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되고싶지 않소".. 조선후기 '전문직 가문' 있었다

오남석 기자 2021. 8. 1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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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모’ : 국립민속박물관

■ 이남희 교수, 중인 족보‘의역주팔세보’ 분석… 신분史 통설 반박

의술 ‘의관’·통역 ‘역관’ 비롯

회계 ‘산원’ 가문의 족보 존재

사회적 위상 높아지며 富 축적

세 직능군 집안끼리 ‘통혼’도

하나의 계층·세력 형성 증거

조선 후기 사회 변화를 이야기할 때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특징은 신분제의 급격한 약화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의 큰 전쟁을 겪으면서 국가의 재정이 파탄 나고 행정력이 약해지자 너도나도 양반이 되기를 추구했다는 것이다. 광작·이앙법 등을 통한 농업 생산력 향상, 상품화폐 경제 발달 등으로 부를 축적한 중인이나 양인이 공명첩이나 납속 제도를 이용해 양반이 됐는가 하면 양반 족보를 사들여 신분을 세탁하는 일도 있었다. 신분제가 형해화됐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이남희(왼쪽 사진) 원광대 사학과 교수는 그러나 새 책 ‘조선후기 의역주팔세보 연구’(아카넷)에서 이와 정반대의 흐름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의술을 담당한 의관(醫官), 통역과 교역을 맡은 역관(譯官), 회계를 담당한 산원(算員) 등 ‘기술직 중인’들이 조선 후기 하나의 계층 내지 세력을 형성했으며, 이들은 신분 상승을 꾀하지 않고 중인 신분을 유지한 채 경제적 부를 축적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서울에 거주하면서 같은 ‘기술직 중인’ 집안끼리 통혼권(通婚圈)을 이루곤 했다. 서양의 근대에 해당하는 조선 후기, 서울을 중심으로 기존의 기득권 세력인 양반과 차별화된 전문직 계층이 성장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 교수는 9일 문화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기존 통설을 반박하는 가장 결정적인 근거로 의관·역관·산원의 족보인 ‘의역주팔세보(醫譯籌八世譜)’의 존재를 꼽았다. “족보를 만든다는 것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신분에 대한 자긍심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죠.”

의역주팔세보는 의팔세보·역팔세보·주팔세보를 한데 묶은 것으로, 시조를 중심에 놓고 자손을 기록한 일반 족보와 달리 자신을 중심으로 8대까지의 조상과 외조부, 처부(장인)를 기록했다. 일반 족보의 맨 첫 칸에 성관(姓貫)의 시조가 기록된 것과 달리 팔세보의 첫 칸엔 본인이 나온다. 일반 족보가 성과 본관이 같은 씨족만의 가계도 기록이라면 팔세보는 특별한 직업을 가진 사람의 가계도를 모은 일종의 직능 족보다. 의관·역관은 잡과 시험을 통해, 산원은 취재를 통해 선발된 만큼, 팔세보에는 족보의 주인뿐 아니라 그 조상과 가족이 어떤 시험에 합격했는지 등이 기록돼 있다.

이 교수는 현존하는 의역주팔세보에 수록된 본인 1520명과 그들의 가계 1만6000여 명의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했다. 또 잡과 합격자 6115명, 주학(산학) 합격자 1627명 및 그들의 가계 4만여 명에 대해서도 확인 작업을 거쳤다. 의역주팔세보가 제작된 것은 주로 19세기 들어서지만, 이를 통해 약 250년에 걸친 가계도와 직업·통혼 관계 등을 분석했다.

그 결과는 놀랍다. 우선 ‘기술직 중인’ 집안에서 또 다른 ‘기술직 중인’이 배출되는 세전 현상이 나타났다. 잡과 합격자 명단을 기록한 ‘잡과방목’에는 총 85종의 성씨와 471개의 성관이 나온다. 문과 합격자(성씨 119종, 성관 789개)와 생원진사시 합격자(성씨 150종, 성관 1442개)에 비교할 때 잡과 합격자는 소수의 유력 가문에 집중돼 있다. ‘잡과 중인’인 의관과 역관, ‘비잡과 중인’인 산원 등 세 직능군 가계끼리 결혼으로 연결되는 통혼 현상도 발견됐다. 의관·역관·산원이 하나의 계층이나 세력을 형성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 교수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주학을 배운 산원의 숫자가 늘고 이들의 사회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산원 출신이 의관이나 역관으로 진출하는 사례가 늘어난 것이 이와 무관치 않다고 본다. 이들 집단과 달리 음양관(천문·지리·음양학 담당)과 율관(법률 실무 담당) 등은 ‘잡과 중인’이면서도 별도 팔세보를 만들지도, 다른 ‘기술직 중인’과 엮이지도 않았다.

의관·역관·산원으로 대표되는 이 시기 ‘기술직 중인’들은 양반이 되려 하기보다는 중인 신분을 유지하면서 직책과 실무 능력을 살려 부를 축적하는 데 주력했다. 이런 세태를 반영하듯,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 나오는 한양 제일의 부자 변 부자는 실존 인물인 역관 변승업의 조부를 모델로 했다. 이 교수는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태, 특히 이름만 양반일 뿐 아무런 실속이 없는 상황이 ‘기술직 중인’들로 하여금 모험보다는 안전한 길을 걷도록 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이 시기의 중인들이 결코 남루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자신의 연구 결과가 모든 중인의 신분 상승 추구가 없었다거나 조선 후기 신분제 약화가 사실이 아니라는 식으로 과잉해석될 가능성을 경계했다. 다만, 이 교수는 “조선 후기 사회 변동의 실체를 보다 선명하게 이해하려면 각 신분층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며 “이번 연구가 상대적으로 덜 조명받았던 신분사 연구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오남석 기자 greente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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