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장 앞에 선 듯.. 조용히 말을 건다

김예진 2021. 8. 26.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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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전 연 강예신 작가
작품 속에서 좋아하는 책들 발견하면
보는 이들은 보물이라도 본 듯 기뻐해
모형 가구·인형은 추억과 동심 자극도
실제 존재하는 책을 소재로 작품 구성
축소시키고 이어붙이는 집요함 필요
책 선정도 디자인과 작가의 고민 담겨
레드룸 시리즈는 이번 전시에서 첫 선
반항적인 여아 캐릭터 새로운 색깔로
내성적 느낌 지우고 작품 더 풍성해져
‘계절의 기억은 한때의 나를 기다리게 만들지’ 아틀리에아키 제공
어느 칸에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가 꽂혀 있다. 그 근처에선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꽂혀 있다. 눈길을 옮기다 보면 ‘심리학 나 좀 구해줘’를 발견하고, 또 다른 한 칸에서 에세이집 ‘참 좋은 당신을 만났습니다’, ‘울지 말고 꽃을 보라’, ‘그래도, 사랑’을 발견한다. ‘고전 강독’, ‘예술과 사회의 경제사’를 지나, 이어 “빨강머리 앤 시리즈네. 니체가 꽂혀 있군. ‘문학, 잉여의 몫’이라니 하, 이런 책이 있구나” 하고 혼잣말을 하게 된다
 
강예신 작가의 책장 시리즈는 작품 수백점이 한 장소에 내걸리는 아트페어 현장에서도 다른 어느 작품에도 묻혀 지나쳐지지 않는 작품이다. 호기심이 발동한 관람객은 그의 작품 앞에서 한번쯤 멈춰 서 한참 동안 눈길을 준다. ‘어떤 책이 있는 거야’ 하고 작품을 읽어나가다 자신이 아는 책이나 좋아하는 책을 발견하면 숨은 보물을 찾은 듯 기뻐한다. 보는 이들은 수많은 책 제목들 한가운데서 마음에 들어오는 문구도, 인생을 응원하는 문구도 발견한다. 잊고 있던 책을 만나 반가워하기도 하며, ‘내 책장과 비슷하다’며 공감대를 이룬 관람객이 ‘이 작가 누굴까’ 하고 궁금해한다. 심지어 해외 아트페어 현장에서는 한글을 알 리 없는 외국인 관람객과 컬렉터들이 몰려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작품을 유심히 관찰한다고 한다. 작품은 여러 가지 경로로, 작품 앞에 선 이에게 짧지만 평안한 시간을 선물한다.

서울특별시 성동구 서울숲길에 위치한 갤러리 아틀리에아키에서 강 작가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GREENLY:경험하지 못한 경험에 관하여’를 제목으로 한 전시에서 신작 20점을 선보인다. 그는 국내외 미술시장에서 약진하고 있는 대표적인 차세대 작가다.

대표작인 책장 시리즈는 2011년 이후 지난 10년간 계속돼 온 연작. 1㎝가 채 되지 않을 듯한 두께에, 엄지 손가락 한 개 마디 정도 되는 크기의 책들을 장에 가득 꽂은 작품이다. 한마디로 책장 미니어처다. 책이라는 소재와 깔끔하게 정리된 책장이 시각적으로 단정하고 정갈한 느낌을 준다. 동시에 초소형으로 축소된 책장이기에 장난감처럼 느껴져 가볍고 경쾌하다. 어린 시절 작은 집 모형을 작은 가구들로 꾸며 인형을 들여놓고 놀던 장난감을 연상시켜 어린 시절 추억과 동심의 순수함을 자극하기도 한다.

하지만 제작 과정은 집요함을 요구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소재는 모두 실제 존재하는 책들로, 책의 실제 표지와 옆면, 뒷면 이미지를 디지털 파일로 만들고, 축소하고, 다시 이어붙여 하나의 파일로 만든 다음, 특수 코팅 용지에 인쇄한 뒤 오려낸다. 그걸 다시 책 모양으로 접고 스티로폼에 붙여 책 모형을 만든다. 조수도 없이 작가 혼자서 반복하는 노동이다. 이번 신작들에는 책장에 섬세한 자개 장식까지 추가해 더욱 힘든 제작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책을 고르는 데에도 작가는 고심한다. 색상, 디자인 등 시각적 효과를 고려하나, 아무 책이나 꽂아대는 것도 아니다. 작품 제작 시기마다 작가의 마음에 들어오는 책들을 모으면, 그 시기 작가의 감정이 책장 안에 오롯이 담기게 된다. 이미 읽은 책들로 작품을 채우기도 하고, 앞으로 읽고 싶은 책들로 채우기도 하면서 작품은 저마다 특정한 시기의 강예신, 특정한 고민을 가진 강예신 등 작가의 다양한 면을 담게 된다.

