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탁한 세계를 향한 어릿광대의 농담..역사소설 <틸>로 돌아온 다니엘 켈만 [인터뷰]

선명수 기자 2021. 8. 4.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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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줄 위의 광대는 가장 높은 곳에서, 또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을 본다. 밑바닥 삶부터 황제의 삶까지, 저마다의 비극을 목격하며 그것을 위로하고 또 조롱한다. 독일 작가 다니엘 켈만(46)의 장편소설 <틸>(다산책방)은 중세 독일의 전설적인 광대 ‘틸 울렌슈피겔’을 앞세워 그의 눈에 비친 암흑과 혼란의 시대를 그린다. 2005년 서른살에 발표한 장편소설 <세계를 재다>로 단숨에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오른 그가 다시 한 번 영화같은 역사소설로 돌아왔다.

“광대는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모든 장소와 계층을 오갈 수 있기 때문에 어둠의 시대 속 이상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죠.” 다니엘 켈만은 서면 인터뷰에서 광대를 소설 전면에 내세운 이유에 대해 이 같이 말했다. 주인공 틸 울렌슈피겔은 독일 중세 민담으로 전해지는 전설적인 악동이자 어릿광대다. 민담 속 울렌슈피겔은 14세기 인물로 전해지지만, 켈만은 그를 유럽 최대의 종교전쟁인 30년 전쟁(1616~1648) 시기로 옮겨 이야기를 끌어간다. “사람들은 바보와 광대에게 기괴와 공포를 느낍니다. 그는 익살 맞기도 하지만, 사탄의 후예인 악마이기도 합니다. 공포를 유발하기에 아이들은 서커스에 나오는 광대를 두려워하죠.”

30년 전쟁을 다룬 장편소설 <틸>을 펴낸 독일 소설가 다니엘 켈만. ⓒSven Paustian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거칠고 비정한 세계를 유랑하지만 그 대신 ‘자유’가 있는 것이 광대의 삶이다. 대대로 내려오던 신분과 직업으로 살다가 태어난 곳에서 죽는 보통의 사람들과 달리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어떤 것도 믿지 않고,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는” ‘가벼운’ 삶이다. 작은 방앗간집 아들로 태어난 ‘틸’은 그의 아버지조차도 그가 살아남아 어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작고 약한 소년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죽는 아이들이 많았던 시대, 외줄타기 연습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틸은 아버지가 마녀사냥의 표적이 되자 고향을 떠나 유럽 곳곳을 유랑하기 시작한다.

이 어릿광대의 발길이 닿는 곳에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세상을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작가는 틸의 시선을 따라 기아와 살상, 페스트가 덮친 당시 유럽의 사회상을 세밀하게 그린다. 당시 유럽의 ‘궁정 광대’는 유일하게 왕을 조롱할 수 있는 존재였다. 교만하거나 독선에 빠진 왕을 비아냥거리는 것이 광대의 역할이다. “광대가 황제를 머저리라고 부르지 않으면 누가 하겠어? 누군가 한 사람은 해야 돼.”

그런 광대의 삶 역시 생과 사를 오가는 아찔한 줄타기와 같다. 소설은 사치스런 궁정도, 처참하게 파괴된 농노들의 마을도 유랑하는 틸을 통해 지배층과 피지배층 양쪽 모두의 시선에서 전쟁의 참상을 그린다. 켈만은 “가해자와 피해자,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 그리고 마침내 전쟁 종식에 성공한 참전국의 외교관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나는 최대한 그림을 가득 그리고 이 역사적 재앙을 가능한 많은 측면에서 다루려고 했다”고 말했다.

최초의 근대적 국제전으로 800만여명이 희생된 30년 전쟁은 유럽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 유럽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 사건이었다. 켈만은 이 시기에 주목한 이유에 대해 “그 시기에 문명 사회가 몰락했다”고 설명했다. “제가 이 소설 프로젝트에 착수했던 2012년 당시에는 (30년 전쟁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별다른 연관성이 없었지만, 그 이후 여러가지가 변화했습니다. 계속되는 시리아 내전, 브라질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집권과 탄핵 위기,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집권과 대선 불복 등 제가 살고 있는 세상과 쓰고 있는 세상이 점점 더 가까워지는 듯한 이상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켈만은 “오늘날 시리아가 그렇듯, 30년 전쟁을 종교전쟁이나 정치전쟁으로만 단정지을 수는 없다”며 “처음에는 작은 지역 갈등으로 시작됐지만, 전쟁을 부추기는 초강대국의 갈등으로 인해 결국 전쟁이 지역 전체로 확산됐다. 결국 전쟁은 누구도 특정 시기에 쉽게 끝낼 수 없는 파국적 갈등으로 치달았다”고 말했다.


다니엘 켈만은 소설 뿐 아니라 연극과 영화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다. 과거 한 인터뷰에서 “무겁고 진지한 독일 문학이 지겹다”고 밝혔을 만큼 지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글을 써왔다. 이번 작품 역시 틸과 주변 인물들이 주고받는 우스꽝스러운 대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전개로 몰입감을 높인다. 말하는 당나귀, 광신도와 현자, 우수에 젖은 사형집행인, 전쟁의 장본인이자 죄인으로 망명 중인 보헤미아 국왕 부부 등 다채롭고 생명력 있는 캐릭터가 읽는 재미를 더한다. 그 중심엔 악랄한 세계를 향해 쉴 새 없이 농담을 던지는 인물, ‘틸’이 있다. 영국 작가 이언 매큐언은 <틸>을 “웅장한 상상력과 완벽한 예술적 통제가 빚어낸 작품”이라고 평했다.

오래 전 역사를 현대적이고 생생한 이야기로 되살려낸 이 소설의 집필에만 5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켈만은 “제가 쓴 책 중에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다”며 “자료 조사를 많이 했지만 창작으로 공백을 채워야 하는 부분도 있었다”고 했다. <틸>은 지난해 부커상 최종 후보작에 올랐고, 현재 영화로도 제작 중이다. 켈만은 “먼 나라인 독일의 전쟁을 다룬 책이 한국에서 출판돼 매우 기쁘고 영광”이라며 “한국의 독자분들이 이 책에서 배경과 문화에 맞는 흥미로운 내용을 찾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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