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오늘 점심도 또시락?" 코로나 시대 전투식량 된 도시락

백수진 기자 2021. 8. 14.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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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식집도, 호텔도 뛰어든
'혼밥의 제왕' 도시락 전쟁
지난 9일 인천 후레쉬퍼스트 공장에서 직원들이 도시락 용기에 조리된 반찬을 옮겨담고 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8일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서 집이 경매에 넘어간 뒤 차 안에서 숙식하던 50대 남성 A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자동차 뒷바퀴 아래엔 먹다 남은 편의점 도시락이 버려져 있었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심사를 기다리던 A씨는 그동안 편의점 도시락과 컵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치솟는 물가에도 4000~5000원으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편의점 도시락은 한 끼 식사의 최저 기준이 됐다. 세븐일레븐에선 최근 비엔나소시지·볶음김치·밥만으로 구성된 2200원짜리 도시락까지 내놨다. 야근할 때 편의점 도시락을 자주 먹는다는 직장인 이모(26)씨는 “컵라면이나 삼각김밥보다는 싼 가격에 여러 가지 반찬을 고루 먹을 수 있는 편의점 도시락을 자주 사 먹는다”고 했다.

수도권 거리 두기 4단계가 한 달 가까이 이어지면서 직장인이 밀집한 오피스 상권의 도시락 주문도 급증했다. 광화문·여의도 인근의 도시락 전문점들은 오전 10시부터 주문이 밀려들어 점심때엔 도시락을 가져가려는 직장인과 배달 기사로 붐빈다. 매일 점심을 도시락으로 해결하는 직장인 사이에선 “또시락(또 도시락)”이란 신조어까지 나왔다.

코로나로 출입이 제한된 곳에도 도시락은 배달된다. 무증상·경증 환자 치료를 위한 생활치료센터나 코로나 선별진료소, 군부대까지 단체 주문이 급증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달 30일 코로나 치료를 받고 있는 청해부대원들에게 도시락을 보냈다. ‘혼밥’에 최적화된 도시락은 코로나 시대의 전투식량이 됐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GS25 편의점 도시락 공장에 가보니

지난 9일, 인천 후레쉬퍼스트 공장의 취반실. 거대한 밥솥에 들어간 듯 더운 김이 눈앞을 가렸다. 여기서 만들어진 밥은 GS25 편의점의 도시락·삼각김밥·김밥 등 하루 9만여 개 상품을 생산하는 데 쓰인다. 컨베이어 벨트엔 밥 15kg를 지을 수 있는 솥 수십 개가 줄지어 움직였다. 쌀을 씻고 불리고 가열하는 공정을 거치면, 투석기의 포탄처럼 밥솥 안의 밥이 직사각형 박스 위로 쏟아졌다. 밥이 담긴 박스는 진공 냉각 과정을 거쳐 20도 내외로 온도를 떨어뜨린다. 김정욱 후레쉬퍼스트 대표는 “도시락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밥”이라면서 “식중독균이 30도 이상 온도에서 빠르게 증식하기 때문에 편의점에 진열하기까지 낮은 온도를 유지해 운송한다”고 했다.

밥과 반찬이 담긴 박스들은 상품을 포장하는 성형실로 이동한다. 밥·반찬을 도시락 용기에 옮겨 담는 과정은 아직 수작업을 거친다. ‘고진많(고기 진짜 많구나) 도시락’ 라인엔 9명의 작업자가 두 줄로 나눠 서 있었다. 계란말이·돈가스·제육볶음·김치 등 음식 9개를 차례로 올리면 하나의 도시락이 완성! 포장까지 마치면 1시간에 한 라인에서만 1200~1500개의 도시락이 만들어진다.

전국 GS25 편의점에 도착하는 도시락은 하루 약 10만 개. 고기가 듬뿍 들어간 도시락이 인기 상위권을 차지한다. 1위는 ‘고진많 도시락’, 2위는 ‘11가지 찬 많은 도시락’, 3위는 ‘엄마의 6찬 도시락’이다. 유영준 GS리테일 도시락MD는 “햄버거나 삼각김밥은 학생들, 샐러드·샌드위치류는 여성 소비자가 많지만, 도시락은 혼자 먹는 남성 직장인 비중이 높다”고 했다.

