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섞어라, 그러면 살 것이다

한겨레 2021. 10. 29.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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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뜨는 컬래버레이션
소비재 브랜드 화두, 컬래버레이션
인플루언서-인스타그램-기업 '합작'
과공급에도 '브랜드 칵테일' 계속
깜짝 인기를 보인 유니클로와 화이트 마운티니어링의 콜라보레이션. 유니클로 제공

“화이트 마운티니어링 있어요?”

지난 15일 저녁 6시30분쯤 어느 유니클로 매장에서, 유니클로도 화이트 마운티니어링도 익숙지 않아 보이는 중년 여성의 다급한 목소리가 내게까지 들렸다. 직원은 친절하게 그날 60번은 했을 말을 반복했다. “다 나갔고 여기 이만큼만 남았어요.” 직원이 가리킨 곳엔 두세 벌의 옷만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여성은 10초도 고민하지 않고 옷 한 벌을 든 채 계산대로 향했다.

그분은 왜 그렇게 서둘렀을까? ①수량이 한정된 제품이 출시됐는데 ②그 제품의 품질이 좋고 ③게다가 가격까지 나쁘지 않아서 ④사람들이 줄을 선 게 소문날 만큼 인기가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구경이나 하려 들렀다 딱 한 벌 남은 옷을 보고 ‘안 사면 내가 손해인가’ 싶어 홀린 듯 계산하고 말았다. 며칠 후 친구 한 명도 똑같은 생각으로 같은 옷을 샀다. 이제는 일반화된 패션 컬래버레이션 시대의 풍경이다.

이 사진 속 남자가 입은 점퍼가 특히 인기를 끌었다. 유니클로 제공

애태우며 물건 사는 이 마음

나와 내 친구와 그때 그 소비자가 함께 느낀 마음은 조바심이다. 그 조바심이 패션 컬래버레이션 상품 시장의 동력 중 하나다. 매력적인 물건이 잠깐만 만들어지고 앞으로는 볼 수 없다면 그 물건을 좋아하는 사람은 애가 탄다. 현대 사회의 패션 컬래버레이션은 사람을 애태우는 이유를 끝없이 늘려가면서 점차 커진다. 사람이 갈망하는 이유는 많다. 내가 좋아하는 뭔가가 제품화되어도, 내가 좋아하지만 평소에는 비싸서 못 사던 게 특정 브랜드와의 협업으로 싸져도, ‘지르는’ 이유가 된다.

2020년대 세계의 거의 모든 소비재 브랜드의 화두가 컬래버레이션이다. 컬래버레이션은 1990년대 일본 도쿄의 작은 옷가게들로부터 시작했으나 지금은 식품이나 자동차 등에서도 협업 상품이 일상화됐다. 컬래버레이션계의 원조인 패션 산업에서의 협업은 더욱 고도화되었다. 이 고도화는 국제화, 시장화, 다양화, 다변화 등의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다.

컬래버레이션을 산업 용어로 풀면 ‘한정 기간 판매하는 다품종 소량 생산품’ 정도가 된다. 엄밀히 말해 모든 공산품은 한정 기간만 판매하니 컬래버레이션의 핵심은 다품종 소량 생산이다. 다품종 소량 생산이 가능해졌다는 건 그만큼 생산관리와 발주가 쉬워졌다는 뜻이다. 패션 시계나 신발의 컬래버레이션 상품이 그 예다. 기반이 되는 모델은 같은데 색을 바꾸고 특정한 로고를 한두 개 추가했으니 상품 기획 및 개발 입장에서 보면 보통 신상품 제작과 큰 차이가 없다. ‘컬래버레이션’, 즉 누군가와 함께했다는 맥락이 더해졌을 뿐이다. 실제로 컬래버레이션 상품을 생산 가능한 제품 발주 수량도 별로 크지 않다. 컬래버레이션을 많이 하는 어느 제품 브랜드는 약 1000개 정도면 무난히 생산이 가능하다.

