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 몫의 일상 꾸리기, 지금은 살림력을 키울 시간[플랫]
[경향신문]
“오, 엄마 능력잔데!” 아들은 교복 한가운데에 있던 얼룩이 사라지자 연신 감탄을 해댔다. 달랑 두 개밖에 없는 여름 셔츠 중 하나가 코피로 엉망이 되자 매일매일 빨래를 해야만 하던 터였다. 어쩌다 옷을 빨지 못하거나 덜 마른 셔츠를 입고 학교에 갈 때가 있었는데, 그게 스트레스가 되었나보다. 결국 내가 나섰다. 비법이래야 찬물로 지정해둔 세탁기의 온도세팅을 풀고 과탄산소다와 함께 삶기 기능을 활용하는 것이다. 어려울 건 없지만 평소 동작버튼 외에는 눌러본 적이 없거나 ‘빨래 그까짓 것 세탁기가 하지 사람이 하나’라고 생각해왔다면 절대 알 수 없는 살림의 팁이다.
적당히 잘 마른 보송보송한 수건이 주는 포근함과 햇볕에 바짝 마른 옷감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냄새, 빨래를 탈탈 털 때 기분 좋게 튕겨나오는 물방울 등은 빨래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더불어 안 되겠다 싶을 만큼 더러워진 옷들이 약간의 노력으로 다시 살아날 때는 마치 큰돈이라도 번 듯한 만족감과 혼자만의 뿌듯함이 있다. 모두 지겹도록 세탁기를 돌리고 손빨래를 해보고 인터넷 검색을 하고 세제를 바꿔보면서 얻은 살림력이다.
고백하자면 내가 내 아이만 했을 때는 빨래의 ㅂ자도 몰랐다. 옷이란 세탁기에 넣어두면 어느새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 있었고, 가끔 실내화나 운동화를 빨긴 했지만 솔직히 하기 싫었다. 오빠는 하지 않는데 나만 하는 것도 억울하고 엄마의 등쌀에 떠밀려 오빠의 것까지 내가 빨아야 해서 더 싫었다. 그때 내가 엄마의 노고를 좀 더 알았더라면, 엄마 아빠가 딸이니까 이런 것 좀 하라고 말하는 대신 오빠에게도 같은 책임을 부여했더라면, 누가 나에게 살림이라는 게 허드렛일이 아니라 나를 돌보고 대접하는 일이라고 가르쳐줬더라면 좀 더 일찍 살리고 돌보는 일의 가치를 깨달았을까.
<지금은 살림력을 키울 시간입니다>에서 금정연 작가는 ‘한 사람 몫의 일상을 제법 성실하게 꾸려가고 있다는 뿌듯함’을 살림의 재미로 꼽는다. 셀 수 없는 반복과 경험으로 만든 살림력이 일상을 윤택하게 해줄 거라 말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분위기가 반갑다.
많은 사람들이 기후위기 시대를 맞아 삶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성장주의와 속도전쟁을 멈추고 느리고 소박한 삶으로 돌아가야 탄소배출을 줄일 수 있다고, 그래야 우리가 지구에서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는 삶은 그냥 오지 않는다. 에어컨을 적게 쓰려면 창문을 더 많이 열어야 하고 그럼 집 안으로 들어오는 먼지를 더 자주 쓸고 닦아야 한다. 배달음식을 줄이려면 그만큼 더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 패스트패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내가 가진 옷을 잘 세탁하고 보관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이 모두는 살림력이 밑천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제 살림력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능력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엄마가, 할머니가 대신 해줄 것으로 기대해선 안 된다. 인심 쓰듯 ‘내가 도울게’라고 말하는 뒤떨어진 태도도 집어치우자. 살림은 하나하나가 인내심과 창의력을 요하는 미션이니 이보다 더 큰 배움터가 없다. 문제해결력이나 창의력을 키우기 위해 학원 문을 두드리는 대신, 프라이팬을 들고 냉장고 앞에 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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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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