작가는 왜 이런 책장을 만들게 됐을까. 그는 2014, 2017년 두 번이나 그림을 곁들인 에세이집을 출간한 에세이스트이기도 하다. 그가 쓴 ‘한뼘한뼘’, ‘하고싶은거 하고 살아요 우리’ 속 글 한 토막에서 힌트가 발견된다.

‘생계형 할머니와 살았던 나는 방목되어졌다. 엄마로부터 잔소리를 듣는 아이가, 아빠에게 혼나는 아이가 말도 안 되게 부러웠다. 궁금한 것을 물어볼 사람도 없었고 할머니가 먼 데라도 가시는 날엔 혼자 자야 했던 어린 날도 있었다. 나는 짐 쌓인 다락방을 좋아했다. 특유의 다락 냄새를 맡으며 철 지난 옷가지나 이불 보따리, 온갖 잡동사니에 둘려싸인 채 비좁은 곳에 누워 틈 없는 온기를 느끼는 다락방이 좋았다.’

외롭고 결핍된 어린 시절을 보냈으리라 추측되는 작가에게, 책은 가장 잘 어울리는 친구였을지 모른다. 에세이를 읽다 보면, 작가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을 보듬기도 하고, 복잡해진 머릿속을 개운하게 청소하고 싶어 한다. 사소한 것들이 좋다며 일상 속 하찮은 사물들에 애정을 표하다가, 더 성숙하고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오랜 내향의 시간을 보냈을 작가 삶이 그려진다. 이 모든 감정의 기록을 읽어가다 보면 책장 시리즈가 묘하게 겹친다. 누구나 차분한 내향의 시간이 간절할 때가 있기 마련이고, 작품이 딱 그런 시간을 선사한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책장에 꽂힌 수많은 책은 곧 수많은 주제, 수많은 이야기들, 수많은 해결책들이고, 그 앞에 섰을 때만큼은 누구도 외롭지 않다.

작품의 또 다른 한 축인 유화 작품들도 특유의 정서가 개성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 편의 동화를 그림으로 풀어놓은 듯 동심의 순수함이 풍기기면서도, 외롭고 쓸쓸하며 사색적인 감수성이 진하다. 대형 캔버스에 등장하는 초소형의 동물과 사람, 사물 이미지 등 그림 대상이 매우 작은 만큼, 붓터치가 가늘고 섬세하다. 책장 시리즈를 제작하면서 발휘됐을 집요한 태도가 회화에도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회화 작품 가운데 ‘아이보리의 수상한 외출’은 그런 개성을 잘 담고 있는 작품 중 하나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숲의 모습은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동글동글한 초록색 원들의 집합이다. “숲의 깊은 녹음은 약보다 더 훌륭한 안정제가 되었다.” 작가노트에 쓰인 문구처럼, 소녀와 동물들을 품은 채 캔버스를 가득 채운 초록 숲은 강예신의 책장처럼 평안함을 준다.
‘Oh god! Where are you’
이번 전시에서 처음 나온 ‘레드룸’ 시리즈는 새로운 색깔을 보여주려는 시도로, 반항적인 여아 캐릭터가 주인공인 회화 작품들이다. 일본 작가 요시모토 나라, 스페인 작가 하비에르 카예하가 특유의 악동 캐릭터를 탄생시켜 대중의 오랜 사랑을 받은 바 있다. 내성적인 느낌을 주는 그림들의 반대편에서 레드룸 시리즈의 외향적인 악동들이 균형을 잡아 작가의 작품세계를 더 풍성하게 한다.

레드룸 시리즈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새빨간 바탕 위에 그려진 위풍당당한 소녀 그림이다. 소녀는 ‘다 잘 될 거야’라는 뜻의 ‘Everything will be OK’라고 쓰인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다. 바로 지난 3월 미얀마에서 반군부 시위 도중 숨진 19세 소녀가 입고 있던 티셔츠 문구다. 다음달 11일까지.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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