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 소멸마을 아빠가 부산 소멸마을 딸에게

한겨레21 2021. 8. 30.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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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아버지는 고흥군 상오마을 이장, 딸은 부산 초량6동 '이바구캠프' 대표
2021년 8월17일 전남 고흥군 포두면 오취리 상오마을 김정율 이장이 1996년 폐교한 모교 옥강초등학교 터에 방문했다.
‘마을’의 뜻은 ‘주로 시골에서, 여러 집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전남 고흥군 포두면 오취리 상오마을도 옹기종기 모여 삽니다. 호수 같은 앞바다와 황금물결 일렁이는 너른 들판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마을 자랑 좀 해보라고 하면 주민 열에 아홉은 “화기애애하다”고만 합니다. 마을 이장 김정율(60)씨는 평생 고향에서 농사지은 본토박이입니다. 그의 손에 박인 굳은살이 논에서만 생긴 게 아닙니다. 20대부터 50대까지 마을 청년회, 고흥군 농업경영인회, 포두면 번영회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했답니다. 환갑을 맞은 2021년엔 마을 이장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농사일이 한가한 요즘은 도로 포장부터 변기 교체까지, 70~80대 어르신들 민원을 듣는 게 일입니다.
김씨의 딸 김현정(31)씨는 부산 동구 초량6동에 삽니다. 산 중턱에 자리잡은 산복도로 마을입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오르막길을 올라야 합니다. 현정씨는 거기서 특별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합니다. 마을 주민들이 주주로 참여하는 곳입니다. 마을 축제도 엽니다. 사업 목적 중 하나가 마을 공동체를 살리는 것입니다.
상오마을과 산복도로 마을은 ‘소멸 위험 지역’인 포두면과 초량6동에 있습니다. 소멸 위험 지역은 65살 고령인구가 20~30대 여성인구의 두 배가 넘는 곳이란 뜻입니다. 젊은이들이 빠져나가고 나이 든 이만 늘어가는 걸 마을 사람들도 잘 압니다. 시골마을과 원도심 산동네만 그런 건 아닙니다. 현재 추세라면 2047년엔 전국 모든 시·군·구가 소멸 위험 지역이 된다고 합니다. 감사원이 2021년 8월13일 공개한 보고서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를, 어쩌면 살아날지도 모를 마을들을 <한겨레21>이 찾아갑니다. 그 마을엔 현실이지만 어느 마을엔 미래인 ‘소멸마을’ 이야기, ‘사라지는 마을에 살다’ 첫 번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_편집자주

연재 순서

① 고흥군 포두면 상오마을

“시보면(세어보면) 알아. 하나, 둘이, 서이….” 2021년 8월17일 전남 고흥군 포두면 오취리 상오마을 이장 김정율(60)씨가 손가락을 펴고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이 몇 명이냐고 물은 참이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부인 김형심(54)씨가 말했다. “사람이 얼마나 없으면 한 마을 사람들을 시어보네, 시어봐.”

상오마을엔 45가구 67명이 산다(실거주자 기준). 20대 1명, 30대 0명, 40대 2명, 50대 14명, 60대 8명이다. 나머지 42명은 70대와 80대다. 마을 주민 열에 여섯은 70~80대 고령층인 셈이다. 20살까지는 0명, 20~30대 여성도 0명이다. 마을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린 지 20년이 넘었다. 마을에서 나고 자란 마지막 아이가 2000년생이다. 지금 목포에서 대학을 다닌다고 한다.

전남 고흥군 포두면 인구를 봐도 인구 감소와 고령화 현상이 뚜렷하다. 총인구는 1998년 12월 8590명에서 2021년 7월 4890명으로 3700명 줄었다. 65살 이상 고령층은 1582명에서 2318명으로 736명 늘었다. 19살 이하는 1879명에서 337명으로 1542명 줄었다. 포두면 통계를 일러주자 부인 김씨가 놀란 듯 말했다. “와아하하하, 그렇게 많이 빠져나갔구나.”

부산 동구 초량6동 게스트하우스 ‘이바구캠프’ 근처 골목길에서 김현정씨가 활짝 웃고 있다. 현정씨는 김 이장의 첫째 딸이다.