GS25 편의점에서 인기 1위인 '고진많(고기 진짜 많구나)' 도시락.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격리 호텔에는 커피 넣은 도시락도

군부대나 공장, 코로나 선별진료소 등에서 단체 주문도 증가했다. 지난달 코로나 사태로 조기 귀국한 청해부대 장병들이 머무른 충북 보은의 생활치료센터에는 아침·점심·저녁으로 GS25 도시락이 배달됐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태릉선수촌·소방학교·한전인재개발원 등의 생활치료센터에도 매일 세 끼의 도시락이 배달된다. 도시락업체 두진푸드 당태길 상무이사는 “원래는 점심 배달만 했는데 코로나 이후부터는 조리팀이 새벽 2시 반부터 출근해 음식을 준비하고 5시까지 포장을 마쳐 아침 7시까지 도시락을 배달한다”고 했다.

코로나 전에는 예비군 훈련장에 도시락을 납품해왔던 이 업체는 예비군 소집훈련이 전면 취소되면서 요즘엔 격리 시설로 도시락을 배달한다. 국내에 입국하는 외국인들의 임시생활시설로 지정됐던 인천 그랜드하얏트호텔을 시작으로 인천시·경기도·서울시 생활치료센터까지 도시락을 배달했다. 당 이사는 “생활치료센터에선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도시락뿐이라 반찬 가짓수를 최대한 늘리고 매 끼니에 음료와 과자까지 포함했다”면서 “커피를 넣어달라는 주문이 많아서 커피 음료도 넣고, 생채소를 달라는 외국인들 주문도 있어서 배달해 드린 적 있다”고 했다.

수도권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 시행 직후인 지난달 14일 오전 서울 여의도에서 시민들이 도시락을 들고 이동하고 있다. /뉴시스

◇한정식·고깃집도 도시락 장사

사무실이 밀집한 상권에선 점심마다 도시락 배달 전쟁이 벌어진다. 한식 도시락 브랜드인 ‘본도시락’은 수도권 사회적 거리 두기 4단계가 시행된 지난달 12일부터 31일까지 매출액이 전월 동기 대비 26% 증가했다. 가장 매출이 높은 매장은 회사가 밀집한 서울 여의도·강남 지역의 매장들. 본도시락 관계자는 “구내식당을 닫은 회사들이나 돌봄교실 및 지역 아동센터, 확진자 격리 시설에서까지 단체 주문이 늘었다”면서 “정기 배달 주문이 늘면서 반찬 종류를 다양하게 해달라는 요구가 많아졌다”고 했다.

저녁 회식이 사라지다 보니 한식집이나 고깃집도 도시락 배달에 뛰어들고 있다. 서울 인사동의 한정식집 ‘촌’은 지난 1월부터 도시락 배달을 시작했다. 직원 김다온(25)씨는 “인사동이라는 지역 특성상 외국인 손님이 많았는데, 코로나 이후 매출이 크게 줄어 도시락 배달을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도시락 용기에 들어갈 만한 메뉴를 새로 개발하고, 주문이 몰리는 점심때에만 직원을 늘렸다. 김씨는 “홀 운영에 비해 인건비가 덜 들지만, 코로나 이전의 매출을 웃돌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호텔이나 뷔페에서도 고가의 프리미엄 도시락을 내놓고 있다. 롯데호텔 서울 일식당 모모야마에서 내놓은 ‘시그니처 박스’ 도시락은 10만원 넘는 고가에도 계획한 판매 기한을 연장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최근 뷔페 도시락을 주문해 ‘언택트 회식’을 했다는 직장인 한종희(39)씨는 “본인 자리로 가져가서 ‘혼밥’하기 쉽고 저렴한 도시락부터 뷔페나 레스토랑에서 내놓는 고급 도시락까지 선택지가 다양하다는 것이 도시락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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