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태기의 사이언스토리]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인간의 광기, 알 수 없네

민태기 에스앤에이치연구소장·공학박사 2021. 10. 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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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초 영국 휩쓴 투기 광풍 휘말리며
당시 200년치 연봉 손실 봤던 뉴턴의 한탄
獨서 건너와 오페라로 런던 열광시킨 헨델은
독일 출신 새 왕 견제 휘말려 파산 당하기도
왕실·귀족 후원금에 기대 휘둘리지 않으려
뉴턴과 헨델은 자신들의 꿈에 투자했다

무려 34년간 계속되다 코로나로 중단된 런던 ‘여왕 폐하의 극장(Her Majesty’s Theatre)’의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지난 7월 재개되었다. 여전히 매서운 팬데믹 속에서도 공연을 추진한 것은 어떻게든 일상을 회복하려는 첫걸음이다. 이 극장이 역병의 시대였던 17세기를 벗어나며 런던이 세운 최초의 오페라 극장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꽤 의미가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당시 런던을 주름잡던 뉴턴과 헨델의 이야기가 얽혀있다.

1710년 가을, 25세의 독일 하노버 궁정 음악가 헨델이 런던 헤이마켓(Haymarket) 거리에 새로 선 극장에 입성한다. 17세기 흑사병으로 모임이 금지되자 극장가는 초토화되었고, 청교도 혁명으로 공연은 제한되었다. 오랜 기간 음악에 목말라 있던 런던 시민들은 헨델의 오페라에 열광했다. 헤이마켓의 성공으로 헨델은 단숨에 스타가 되었다. 같은 시기, 런던의 또 다른 스타 뉴턴은 ‘도레미파솔라시’ 7개의 음에서 착안해 무지개도 7가지 색이라고 주장한다. 무지개를 일곱 빛으로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음악에 빠져든 뉴턴 때문이다.

/일러스트=이철원

이 무렵, 뉴턴은 조폐국장을 맡아 화폐개혁을 이끌고 화폐 위조범을 단속하는 업무를 훌륭히 수행하고 있었다. 뉴턴이 조폐국 일에 몰두하는 동안, 영국 학계는 뉴턴의 경쟁자였던 유럽 최고의 석학 라이프니츠를 공격한다. 라이프니츠 또한 하노버 궁정 소속이었으니, 헨델은 직장 동료 라이프니츠를 잘 알고 있었다. 1710년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저작권법이 만들어지고, 런던 왕립학회가 뉴턴을 표절했다며 라이프니츠를 고소하자, 이제 양쪽 진영은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을 벌인다.

당시 하노버 영주 게오르크(Georg)는 라이프니츠의 도움으로 차기 영국 왕위 계승권을 확보했지만, 런던의 집중포화를 받던 라이프니츠를 보호하지 않았다. 곧 런던에 정착해야 하는 독일인 게오르크의 입장에서 뉴턴에게 맞서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뉴턴이 이끄는 런던 왕립학회는 독립된 재정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이를 간파한 헨델은 안정된 직장 하노버를 버리고 과감히 런던행을 감행했다. 헤이마켓의 오페라 붐으로 영국 앤 여왕은 고위 관료 연봉의 세 배가 넘는 200파운드의 연금을 헨델에게 지급했다. 헨델의 도박이 성공한 것이다.

1714년 영국 앤 여왕이 사망하자, 의회가 허수아비 왕으로 정해 둔 하노버의 게오르크가 새로운 영국 국왕 조지(George) 1세로 즉위한다. 현재 영국 왕실의 조상인 하노버 왕조의 시작이다. 영어 한마디 못하던 조지 1세에게 런던에서 다시 만난 옛 신하 헨델은 큰 힘이었고, 뉴턴만큼 인기를 누리던 헨델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헨델과 하노버 왕조의 결탁은 왕권 과시를 위해 템스강 선상에서 연주된 ‘수상 음악’으로 절정에 달했다. 헨델의 연금은 400파운드로 뛰었다. 하노버에 버려진 라이프니츠는 1716년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한편, 케임브리지 대학교수 시절 100파운드의 연봉을 받던 뉴턴은 조폐국에서 세운 공로로 1600파운드가 넘는 고액 연봉자가 된다. 하지만 1720년 영국에서 벌어진 ‘남해 회사(The South Sea Company)’ 투기에 휘말려 2만 파운드의 손실을 본다. 교수 연봉 200년치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버블(bubble)’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이 사건으로 공인 회계사 및 외부 감사 제도가 도입되었다. 영국 GDP의 몇 배에 이르는 주식 가치가 휴지조각이 되었고, 영국 정부는 300여 년이 지난 2015년에야 이 부채를 모두 갚았다. 역대급 투기 광풍을 겪은 뉴턴은 “내가 그래도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겠는데, 인간의 광기는 도저히 모르겠다”며 탄식했다.

반면, 폭락 전 주식을 매각한 헨델은 막대한 시세 차익을 얻었다. 여기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투자자들의 자살이 속출하자 영국 정부는 혼란을 수습하고자 주식을 채권으로 전환한다. 헨델은 정부 조치 바로 다음 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이 채권들을 헐값에 매입한다. 그리고 헤이마켓 극장에 경영진으로 참가한다. 이후 남해 회사 채권 사고팔기를 반복하는데, 패턴은 일정했다. 공연 비수기에는 채권을 매입하고, 공연 시즌에는 채권을 팔아 극장 운영에 사용했다.

하지만 하노버 왕조에 맞서던 귀족들은 헨델부터 무너뜨리기 위해 1500파운드라는 엄청난 몸값으로 유럽 최고의 오페라 스타 파리넬리를 런던으로 불러들인다. 이렇게 런던의 오페라가 왕실과 귀족들의 정치 싸움으로 변질하자 시민들은 오페라를 외면한다. 헨델은 파산하고 헤이마켓 극장은 매각되었다. 이후 헤이마켓 극장은 여러 번의 리모델링을 거쳐 현재의 ‘여왕 폐하의 극장’이 되었다. 헨델의 오페라에 대한 애증이 서린 이곳에서 1986년에 시작된 뮤지컬이 ‘오페라의 유령’이다.

비록 주식 투자에는 실패했지만 자산 운용에 탁월했던 뉴턴은 3만2000파운드(현재 가치로 61억원)의 유산을 남겼고, 오라토리오 ‘메시아’로 재기한 헨델은 다시 채권에 투자해서 2만 파운드(현재 가치로 38억원)를 남겼다. 당시 과학자와 예술가는 대개 왕실이나 귀족의 후원금에 의존했지만, 두 사람은 이 돈을 운용해 그들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점이 라이프니츠와 뉴턴의 차이였다. 헨델의 채권 문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브로커의 서명은 자신의 예술을 지키기 위해 현실 속에서 고민했던 헨델의 참모습을 보여준다. 요컨대, 그들은 자신들의 꿈에 투자했다. 두 사람은 모두 영국 왕족들이 묻히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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