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 속 주인공은 생존을 고민하고, 나는 생각한다 '내일 저거 먹어야지' [내가 사랑한 한끼]
[경향신문]
‘내가 사랑한 한끼’는 음식, 밥상, 먹는 일에 관해 경험과 생각을 나누는 코너입니다.
우유를 한 팩 샀다. 매대에서 가장 작은 사이즈의 우유를 집으며 마지막으로 우유를 샀던게 언제였더라, 생각했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우유를 마시지 않는다. 오랜만에 우유를 산 이유는 단 하나. 어제 정주행한 넷플릭스 ‘클릭 베이트’ 에서 형사 로샨이 씨리얼을 먹는 장면을 봤기 때문이다. 범인 검거에 실패하고 퇴근한 그는 불 꺼진 집에서 씨리얼을 꺼내 침대에 걸터앉는다. 그는 망한 수사, 망한 결혼, 망해가는 연애 때문에 씨리얼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 장면을 보며 한 가지 생각만 했다. 내일은 꼭 씨리얼을 먹어야지.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음식들’을 좋아한다. 몇 년 전 내가 먹고 마신 치즈버거와 커피의 절반 이상은 ‘길모어걸스’에서 루크가 운영하는 식당의 대표 메뉴가 치즈버거와 커피였기 때문일 것이다. 로렐라이가 출근 시간마다 대접만한 머그컵에 커피를 마시는 걸 보면 나도 강렬하게 커피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을 읽으면서는 “커피 한 잔과 오렌지 하나를 들고 조용히 계단에 앉아서 기분 좋은 아침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자, 가서 버터 바른 빵 좀 먹으렴” 같은 나른한 문장에 시달리다 결국 책을 덮고 부엌으로 갔다. 바게트에 버터를 잔뜩 발라 접시에 쌓아놓고 오렌지 주스와 먹으며 책을 마저 읽었다. 어릴 때 책을 읽다 ‘포도주’ 라는 단어를 보고 주방으로 달려가 포도주스를 유리컵에 따라서 홀짝였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꽤 오래 전부터 이랬던 것 같다. 이제는 옛날 영국 추리소설을 읽을 때면 ‘뜨거운 차와 비스킷’ 같은 것이 등장할 것이 너무 뻔해서 아예 찻물부터 끓여놓고 시작한다.

즐겁고 행복한 장면에서 나오는 음식들보다는 갈등 상황에 놓인 주인공들의 옆에 있는 음식에 더 관심이 간다. ‘굿걸스’에서 FBI 조사를 앞둔 베스가 초조함을 달래려 열 판쯤 구워낸 시나몬롤과 페스츄리들. 그 친구인 루비가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새벽 내내 남겨질 가족들을 위해 만든 거대한 라자냐. ‘킬링 이브’에서 킬러 빌라넬이 신분을 속이고 방문한 집에서 먹게되는 따뜻한 후르츠케이크. 이렇게 생존 혹은 자아 붕괴의 위기에 처한 화면(책) 속 주인공들은 세상 심각한데, 나는 잠깐 정지 버튼을 누른 뒤(책을 덮은 뒤) 롤빵을 사러 나가거나 파스타 면을 삶으며 콧노래를 부른다.
의외로 요리를 메인 소재로 한 콘텐츠에 등장하는 음식에는 흥미가 없다. ‘아메리칸 셰프’를 보고나서 쿠바 샌드위치가 먹고 싶어지는건 너무 당연한 일이니까. (사실 그 영화에서도 나는 그 샌드위치보다 영화 초반 존 파브로가 스칼렛 요한슨에게 해주는 파슬리 파스타에 더 관심이 갔다. 그는 몇 년뒤 자신이 제작, 출연한 넷플릭스 시리즈 ‘더 셰프 쇼’의 첫 요리로 그 파스타 조리법을 선보였다.) 그보단 ‘범블비’에서 헤일리 스타인펠드가 반항하듯 먹는 ‘팝 타르트’가 훨씬 나를 자극한다!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러니까 ‘이야기를 돕는’ 음식들인 것 같다. 없다고 이야기가 멈추진 않지만, 존재함으로써 극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음식들.

이런 사람은 커서 요리사까지는 안되더라도 먹는 것 자체를 꽤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맛집에는 별 관심이 없고, 타인과의 식사 때는 먹고 싶은 것보다 먹기 편하거나 나오는데 오래 걸리지 않는 메뉴를 주로 선택한다. 혼자 먹을 때도 집 아래 초밥집에서 매번 똑같은 롤을 테이크아웃한다. 분위기 좋은 카페보다는 어느 매장에서도 균일한 맛의 커피를 내주는 스타벅스의 안전함이 좋다. 그러니까 ‘이야기 속 음식들’을 찾아 먹을 때는 ‘먹는 일’에 대한 나의 의지가 발휘되는 거의 유일한 순간이자, 단조로운 식생활에 즐거운 변화가 생기는 즐거운 순간이기도 하다.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만에 우유를 사게 되는 것처럼.
고사리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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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니로그 기자 eat@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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