“우리 마을에선 58년생 개띠까지가 젊은 사람”

전남 고흥군은 남해안에 있는 마름모꼴 반도다. 땅(807㎢)은 부산(766㎢)보다 넓다. 고흥 동쪽 팔영산과 마복산 사이 깊고 넓은 해창만이 있다. 1960년대 간척사업으로 지평선까지 광활한 논이 펼쳐진다. 논 사잇길을 따라 내려가다보면 만나는 작은 바닷가 마을이 포두면 오취리 상오마을이다. 한여름이라 앞바다를 에워싼 섬까지 물 빠진 펄이 오전 내내 반짝였다. 늦은 오후에야 서서히 바닷물에 자리를 내줬다. 펄에 바글바글하던 칠게들이 자취를 감추는 시간이다. 손가락만 한 짱뚱어 새끼들만 하나둘 해변으로 기어올랐다. 물이 들어오면 바닷바람 쐬러 마을 노인들이 큰길 쉼터로 모여들었다. 짠 내는 희미하고 바람은 시원하다. 해창만 간척사업 이후 고기잡이와 해루질로 먹고사는 마을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농사짓고 몇몇은 소를 키운다. 그나마 마을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마을 쉼터에서 만난 최아무개(72)씨가 마을 이장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우리 동네는 전부 노인이에요. 젊은 사람은 3분의 1밖에 안 돼요. 그래서 이장이 거동 불편한 노인들 면사무소랑 농협 우편물이랑 마스크를 집집이 갖다줘요.” 최씨는 “우리 마을에선 58년생 개띠(63살)까지가 젊은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2021년 현재 환갑을 맞은 김 이장은 아직 마을에서 ‘젊은 사람’으로 분류된다. 김 이장이 1980년대 마을 청년회 총무를 할 당시 ‘마을 이장 형님’ 나이는 29살이었다. 1990년만 해도 30~40대가 마을 일을 도맡아 했다.

이어 옆에 앉은 78살 주민이 김 이장한테 말했다. “어이 이장, 우리 마을회관 화장실 변기 좀 갈아야 되겄소. 변기가 다라와서(더러워서) 못 쓰갔소. 좋은 놈으로 갖고 오라 해. 변기는 비싸고 좋은 거로 해야 돼.” 김 이장은 바로 전화를 걸어 문의했다. “여보시요. 나시(나네). 거이 똥통 좋은 거 똥 잘 내려가는 거 그거 얼마나 하나? 우리 부녀회에서 회관 똥통 두 개가 숭악하다네. 회관 와서 보소. 견적 좀 봐봐.” 마을회관에서 화요일 ‘건강 수업’을 마친 주민들도 김 이장에게 민원을 넣는다. “논에서 나오는 삼거리 목이 너무 좁아. 오는 사람하고 나가는 사람하고 서로 잘 안 보이는데 길이 좁아져서 세게 달리면 위험해. 거울을 붙여야 돼.” “상하수도 공사하는 마을 길 다 뜯어졌소. 그거 먼저 좀 고쳐주소.”

마을 사람들은 김 이장을 ‘본토박이’라 부른다. 마을에서 나고 자라 고흥군 밖으로 나가 산 적이 없단 뜻이다. 김 이장은 옥강초등학교, 포두중학교, 고흥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0년대부터 고향 마을에서 농사짓고 소를 키운다. 김 이장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고향 떠날 생각은 아예 안 했죠. 땅도 여기 있고 농사도 여기서 지으니까.” 그는 현재 해창만 논에서 약 2만 평 농사를 짓고 한우 20마리를 키운다. 생업을 하면서 군, 면, 마을을 챙긴다. 20대 초반부터 30대 중반까지 마을 청년회 총무와 회장을 12년 맡았다. 40살부터 58살까지 고흥군 농업경영인회 포두면 총무와 회장, 고흥군 감사를 역임했다. 같은 기간 동안 군청 무기계약직으로 해창만 간척지 제3수문에서 강물 수위를 조절하는 일도 했다. 2021년 초 마을 이장을 맡았다. “군에서 오래 활동했는데 마을에도 봉사를 좀 해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하게 됐어요.”

2021년 8월17일 전남 고흥군 포두면 오취리 상오마을 회관에서 김정율 이장(오른쪽 둘째 등진 사람)이 마을 주민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넌 어째 가는 곳마다 시골이다냐”

김 이장의 형제와 자녀 모두 고향을 떠났다. 큰누나, 형, 작은누나, 남동생은 서울과 남양주 등으로 흩어졌다. 시골 고향을 떠나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1970~80년대부터 그랬다. 그땐 이촌향도, 도농이동이라 불렀다. 웬만하면 중학교나 고등학교 졸업하고 돈 벌러 타지로 떠났다. 이장 부인 김씨도 포두면 남성리 익금마을에서 나고 자라 포두중을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일자리 찾아 떠났다. 김씨는 “회사를 그만두고 잠시 고향에 쉬러 와서 이 사람 만나 결혼하고 쭉 정착했죠”라고 했다. 1989년 김씨는 22살 나이에 김 이장과 결혼했다. 이듬해 첫딸 김현정(31)씨를 낳았다. 딸은 부산에, 둘째 아들은 전주에 정착했다.

