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재 "자신의 길 끝까지 가는 사람은 언젠가는 제 역할을 해"

정혁준 2021. 11. 1.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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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리어왕' 대장정 시작한 이순재 인터뷰
"과거 리어왕, 줄이거나 원작과 다른 해석
셰익스피어 연극 진수는 대사, 이번엔 그대로"
제대로 된 주연 못했지만 출연작 대부분 히트작
'국민배우' '야동 순재' '직진 순재', '꽃할배' 등 인기
이순재식 '리더론' '나이론'과 '배우론' 가슴에 새길만
연극 <리어왕>에 출연하는 이순재가 28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이 잔인한 폭풍을 견디고 있을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이여! 머리를 눕힐 집 한 칸 없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구멍 뚫린 누더기를 걸치고, 어찌 이 험한 날씨를 감당하려 하느냐. 나는 그동안 너무나 무관심했구나. 부자들이여! 가난한 자의 고통을 몸소 겪어보라. 넘쳐나는 것들을 그들과 나누고 하늘의 정의를 실천하자.”

이순재가 주연을 맡은 연극 <리어왕> 막이 올라가기 이틀 전인 28일 오전 11시.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이순재에게 연극에서 기억나는 대사를 소개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리어왕이 폭풍우를 맞으며 참회하는 장면(3막 4장)의 대사를 이렇게 읊었다.

“이게, (이 연극의) 핵이에요. 리더는 자기만 생각하지 말고, 아랫사람을 배려해야 합니다. 리어왕은 그렇지 않은 거지. 리어왕이 이걸 반성하고 회개하는 대단히 중요한 대목이에요.”

연극 <리어왕>은 서울대 극예술 동문 중심으로 만든 극단 관악극회에서 연기 인생 65주년을 맞은 이순재를 기리기 위해 준비한 프로젝트다. 이순재는 지난 30일부터 이달 21일까지 3주 동안 예술의전당 씨제이(CJ) 토월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23회차 모든 무대에 선다.

이번 <리어왕>은 ‘원전 그대로’를 보여주기 위해 공연 시간만 3시간20분에 이른다. “그동안 <리어왕> 연극은 많이 있었죠. 하지만 공연 시간을 줄이거나 연출가가 원작과 다르게 해석한 작품이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 셰익스피어 연극의 진수를 제대로 전달 못 했어요.”

그가 생각하는 진수는 무엇일까? “셰익스피어 연극의 진수는 대사에 있습니다. 그게 본류입니다. 리어왕 줄거리는 ‘딸들에게 속아 미쳐서 죽는다’예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대사에 문학과 사상이 녹아 있고, 시대 상황과 메시지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동안 그런 대사를 잘라 내버렸거나 다르게 해석했어요. 이번엔 원전 그대로를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셰익스피어의 본령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순재는 리어왕에서 어떤 메시지를 보여주고 싶을까? “리더는 국민을 배려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겁니다. 여민동락(왕이 백성과 더불어 낙을 같이 나눔)이죠. 이건 통치자에게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닙니다.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직원들이 밤늦게까지 야근하면 족발, 막걸리 사 와서 건네주는 거예요. 어렵고 힘든 사람에게 눈을 돌리고 배려하는 그런 마음이죠.”

연극 <리어왕>에 출연하는 이순재가 28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연극 <리어왕>에 출연하는 이순재가 28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이순재가 연극의 길로 들어선 건, 로런스 올리비에가 주연한 <햄릿>(1948)을 보고 난 뒤였다. “대학교 2학년 때 로런스 올리비에가 나오는 <햄릿>을 봤어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에서 소름이 쫙 끼치더라고. ‘저 배우가 누구냐’ 하면서 궁금해 알아봤어요. 영국 최고의 셰익스피어 배우였죠. 그때만 해도 우리는 배우를 ‘딴따라’라고 했던 시절이었는데, 그 사람은 영국 왕에게 작위를 받았더라고요.”

이순재는 9월28일 기자간담회에서 “배우로서 최고의 행운은 좋은 작품과 좋은 연출을 만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 작품 가운데 햄릿 역을 꼭 해보고 싶었는데 못 했다. 근데 최불암은 햄릿 역을 했다”고 말했다. 그 말이 내내 떠올랐다. ‘얼마나 그 역할을 하고 싶었으면, 그 역할을 맡은 배우가 얼마나 부러웠으면 반백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말을 할까’라고 생각했다.

이순재가 출연한 <풍운>. KBS 제공

‘햄릿’이 되고픈 젊은 이순재는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연극은 물론 다른 장르에서도 그는 제대로 된 주연을 맡지 못했다. 한국영화가 전성기였던 1960년대에는 신영균·남궁원·신성일 등이 영화에서 남자 주연을 도맡았고, 텔레비전 전성기였던 1970년대엔 박근형·이정길·노주현 등 후배 배우가 안방극장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큰 키에, 덩치도 있고, 외모가 받쳐주는 배우 앞에서 이순재는 움츠러들었다. 그가 주연으로 설 자리는 없었다.

하지만 이순재는 무릎 꿇지 않았다. 오히려 콤플렉스는 이순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고, 더 큰 그릇을 빚는 틀이 됐다. 그 기간 배우의 기본을 꾸준하게 쉼 없이 다져나갔다. 그는 이중모음과 단모음, 장음과 단음을 구분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배우다. 언어학 천재여서가 아니다. 무수한 연습을 통해서다.

“연기의 기본은 언어 전달이죠. 그러려면 언어 표현이 정확해야 해요. 난해한 언어가 나오는데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고 날려버리면 관객이 알 수가 없죠. ‘정(丁)세균’의 정은 짧게, ‘정(鄭)몽준’의 정은 길게 발음해야 해요. 정의(情意)와 정~의(正義)도 마찬가지고.”