펜디와 베르사체의 콜라보레이션. ‘펜다체’라고 새로 만든 로고가 보인다. 펜디 제공

컬래버레이션 과공급 시대

여기 국제화와 시장화가 붙으며 게임이 커졌다. 지금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의 영향으로 특정 트렌드가 국제적으로 퍼질 가능성이 무척 높다. 한국에 정식으로 들어오지도 않은 브랜드의 컬래버레이션 모델이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을 타고 여러분의 손바닥 속 스마트폰 화면에 떠서 결제를 부추긴다. 이런 추세에 리셀 플랫폼까지 더해지며 컬래버레이션 시장은 팝 아트 시장과 비슷한 성향을 띠게 된다. 가장 인기 있는 컬래버레이션 모델들은 미국의 스탁엑스나 한국의 크림 등의 서비스를 통해 주가처럼 가격이 노출되고, 유명 컬래버레이션 상품들은 자산이나 투자라는 개념으로 봐도 될 정도로 가격이 뛴다. 현대의 패션 컬래버레이션은 생산자와 소비자와 유통사의 욕구가 모두 절묘히 맞아떨어진 결과물이다.

우연히 모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엄청나게 많은 패션 컬래버레이션이 만들어지고 있다. 2021년 진행된 패션 컬래버레이션은 글로벌 브랜드로만 한정해도 30개가 넘는다. 이미 개개인의 수요를 한참 넘어서는 컬래버레이션 과공급의 시대가 찾아와 있다. 생산자 쪽에서 컬래버레이션은 신제품이 나왔는데 뉴스까지 만들어지는 경우다. 소비자 쪽에서는 ‘이번 시즌에는 또 무슨 재미있는 물건이 나오나’ 싶은 이벤트다. 생산자와 소비사 사이의 판매 플랫폼은 컬래버레이션 상품의 자산가치를 활용해 리셀 플랫폼을 만들어 수수료를 챙긴다.

컬래버레이션 제품은 개념적으로도 신기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나는 2019년 컬래버레이션이라는 개념을 거의 세계 최초로 제창한 일본 패션 회사 담당자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그때 “개인과 기업이 컬래버레이션을 하는 미래가 보인다”고 말했다. 고작 2년 후 그의 말이 생생한 현실이 됐다. 미국 래퍼 트래비스 스콧과 나이키가 협업한 신발의 가격은 최대 900만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된다. 인플루언서가 된 거대 개인이 컬래버레이션의 한 축이다.

명품 브랜드도 고고한 과거를 뒤로한 채 컬래버레이션에 열중한다. 크리스찬 디올은 나이키와 함께한 ‘에어 디올’을 작년 발매했고 지금 이 신발의 리셀가도 1000만원이 넘는다. 급기야 올가을 펜디와 베르사체는 서로의 디자인과 로고를 섞은 ‘펜다체’(FENDACE) 컬렉션을 발표했다. 브랜드 로고를 공책에 따라 그리는 청소년도 안 할 일을 글로벌 브랜드가 해버렸으니 앞으로의 패션도 흥미진진하다.

펜디의 패턴으로 만든 야구 모자에 베르사체 로고가 새겨진 모습. 패션 애호가라면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장면. 펜디 제공

새로운 실루엣 없는 시대의 결론

패션 컬래버레이션은 한계에 놓인 패션 브랜드의 고육지책처럼 보이기도 한다. 패션은 늘 시대의 반영이다. 20세기에는 시대를 선도하는 엘리트, 혹은 시대를 아래에서 뒤흔드는 불량아, 그게 누구든 남다른 인간의 에너지가 패션 산업의 ‘잇템’이 되었다. 반면 지금 시대의 선도자들은 스트리트웨어나 요가복으로 대표되는 ‘추리닝’을 입고, 불량아들도 특유의 야성을 잃은 채 기성 사회에 매끈하게 편입됐다. 근본적으로 새로운 실루엣이 나오지 않는 시대에 브랜드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존의 상징요소를 칵테일처럼 섞는 일뿐이다. 그게 오늘날의 컬래버레이션인 듯도 하다.

그러나 나 역시 이 흐름에서 못 벗어나는 중생이다. 원고를 위해 자료를 찾다가 산업디자이너 찰스 임스 재단과 어느 브랜드가 협업 운동화를 출시했다는 소식을 알고 또 한번 홀린 듯 주문해버렸다. 이래서야 원고를 써도 남는 게 없다.

박찬용 칼럼니스트

양말에서도 펜디와 베르사체의 로고를 합쳐둔 게 보인다. 펜디 제공
베르사체의 메두사 로고 위에 펜디의 로고를 얹은 이번 시즌의 가방. 펜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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