“넌 어째 가는 곳마다 시골이다냐.”

이장 부인 김씨가 부산 사는 딸에게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딸 현정씨는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담양 창평면 농촌에서 고등학교에 다녔고, 부산 영도구 어촌에 있는 한국해양대를 졸업했다. 하필 사회생활하며 정착한 마을도 부산 산동네였다. 부산 동구 초량6동 7통 산복도로(망양로) 윗마을. 현정씨는 2016년 4월 이 마을을 처음 방문한 날을 떠올리면 웃음부터 난다. “하하하, 정말 처음엔 충격적이었어요. 엄청 오르막길인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거예요. 부산역 앞 초량동은 완전 번화가에 평지인데 같은 초량동에 이런 동네도 있구나 했죠.” 2021년 8월19일 부산 동구 초량6동 산복도로 근처에서 만난 현정씨는 마을을 소개하며 환하게 웃었다.

부산 산복도로는 말 그대로 산의 배(허리)를 두르는 길이다. 부산 동구, 중구, 서구 등 원도심을 잇는다. 1964년 초량동 구봉산 산등성이 따라 처음 개통했다. ‘산복도로 마을’엔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한국전쟁 이후 피란민과 부산항 부두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고 전해진다. 산비탈 판잣집들은 점점 불어나 산 중턱까지 올라왔다. 현정씨가 생활하는 초량6동 7통은 당시 ‘폭포수 마을’이라 불렀다. 산골짜기 마을에 작은 폭포들이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 판잣집 철거와 재개발 이후 같은 자리에 1, 2층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현정씨는 2016년 7월 산복도로 마을 민박·게스트하우스인 ‘이바구캠프’ 조성에 참여했다. 그해 4월 취업 준비 중에 참여한 스터디모임이 계기가 됐다. 모임에서 도시재생업체 ‘공유를 위한 창조’ 박은진 대표 등과 만난 인연이 이어졌다. 현정씨는 2019년 3월부터는 ‘이바구캠프’ 대표를 맡고 있다. 여느 숙박업체와 좀 다르다. 마을 주민과 ‘명예주민’ 총 28명이 주주로 참여한다. 마을 주민들과 교류하는 마을 축제 행사도 기획한다. 현정씨는 “이바구캠프는 숙소 제공으로 수익을 거둬 마을 경제에 보탬을 주고 마을 공동체를 활성화하는 걸 목표로 한다”고 말했다.

이바구캠프는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동네 빈집 4채를 개조해 게스트하우스와 예술 공방 등을 열었다. 빈집은 ‘새집’이 됐고 비어가던 마을에 젊은이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부산 동구 원도심이 전반적으로 그렇지만 이 동네도 점점 고령화되고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가고 있죠.” 현정씨의 말처럼 초량6동은 ‘소멸 위험 지역’으로 분류한다. 2016년 국내 ‘지방 소멸’ 문제를 처음 공론화한 한국고용정보원 이상호 부연구위원 분석을 보면, 2021년 5월 기준으로 초량6동에 사는 65살 이상 고령층(2022명) 대비 20~30대 여성인구(478명) 비율은 0.236이다. 소멸 위험 지역 기준은 0.5 미만이다.

고흥군 포두면 오취리 상오마을 평상에서 마을 주민들이 쉬고 있다.

10년 전 카페, 2016년 영화관, 2020년 맥주 프랜차이즈

현정씨는 대도시 생활을 꿈꾸며 부산에 왔다. 입학할 대학을 고를 때 전공만큼 소재 지역도 중요했다. “전남 담양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자주 갔던 광주는 사람이 적어 보였고 서울은 너무 붐빌 것 같았어요. 그래서 광주보단 좀더 큰 도시인 부산으로 정했죠.” 현정씨는 2009년 한국해양대 국제무역경제학부에 입학했다. 대학 신입생일 때부터 아빠(김정율 상오마을 이장)는 고흥군청 공무원으로 취직하라고 자주 권했다. “고흥에 오려는 사람은 적은데 공무원은 필요하고, 전 고흥 출신이니까 가산점을 받을 수 있다는 거였어요. 전 정말 싫었거든요. 공무원 아니면 읍내 작은 회사 경리 밖엔 선택지가 안 보이는데 고흥에 정착하고 싶진 않았어요.”

