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으로 강화된 노동자 협상력 지속될 수 있나
기사내용 요약
중세 서유럽 흑사병으로 인구 급감하면서 민주주의 발전
현재 팬데믹은 인구 감소 촉발안해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강화된 협상력 제도화하는 조치로 노동자 권익 신장 가능
![[서울=뉴시스]윌리엄 블레이크가 1779년에 그린 영국 흑사병 묘사도. (출처=폴리티코) 2021.11.08.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111/08/newsis/20211108145801292smms.jpg)
[서울=뉴시스] 강영진 기자 = 700년 전 유럽대륙에 흑사병이 돌면서 불과 4년새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줄어드는 대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사회 및 경제 제도 전반이 사실상 해체되면서 크게 억제됐던 노동자들의 지위가 크게 올라 각 지역에서 이후 수백년 동안 지속적으로 민주주의와 포용적인 정치를 촉발했다는 연구 결과가 최근 발표됐다.
이같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미국의 정치학자 2명이 현재 진행중인 팬데믹도 임금상승을 촉발하는 등 노동자들의 협상력을 높여 장기적인 경제적, 정치적 변동을 촉발할 것으로 예측하는 정치학자의 기고문을 미국의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Politico)가 7일(현지시간) 게재했다.
다음은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 대니얼 깅거리치 교수와 독일 콘스탄스 대학교 얀 폴거 교수가 공동으로 작성한 기고문 요약.
흑사병으로 1347~1351년 사이 유럽 대륙의 인구가 절반으로 줄면서 광산이나 야금과 같은 산업은 완전히 중단됐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지역에 있던 농촌마을들은 완전히 폐허가 돼 숲으로 탈바꿈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인간이 겪은 커다란 고통을 넘어 사회적, 경제적 제도를 무력화했다. 특히 인간의 자유와 번영을 억누르던 제도들이 무너졌다.
우리가 최근 발표한 연구에서 타격을 크게 받았던 지역일수록 노동자들의 협상력과 사회적 지위가 급격히 향상됐고 착취적인 노동관행이 사라졌다. 그 결과 정부들은, 특히 지방정부들이 큰 폭으로 민주화되고 포용적이 됐다. 이같은 영향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에도 유사한 현상의 초기 조짐이 보인다. 노동자들이 임금이 낮은 여가 및 숙박업 등의 저임금 일자리를 그만두고 고임금 일자리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 일부에선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이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노동자들의 협상력을 강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임금 상승이 인플레에 따라 재조정되는 정도이며 전반적인 불평등은 개선되지 않는 등 위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혼재돼 있지만 흑사병 사건은 팬데믹이 촉발한 노동력 공급 변화가 의미가 크며 경제와 정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중세시대 의학은 흑사병의 원인은 물론 치료법도 밝혀내지 못했다. 쥐가 퍼트린다는 사실은 현대에 들어서 알게 된 사실이며 당시 의사들은 공기중에 퍼진 독이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항생제로 간단히 치료될 수 있는 병이었지만 당시는 사혈과 같은 터무니없는 치료법이 횡행했었다. 이 때문에 중세시대 흑사병은 치사율이 60~70%에 달했다. 중앙아시아와 교역 루트를 통해 유럽에 전파된 흑사병은 당시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대재난이었다.
대규모 사망 사태가 노동자들의 운명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흑사병이 발생하기 직전 유럽은 봉건시대로 군대를 보유한 귀족(그리고 성직자)들이 위에 있고 대다수 농노들은 최하층이었다. 당시엔 경제는 대부분이 농업이었으며 엘리트의 자본은 거의 전적으로 토지였다. 신분제에 따라 이 토지에 매여 있던 농노들은 가혹한 착취를 당하는 시스템 속에서 살았다. 이동을 제한당하면서 무제한적인 노동에 시달렸다.
흑사병이 일으킨 인구 붕괴로 이 시스템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 수요공급의 기본 법칙이 이같은 변화를 설명한다. 흑사병으로 큰 타격을 받은 지역은 노동력이 10분의 1로 줄었다. 이에 따라 지배층의 토지 경작이 중단됐다. 경제의 한 요소인 노동력이 갑자기 귀해지고 비싸졌고 상대적으로 토지는 공급이 넘쳤다. 이에 따라 농노들의 협상력이 크게 강화됐다. 노동조건의 개선, 토지 소유 기회의 확대를 찾아 노동자들이 도시로 이주했다. 흑사병이 발생한 뒤 몇 년 새 농노제도가 붕괴하고 자유노동에 기반한 임금경제가 들어섰다.
유럽 전역에 걸쳐 이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독일을 기준으로 유럽대륙의 서쪽 지역을 지칭하는 서유럽은 흑사병피해가 심했던 탓에 노동 협상력이 강화했지만 교역이 활발하지 않고 인구밀도가 낮았던 동유럽은 사망자가 많지 않았다. 이에 따라 독일어를 사용하는 중부 유럽을 포함한 동유럽 지역은 농노제도가 수백년 동안 더 유지됐다.
노동의 자유면에서 이같은 차이가 지역 정치와 제도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컸다. 흑사병 사망자가 많아 농노제도가 붕괴한 중부유럽에서는 시위원회를 선거로 선출하는 등 보다 포용적인 정치제도가 자리를 잡았다.