이순재가 출연한 <사랑이 뭐길래>. MBC 제공

이순재는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지만은 않았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배역을 맡았다. 당시엔 대부분 손사래를 치는 악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형사물 시리즈에서 범인만 33번을 했다. 다양한 배역을 맡으면서 캐릭터를 분석하고 연기를 익혀 나갔다. 2006년 젊은층뿐만 아니라 전 세대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던 레전드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도 그는 ‘야동 순재’를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거침없는’ 이순재의 활약은 29일 방송한 <다큐플렉스>(MBC) ‘청춘다큐―거침없이 하이킥’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순재가 출연한 <거침없이 하이킥>. MBC 제공

“내가 키가 큰 편은 아니잖아. 못생기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잘생긴 건 아니고.(웃음) 외모가 좋으면 광고도 들어오고 주연급도 잘 맡겠지. 하지만 꾸준히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끝까지 나가는 사람은 언젠가는 제 역할을 해.”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오일남’으로 열연한 오영수를 아는지를 물었다. “국립극단에서 오랫동안 연극을 한 배우여서 잘 알죠. 꾸준히 연기해온 배우였는데, 빛을 발휘해서 좋았죠. 은근하게 축적해온 노력의 결과가 빛난 것이죠”라고 했다.

하나를 덧붙였다. “봉(준호) 감독과 윤(여정) 여사의 아카데미상, 케이팝, <오징어 게임>을 보면서 우리나라 콘텐츠가 글로벌에서 뜨고 있는 걸 느껴요. 이젠 전세계 시장을 상대로 제대로 좀 만들자는 거지. 국내 1~2%의 시청률에 연연하지 말고. 세계 문화수출 상품이 되면 우리 국력과 국가 이미지에도 기여하는 거거든.”

이순재가 출연한 <제2공화국>. MBC 제공

<꽃보다 할배―스페인 편>에서 “나이 먹었다고 주저앉아서 어른 행세하고 대우받으려고 주저앉아 버리면 늙어버리는 거고, ‘난 아직도 한다’ 하면 되는 거예요”라는 그의 말이 회자가 됐다. 기성세대의 ‘꼰대’와 ‘라떼’를 지적하는 사회에서 그의 말은 어록으로 떠돌아다닌다.

“콘텐츠 하나를 만들 때 배우와 스태프 숫자가 70~80명에 이를 정도로 공동 작업을 해요. 근데 ‘내가 주인공이다’ ‘내가 어른이다. 편의제공을 해라’고 하면 협동이 되겠냐고. 그래서 인기가 있으니, 나이가 들었으니 ‘대접이 좀 달라졌다’는 말을 안 좋아해요. 그건 특권을 누리겠다는 거거든. 그렇게 특권을 누리면 함께해야 하는 일에 도움이 전혀 되지 않죠.”

이순재가 출연한 <꽃보다 할배>. tvN 제공

주연을 맡지 못했지만 출연한 드라마는 대부분 히트작이었다. <풍운>(1982) 흥선대원군, <제2공화국>(1989) 윤보선 대통령, <사랑이 뭐길래>(1991) 대발이 아빠, <허준>(1999) 유의태, <상도>(2001) 거상, <이산>(2007) 영조, <베토벤 바이러스>(2008) 오보에 연주 할아버지 등을 맡으면서 그는 배역을 100% 소화해 냈다. 어떤 배역을 맡겨도 해냈기에 드라마 제작 때마다 섭외 0순위였다.

이 가운데 가장 맘에 드는 배역을 물었다. “애착이 가는 작품은 <풍운>이에요. 내가 흥선대원군을 맡기 전까지 대원군 역은 김승호, 최불암처럼 체격이 큰 사람이 도맡았죠. 작은 체구 연기자가 대원군을 맡은 건 내가 처음이죠. 덩샤오핑처럼 작았지만 큰 스케일을 보여주는 캐릭터를 만들어 보려고 이런저런 노력을 많이 했어요. 드라마 중에 고관대작을 앞에 두고 4분 동안 내지르는 대사가 있었는데, 그 대사를 위해 피워왔던 담배도 끊었죠.”

이순재가 출연한 <세일즈맨의 죽음>. <한겨레> 자료사진

‘국민배우’, ‘직진 순재’, ‘야동 순재’, ‘꽃할배’ 등 그에게 붙은 별명도 많다. 이 가운데 어떤 별명을 좋아할까? 그는 허허 웃었다. “‘직진 순재’는 꽃할배에서 나왔죠. 할배들이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해죠. 내가 젤 선배여서 길을 잘 찾아야 했지. ‘그 귀한 시간을 내서 그 먼 나라까지 갔는데 하나라도 더 봐야지’ 하는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진 거야.” 한 보험사 광고에서 그가 말한 카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는 국민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연극 <리어왕> 연습 장면. 파크컴퍼니 제공

그는 65년 연기생활에서 잠시 외출을 한 적이 있다. 민주자유당 공천을 받아 서울 중랑구갑에서 14대 국회의원이 됐다. “내 경험에서 볼 때 국회의원 하려면 자신과 가족을 모두 포기해야 해요. 선거는 돈이야. 공짜 돈은 하나도 없어요”라고 했다. 그러다 문득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잘했다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정치자금법을 개정해 정치할 때 돈 안 쓰는 선거를 만들었거든.”

17일은 이순재의 음력 생일이다. 세는나이로 88살. 이순재는 이날도 <리어왕> 무대에 오른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사극 녹화를 했고, 어머니 돌아가신 날 연극 공연을 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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