고향은 읍내(고흥읍 중심가)에 나가도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현정씨는 고흥군 읍내에 10년 전쯤 처음 카페가 생겼다고 기억한다. “카페 생기면 진짜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고향 친구들 만날 때 카페 가면 제일 편하잖아요. 책도 읽고 편하게 쉴 수 있고. 없으니 아쉬운 거죠.” 영화관은 2016년 2월에 들어섰다. 고흥군이 직영하는 2관짜리 ‘작은 영화관’이다. 2020년 6월엔 유명 수제맥주 프랜차이즈가 입점했다. “정말 깜짝 놀랐어요. 명절에 고향 가도 친구들이랑 술 마실 데가 개인 호프집밖에 없었거든요.”

“엄청 시골이에요.” “바로 집 앞이 바다예요.” 현정씨가 고향을 소개할 때 빼놓지 않는 말이다. 그는 5살 때부터 집에서 약 3㎞ 거리인 옥강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으로 걸어다녔다. 이듬해인 1996년 옥강초가 폐교했다. 집에서 약 10㎞ 거리인 포두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을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웃 섬마을 취도로 가는 다리에서 노란 버스를 타고 통원했다. 그 버스를 타고 포두초, 포두중을 다녔다. 고등학생 때부터 타지 생활을 했다. 전남 담양 창평고 기숙사에서 살았다. 그때부터 자연스레 외지 생활을 시작했다. 고향 친구들도 결국엔 거의 다 고흥을 떠났다. “포두중 동창이 모두 50명인데, 10명 정도 빼고 나머진 고흥에서 고등학교에 다녔어요. 그런데 지금 고흥 전체에 남은 동창은 50명 중 1명뿐이라고 들었어요.”

현정씨는 부산 산복도로 마을에서 고향 마을의 미래를 그려본다. “어쩌면 초량6동 마을이랑 저희 고향 마을이 같은 상황이에요. 길게 보면 없어질 수도 있는 마을들이잖아요.” 그리고 생각한다. “분명 사람이 점점 줄겠지만 남은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좀더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이 되죠. 예를 들면 고향 부모님이나 어르신들은 큰 병 나면 순천에 있는 병원 가면 된다고 말씀하세요. 그분들은 그게 일상이라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마을에서 순천까지 차로 1시간 걸려요. 내 생활권 안에서 좋은 의료서비스 받을 수 있어야죠.”

언젠가는 고흥에 다시 정착할 꿈을 현정씨는 품고 있다. “부산에서 내가 고흥을 엄청 좋아한다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고흥은 내가 나고 자랐고 생각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곳이에요. 고흥에 가서 구체적으로 뭘 할지가 문제지만 가고 싶은 마음은 확실해요. 고흥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어요.” 산복도로 마을 공동체에서 일하고 생활하면서 예전과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고 한다. “카페 같은 문화시설이 부족해도 즐길 거리를 찾고 직접 만들며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자리도 공무원이나 회사 경리가 전부는 아니죠. 이젠 다른 길도 있다는 걸 알아요.”

한 세대 전에도 고향 마을로 되돌아오는 이들이 있었다. 상오마을 김정율 이장의 50~60대 선후배 중엔 4명이 타지 생활하다가 마을로 돌아왔다. 후배 정창모(58)씨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으로 갔다.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미용 전자업체를 거쳐 방위산업체에 취직했다. 1992년 결혼한 뒤 회사 사정이 나빠졌고 결국 퇴사했다. 부인과 함께 치킨집을 개업하고 건설 설비 현장에서 일했다.

거의 울면서 내려온 마을

정씨는 35살이던 1998년 고향에 돌아왔다. 고향에서 건강이 나빠진 할머니를 몇 년이라도 모시고 싶었다. 어릴 적 할머니 손에 자란 정이 컸다. 정씨는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다시 부산에 돌아간다는 조건으로 부인을 간신히 설득했다고 한다. “부인이 촌에서 살고 싶겄소. 애들 학교 보내는 것부터 시장 가는 것까지 생활이 다 불편하지. 쉽게 말해서 도시는 전화 한 통이면 치킨 한 마리 바로 갖고 오는데 여기선 차 타고 나가서 찾아와야 해요. 배달시키려면 두 마리 이상 시켜야 하고. 불편한 게 많지.” 정씨는 귀향 초기엔 농사를 제대로 짓지 않았다고 했다. “곧 부산으로 간다고 생각해서 농사도 거의 신경 안 쓰고 살았어요. 부인이랑 읍으로 일하러 다녔지. 지금 와서 보면 처음부터 마음먹고 농사지으며 정착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어요. 무의미하게 보낸 시간이 너무 아깝지.”

