를 넘어서지 못했다. TG삼보는 신기성의 군 전역으로 허재의 은퇴 공백을 확실하게 채웠다. 오히려 강해진 전력과 시즌 막판 처드니 그레이를 아비 스토리로 바꾸면서 전력을 다졌다. 민렌드 수비를 위한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자유계약으로 들어온 자밀 왓킨스는 원주의 골밑을 든든하게 지켰다. TG삼보는 빅맨 뿐만 아니라 여러 포지션에서 높이의 이점을 살리면서 KCC를 제압했고, 2004년 결승에서 패한 것을 1년 만에 확실하게 설욕했다.
KBL 떠난 이후
바셋은 한계를 보였다. 2004-2005 시즌 초반에 교체된 이후 그는 이스라엘로 향했다. 그러나 1부리그 팀과 계약은 하지 못했다. 이스라엘 하부리그에서 그는 평균 14.5점 6.4리바운드 1.2블록을 올리면서 안정된 빅맨으로 활약했다. 이후 프랑스와 벨기에를 거쳤다. 프랑스에서는 28경기에서 평균 19.9분 동안 9.3점(.524 .111 .704) 4.9리바운드를 올렸다. 플레이오프에서는 좀 더 나은 경기당 11.7점을 올렸으나 한국에서 뛸 때처럼 주도적인 전력으로서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는 한국에서 자유계약선수를 상대로 위력을 떨치지 못했던 만큼, 유럽에서 살아남긴 더욱 어려웠다. 그는 지난 2006-2007 시즌에 벨기에 무대를 거쳤고, 2007-2008 시즌에 헝가리에서 한 시즌을 보낸 후 농구공을 내려놓았다.
사진_ KBL
바스켓코리아 / 이재승 기자 considerate2@basket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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