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용어 시대의 우리말](하)우리말 전문용어 사용, 영한사전 교과서부터 시작하자

고재원 기자 2021. 8. 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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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 전문용어 학회 등 권위있는 기관 발족 필요성도 제기
 

1997년 8월 생명공학육성법이 개정됐다. 한 생물이 가지는 모든 유전정보를 뜻하는 용어를 ‘유전체’로 통일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당시만 해도 유전체라는 말 외에도 외국어에서 온 ‘게놈’, ‘지놈’ 등이 혼재해 사용되고 있었다.

법 개정의 효과는 강력했다. 법 개정 직후 공문서에는 게놈이나 지놈 대신 유전체가 사용됐고 언론도 유전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뒤늦게 우리말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게놈이라는 용어는 영어 'Genome'을 철자대로 따라 읽은 것이지만 정작 발음이 틀려 영어권 과학자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국적 불명의 잘못된 용어는 고치고 이해가 상대적으로 쉬운 우리말 용어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대표 사례로 꼽힌다.

당시 용어 전환을 주도한 강창원 KAIST 생명과학과 명예교수는 “법을 제정했더니 정말 효과가 확실하게 나타났다”며 “정말 잘 안바뀔 것 같던 정부가 쓰는 공문서가 전부 유전체라고 표기하기 시작하며 용어가 보편화됐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유전체라는 말을 직접 만들어 냈다. 생명공학육성법 개정에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용어는 이해와 사실 전달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다. 어떤 용어를 사용하냐에 따라 이해와 사실 전달정도가 갈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코로나19)과 같은 역사상 유례가 드문 감염병 사태에서는 용어 사용의 중요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방역 정책과 감염병 대처 방법을 정확히 전달해야하기 때문이다. 매일 새로운 연구결과와 기술, 개념이 만들어지는 과학∙의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과학과 의학 분야의 용어 순화에 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국어문화원연합회와 동아사이언스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쉬운 우리말 쓰기’ 사업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사업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코로나19) 사태를 비롯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상황이나 새로운 과학과 의학 연구의 등장으로 급속히 생산되는 전문용어를 좀더 쉬운 용어로 순화하는 방안을 찾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해 자문위원이던 권재일 서울대 언어학과 명예교수(한글학회장)와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과학커뮤니케이션학과 명예교수, 최무영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가 다시금 올해 자문위원으로 참여한다. 이에 더해 생명과학 분야 강창원 교수와 공대 분야 이광근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교수도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전문가들이 말 뿐인 용어 순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각 분야마다 용어 순화에 관심이 있는 연구자들은 이미 관련 활동을 지속해오고 있다. 강창원 교수와 최무영 교수는 용어 순화 노력을 이어오고 있는 과학기술인들이다. 강 교수는 분자생물학 교과서를 작성하며 200~300개 용어를 새로이 만들었고, 최무영 교수도 용어 순화 관련 대중서와 칼럼 저술을 이어오고 있다. 

이광근 교수는 기계항공, 원자핵, 재료, 화학생물, 컴퓨터 등 각 전공 분야를 대표하는 교수들이 모여 연구 내용을 쉬운 우리말 단어 2000개만을 사용해 설명하는 ‘이지워드’ 사업을 기획했다. 권재일 교수는 한글학회장으로 국립국어원장을 역임했다. 2005년 국어의 사용을 촉진하고 국어 발전과 보전의 기반을 마련하는 법인 국어기본법 제정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건범 대표도 마찬가지다. 우리말 사랑 시민운동을 지속해오고 있다. 

대한화학회는 화학 용어를 우리말화해 정리한 화학 술어집을 발간하고 있다. 1952년 우리말화를 위한 술어제정사업에 착수해 화학술어위원회를 두고 술어제정사업을 추진해왔다. 2008년에 발간된 제5개정판이 최신으로 이덕환 교수가 주축으로 활동했다.

문제는 이런 순화 노력들이 파편화돼 결실을 이루지 못하고 순화된 용어들이 널리쓰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적불명의 이해못할 용어를 대체할 쉬운 우리말 용어가 만들어져도 국민들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

자문위원들은 용어 순화들을 노력을 한 데 모아주고 용어사용 권고에 있어 권위를 가지는 학회나 조직, 규정서 등이 있어야 한다고 진단했다. 

이건범 대표는 “과학자들의 용어 순화 노력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며 “전문용어학회 같은 형태로  노력들이 하나로 모일 수 있는 조직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광근 교수도 “그런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한다”며 “한국연구재단을 통해서나 다른 지원프로그램을 통해 우리말로 아주 쉽게 표현된 권위 있는 글이나 책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자문위원들은 또 이렇게 한데 모인 용어 순화 노력이 사전과 교과서에도 적극 반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강창원 교수는 “게놈이란 용어가 아직도 가끔 보이는데 이는 일부 영한사전에 여전히 그렇게 쓰이고 있기 때문”이라며 “사전이 용어의 표준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광근 교수는 “네이버나 다음의 포털사이트에서 많이 사전을 본다”며 “이들과 연계해 순화한 용어를 적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덕환 교수는 “교과서는 개정 주기가 길어서 편수자료가 바뀌어도 즉시 반영이 안되고 있다”며 “한국과학창의재단이 편수자료를 만드는 데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마음대로 바꾸는 행태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최무영 교수는 “한국은 이제 약소국이나 후진국에서 벗어나 선진국으로 진입했다”며 “한국어를 쓰는 국민이 적은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 우리말을 비하하고 살아야 하는지 안타깝다.이제는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권재일 교수는 “국립국어원에서 매주 말을 순화해서 발표하지만 그걸 쓸 수 있을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며 “원어보다 말의 길이가 길어 그냥 뜻풀이를 달아 놓은 인상을 주고 어색한 문장으로 바뀐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어려운 용어를 어떻게 고치느냐는 국어학자가 더 연구해야 한다”며 “각 분야의 전문가가 노력해 제안한 것을 편하고 자연스럽게 쓰게 바꾸는 노력이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 이 기사는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문화원연합회 쉬운 우리말 쓰기 취재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고재원 기자 jawon121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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