할머니를 모시다보니 한 해, 두 해 넘어갔다. 정씨도 어느덧 마흔 중반이었다. 자연스레 마을에 정착했다. 현재는 논농사 4만 평가량 지으며 한우 30~40마리를 키운다. 도시 생활에 별다른 미련은 없다. “서울 집 사면 1년에 몇억 번다고 하는 뉴스 볼 때 짜증은 나지만 그래도 월급 받아먹고 직장생활 하느니 이런 데 와서 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정씨가 한마디 덧붙였다. “우리 땐 30대에 고향에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마을에 그런 애들이 거의 없죠.” 옆에서 듣고 있던 김정율 이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서울이랑 경기도에 나간 친구들 보면 아파트는 하나씩 샀던데 이제껏 번 돈으로 집을 사놓으니까 나이는 먹고 노후가 힘들어요. 내가 맘은 제일 편해요. 농사가 정년이 있어요 뭐가 있어요.”

상오마을에 40대는 두 명이다. 그중 정아무개(41)씨는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귀향했다. 그는 고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에 있는 전문대학을 다녔다. 군 제대 후 자퇴하고 대학 입시를 다시 준비하러 서울로 갔다. 카페랑 전자제품 판매업체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노량진 입시학원에 다녔다. 그러다 2006년 갑자기 귀향했다.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에 농사짓고 소 키울 사람이 필요했어요. 거의 울면서 내려왔죠.” 그는 마을에서 논농사 8400평가량을 짓는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했어요. 군대 갔다 와서 새로 대학 가서 졸업하면 나이가 있으니까 취업할 때 불리하잖아요. 고향 집에서 농사지으면 그런 점은 낫지 않을까 싶었어요.”

40대 정씨는 마을 생활에 답답함을 토로했다. “여기 마을 어르신들은 성공한 사람은 없고 고생한 분들만 있어요. 문화나 교육 혜택을 거의 못 받으신 분들이에요. 대화가 안 돼요. 대화를 시작하면 훈계로 끝나니까.” 또래들과 어울리기엔 또래가 거의 없다. 바로 위가 6살 많고, 바로 아래가 13살 어리다. 그 밖엔 모두 50대 이상이다. “2년, 4년, 6년 터울 선후배들이 골고루 있으면 화합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마을에선 관계가 딱 단절돼요. 농사 한가할 땐 순천, 광주, 서울로 친구들 만나서 풀어요. 여긴 조용하고 여유로운데 바꿔 말하면 심심하고 할 일이 없죠.”

5~6년 사이 귀농한 8가구 중 한 가구만 정착

20년 뒤 상오마을은 어떻게 변할까. 마을 사람들도 잘 그려지지 않는다. 김정율 이장은 마을이 어떻게든 유지될 거라 내다봤다. “40살에도 생각해봤어요. 내가 60살 되면 마을이 어떻게 돼 있을까. 아래 세대가 마을에 안 들어오고 인구가 줄어들 거라는 건 알았죠. 그때 예상했던 것보다는 더 줄어든 것 같아요. 80살 되면 더 줄어서 몇 가구 안 남겠죠. (그래도) 마을이 아예 없어지진 않을 거 같아요. 귀농인들이 들어와서 토박이들이랑 같이 유지해가지 않을까 싶어요.”

최근 5~6년 사이 마을에 귀농한 외지인이 8가구 생겼다. 5년 전 경기도 고양시에서 귀농한 한 가구만 정착하고 다른 이들은 마을을 왔다갔다 한다. 마을 주민 72살 최씨는 귀농한 사람들이 편치만은 않다. “20년 뒤면 다 죽어불고 없을 텐데 객지에서 귀농하러 오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일지 사실 걱정이오. 어떤 마을은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본토박이를 무시한답니다. 좋은 사람들이 들어와야는디.” 40대 정씨는 “저는 귀농 자체에 회의적이에요. 보통은 노년층이거나 아픈 분들이 와요. 옆집에 귀농 오신 분들은 1년 지내다가 돌아가셨어요. 그분들한테 마을은 별장 개념이지 생활공간이 아니에요.” 50대 정씨는 현실적으로 말했다. “20년 뒤에 내가 80인데 젊은 사람 있겄소. 젊은 사람 안 들어오면 생각하나마나 뻔하지. 노인들 몇 명 살아 있겠지.”

고흥(전남)·부산=글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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