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헌의 히스토리 인 팝스] [75] 태평양전쟁의 분기점, 미드웨이 해전

강헌 음악평론가 2021. 8. 16. 03: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Sabaton ‘Midway’(2010)
Sabaton ‘Midway’(2010)

우리에게 광복절은 ‘대일본제국’의 패전기념일이다. 아베 신조 전 총리와 현직 대신 5명은 국제사회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213만명의 태평양전쟁 전사자(이 중에는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범들이 포함되어 있다)들의 위패를 품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했다.

1941년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무력화시킬 때만 해도 일본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미 자신의 영토보다 14배나 넓은 아시아 지역을 점령했으며 서쪽으로는 인도를, 남쪽으로는 호주를, 그리고 동쪽으로는 하와이를 넘어 미국 서부 해안의 본토 상륙이라는 거창한 목표가 눈앞에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미국으로서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태평양의 제해권이 거의 일본의 손아귀로 넘어가는 것을 막고 궁극적으로 일본을 패전국으로 만든 분기점은 1942년 6월의 미드웨이 해전이다. 유럽전선에 병력의 70% 이상을 투입한 미국의 승리는 결코 쉽지 않았다. 사실 몇 개의 기적적인 우연과 일본군 지휘부의 지나친 자신감이 아니었다면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이끄는 미 해군이 승리할 확률은 그리 압도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전후 군사전문가들의 보편적인 견해이다.

하지만 승리의 여신 니케는 일본군을 외면하고 미 태평양 함대의 손을 들어주었고 미 본토 상륙을 꿈꾸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관의 야망은 이 전투로 산산조각 났다. 이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로는 찰턴 헤스턴과 헨리 폰다 같은 명배우들이 출연했던 1977년 작과 재난 영화 전공인 롤런드 에머리히 감독이 2019년 메가폰을 잡은 ‘미드웨이’가 있다. 버드 파월이나 리 코니츠 같은 재즈의 거장들도 같은 제목의 연주곡을 남겼지만 스웨덴의 특이한 메탈 밴드 새버턴의 노래가 이 전투의 열기를 인상적으로 구현한다. 중세 기사의 무장 도구를 아예 그룹 이름으로 삼은 새버턴은 인류 역사의 수많은 전쟁을 다루는 노래들을 일관되게 발표해 왔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