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아파트 60년]⑥ 판상형·중층·복도식.. 아파트의 '기준' 세운 여의도 시범아파트

고성민 기자 2021. 7. 19.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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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아파트 60년]

1958년. 한국산(産) 첫 아파트는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 세워졌다. 이때부터 아파트는 전후(戰後) 주택난 해소를 위해 대규모로 지어진다. 고급 맨션이 유행하고 ‘건설 붐’으로 여의도·반포·잠실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지어지며 아파트는 우리나라 대표 주거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아파트에는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 기술까지 담긴 셈이다. [편집자주]

10~15층 중층에 성냥갑 모양의 판상형, 대단지 아파트. ‘아파트’라는 단어를 머릿속으로 떠올릴 때 가장 흔하게 생각나는 장면이다. 시초는 1971년 준공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시범아파트다. 아파트 명칭도 모범을 보인다는 뜻의 시범(示範). 여의시범은 당시 최고층인 13층으로 지어져 아파트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됐다. 여의시범이 채택한 판상형·복도식·중앙난방·조경·지하 공동구 등은 ‘한국산 아파트’의 공식으로 이후 수십년 이어진다.

◇여의시범 부지, 대법원·서울시청 들어설 땅이었다

지난 4일 찾은 여의도 시범아파트 전경. /고성민 기자

여의시범은 여의도 아파트 중 가장 먼저 지어졌다. 초고층 건물로 빼곡한 현재 여의도의 모습을 보면 옛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운데, 여의도는 과거 모래땅이었다. 조선시대 목축장, 일제강점기 이후 비행장으로 쓰였다. 이 모래땅을 택지지구로 개발하려는 계획이 1967년 시작했다. 서울의 주택난을 해결하는 동시에 ‘후세에 길이 남을 예술적 도시’를 설계한다는 목표였다.

여의도 둘레를 따라 윤중제(제방)를 설치하는 공사가 1967년 2월 20일 시작했다. 폭 20m, 높이 17m, 총길이 6300m에 달하는 제방을 만드는 공사였다. 당초 1년 계획이었지만 장마 전에 끝낸다는 목표로 100여일 만인 6월 1일 완공했다. 1970년대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역임한 고(故)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월간 ‘국토’ 1997년 10월호에 “가혹하다느니 치열하다느니 하는 낱말로 표현되는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면서 “혈투라는 낱말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적었다.

1968년 5월 30일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이 공사에는 매일 24시간 교대로 중장비 120대, 트럭 150대, 일평균 5000명 인력이 동원됐다. 잡활석 100만개, 잡석 3만5000입방미터(㎥), 시멘트5494톤, 철근 110톤, 모래 200만㎥가 쓰였다. ‘한국 토목시공 사상 새로운 기록’이라고 적혔다. 윤중제 공사를 위해 필요한 잡석을 공수하기 위해 ‘마포 8경’으로 불린 인근 밤섬을 폭파, 밤섬의 돌을 날랐을 정도였다.

1968년 김수근이 입안한 초기 여의도 도시계획도. 오른쪽에 있는 대법원지구와 시청지구 절반정도의 땅에 여의시범아파트가 준공됐다. /서울역사아카이브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세운상가에서 합을 맞춘 김수근 건축가에게 여의도 설계를 맡겼다. ‘초현대적이며 후세에 길이 남을 예술적 도시설계’를 요구했다. 김수근은 이에 따라 종로 도심의 기능을 여의도로 완전히 옮겨 ‘제2서울’을 건설한다는 구상을 세웠다. 여의도의 서쪽 끝에 국회의사당 부지와 외국공관지구를 계획했다. 동쪽 끝에 대법원, 서울시청, 종합병원 용지를 계획했다. 그러나 대법원, 서울시청 부지에는 결과적으로 여의도 시범아파트가 지어지게 된다.

대법원과 서울시청을 유치한다는 김현옥·김수근의 설계는 왜 무산되고 아파트가 들어섰을까. 손정목 명예교수는 ‘여의도 입주신청 1호’로 국회사무처가 10만평을 신청하자 김현옥 서울시장이 안이하게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애초 법원행정처와 협의나 국무회의 의결, 외국 대사관과 협의를 거치지 않은 자신만의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또 윤중제 건설로 30억원을 쓰며 서울시 재정난이 극심해져 여의도 택지의 민간 매각이 다급해진 사정도 있었다. 서울시가 시범 삼아 여의도에서 아파트 사업을 성공시킨 뒤, 나머지 택지 매각을 촉진해야 할 필요성이 커진 것이었다. 김현옥 서울시장이 ‘와우아파트 붕괴’로 물러나고 양택식 시장으로 수장이 교체된 영향도 컸다. 손 교수는 월간 ‘국토’ 1997년 12월호에 이렇게 적었다.