이같은 변화는 애당초 농업조직의 변화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다. 흑사병 피해가 심한 지역에서는 엘리트들이 농업생산의 일상적 관리를 농노 자신에게 맡기는 권력의 탈중앙화가 이뤄졌다. 이것이 다시 지역간 협력의 필요성을 높였다. 마을 단위의 농업생산은 농부들이 수확에 동의하고 노동력을 분배해야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자치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농촌마을에선 마을의 책임자를 직접 선출하게 해달라는 요구가 커졌다. 시간이 흘러 집단 자치의 폭이 넓어졌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서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고 협력하는 문화가 탄생했고 이것은 다시 흑사병 발발 이전의 이익을 되찾으려는 엘리트들에 맞서 노동의 자유를 지키는 핵심 요소가 됐다.
오늘날의 독일 남서 지방의 경우 지역자치정부의 존재 덕분에 농부들이 힘을 합쳐 자신들을 농노로 되돌려놓으려는 엘리트들에 맞서 싸웠다. 무기를 모으고 군대를 조직해 성을 공격했다. 1525년의 농민전쟁이 대표적인 사건이다.
흑사병 피해가 적은 지역에서는 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엘리트들이 갈수록 노동력 착취를 더했다. 이같은 차이가 정치 문화와 제도 발전에 장기적으로 미친 영향이 수백년이 지나서도 나타난다. 민주적 참여의 전통이 긴 지역의 시민들이 1870년대 제정 독일 시대의 보수정당이나 바이마르공화국 시대 국가사회주의당(나치)과 같이 반민주적 색채가 강한 정당에 반대했다. 흑사병이 장기적인 투표행동에 인과적 영향을 미친 것이다.
독일 남부 뷔르템베르크주가 좋은 예다. 뷔르템베르크는 흑사병 피해가 유독 컸던 지역이다. 그 결과 주내 여러 마을에서 농노제도가 사라지고 농민자치정부가 들어섰다. 농민들의 독립성이 커지고 뭉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던 뷔르템베르크는 귀족들에게 항거해 자유를 지킨 1525년 농민전쟁에 가장 먼저 가담했고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뷔르템베르크는 독일 역사에서 자유주의에 대한 억압이 가장 심했던 시기에 자유주의 가치를 옹호하는 요새역할을 했다. 제정 독일이 들어서면서 반민주주의적 보수당은 1871년 선거에서 뷔르템베르크 전체 투표자의 2.3%에 불과한 지지만 받았다. 참여 민주주의 전통이 약했던 제정 독일의 동부 지역에서 두자리수의 지지를 받은 것과 대조적이다. 마찬가지로 1930년 선거에서 뷔르템베르크 시민들의 국가사회주의당 지지율은 9.3%에 불과했다. 당시 바이마르공화국 전체 투표구에서 두번째로 낮은 지지율이다. 국가사회주의당에 대한 전국적 지지율은 18.3%였다.
이처럼 흑사병 팬데믹이 노동자들의 협상력 강화에 기여했고 수백년에 걸치 인간의 자유 신장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현재 진행중인 코로나 19 팬데믹도 지속적인 사회적 영향을 미칠 것인가? 팬데믹으로 인한 피해가 흑사병에 크게 못미치고 기술이 경제를 크게 좌우하기 때문에 중세와 현재의 사회변화 역동성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중세 유럽에서처럼 작금의 팬데믹도 가용 노동력을 줄이고 있다. 노동력이 부족하면 많은 경우 노동자들이 자신이 가졌던 직업을 버리고 보다 나은 노동조건을 위해 파업을 하는 등 협상에 나서도록 만든다. 이런 현상이 일시적인 것인지 아니면 보다 영속적인 현상인지는 최근 노동자들이 입은 혜택이 제도화됨으로써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집단행동을 하도록 할 것인지에 달렸다.
노동조합의 집단행동을 촉진하고 파업에 대한 보복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는 노동 결사권 보호법과 같은 입법이 제도화의 한 예다. 나아가 공공노동자들의 협상력 강화를 전면 금지하는 일부 주에서 집단행동의 권리를 보장하도록 하는 등 국가적인 개혁이 촉발될 수도 있다. 또 노동조합의 협상력을 약화시킨 일할 수 있는 권리를 국가 차원에서 폐지함으로써 노동자들의 협상력이 강화될 수도 있다. 이런 변화는 기업주, CEO 또는 기업 상위 관리자들이 독점해온 생산성 증가분을 평화롭게 되찾도록 할 수 있다.
한편 코로나 팬데믹이 현재의 노동력 부족에 미친 영향은 흑사병과는 달리 팬데믹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현재의 노동력 부족은 팬데믹의 부차적인 효과지 노동자들이 숨져서 발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팬데믹 이전이라면 은퇴하지 않고 더 오래 일할 의욕이 있거나 새로운 직업을 찾으려는 의욕이 있던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시장에서 이탈했다. 이에 더해 많은 젊은 부모들이 적절한 비용으로 자녀를 맡아줄 곳을 찾지 못하는 것도 노동력 부족현상을 심화시켰다. 감염의 위험이 높은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돌파감염을 피해 복직을 회피하고 있다.
이런 변화들 모두 인구 감소와 같은 영구적 변화와는 다른 것이다. 노동시장에서 이탈한 일부 사람들이 다시 자발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노동시장에 다시 진입하는 경우도 있다. 또 자녀 돌보는 비용이 낮아지면 부모들도 노동시장에 다시 복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백신 추가접종과 접종률 중가에 따라 위험도가 높은 직업 종사자들도 복귀할 수 있다.
앞으로 몇 달 새 이런 현상들이 진행된다면 현재의 노동 협상력은 다시 약화할 것이다. 입법이나 조직화를 통해 노동 협상력을 강화하는 제도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노동력 공급이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늘어나면서 노동자들이 보다 공정한 경제 파이를 영구적으로 차지할 수 있는 기회의 창이 닫힐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는 미국에서 진행중인 노동협상력 붕괴현상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공감언론 뉴시스 yjkang1@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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