양 시장은 새로 부임해 온 최종완 부시장에게 여의도 택지매각 방안을 시급히 수립할 것을 지시한다. 최종완이 국·과장들과 상의하여 결정한 것은 여의도 일각에 고급 아파트를 건립해 일반에 매각한다는 것이었다….(중략) 시범아파트가 들어설 땅은 김수근팀에 의한 1968년 계획에서 대법원지구로 예정된 땅의 전부와 시청지구로 예정된 땅의 반 정도가 포함된 위치였다. 김수근팀이 심혈을 기울여 수립했던 계획은 이렇게 그 일부가 무너져 버린다.

◇최초의 엘리베이터, 최초의 공동구… 후속 아파트들의 ‘기준’

여의시범은 지상 최고 13층, 총 24개동, 1584가구로 지어졌다. 판상형, 복도식 구조다. 우리나라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아파트다. 중앙난방을 도입했고 최초로 지하 공동구를 만들었다. 냉온수, 난방, 전기, 전화선 등 도시기반시설을 지하에 공동으로 마련한 것이다. 준공식에 박정희 대통령과 양택식 서울시장이 참석할 정도로 정권의 관심도 컸다.

1970년 분양 광고에서 서울시는 이 아파트를 ‘갖는 자랑, 사는 즐거움, 꿈이 있는 마이홈’이라는 문구로 홍보했다. 전용면적 60㎡는 212만원, 79㎡는 278만원, 118㎡는 422만원, 156㎡는 571만원에 분양했다. 현재의 9급 공무원에 해당하는 당시 5급 공무원의 1972년 기준 1호봉 월급은 1만7300원이었다. 호봉 상승 없이 단순 계산해보자면 전용 60㎡를 분양받으려면 약 10년, 전용 156㎡를 분양받으려면 약 28년이 필요했다. 판잣집 철거민을 위한 시민아파트만 짓던 서울시가 최초로 고가 아파트를 내놓은 것이었다.

선착순 모집으로 시작한 분양에서 첫날 오후 4시까지 약 60% 물량이 소진됐다고 1970년 9월 2일 조선일보는 보도했다. 아파트가 대중적이지 않았던 당시 기준으로 준수한 성적표였다. 입주(1971년 10월) 직후인 1971년 12월엔 156㎡ 기준 40만~50만원의 프리미엄이 붙었다. 분양 4년여 뒤인 1974년말에는 시세가 1000만~1250만원에 달해 분양가의 2배까지 집값이 올랐다. 분양 광고대로 금세 ‘갖는 자랑’이 된 것이다. 이후 1977년 여의도에 분양한 목화아파트(44대 1), 진주아파트(30대 1) 등의 분양 경쟁률이 치솟는 계기가 됐다.

여의시범은 2·3·4·7동 하부에 상가가 마련돼 있다. 상가가 있는 2·3·4·7동만 다른 동의 방향과 다르게 직각으로 배치된 것도 특징이다. 시는 당초 모든 동을 일렬 배치했는데, 고(故) 박병주 홍익대 명예교수가 서울시 자문 요청을 받으며 2·3·4·7동 배치를 90도 틀었다고 한다.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로 공신력을 잃은 서울시는 여의시범 설계를 자체 완료한 뒤 여러 전문가가 시범아파트 설계에 참여했다는 이름만 따오려 했는데, 박 교수는 “일률적인 일자형 배치를 내가 계획했다고 할 수는 없다”며 2·3·4·7동 배치를 틀었다고 한다.

당시 서울시민들은 고층 아파트가 너무나 익숙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생소한 입주자를 위해 이른바 ‘엘리베이터 걸’ 98명이 여의시범에 고용됐다. 로열층의 기준도 지금과는 달랐다. 1971년 9월 30일 조선일보는 “시 당국의 앙케이트 조사 결과 입주자들은 4, 5층을 제일 좋아하고 다음이 3, 6, 7층이며, 10층 이상은 별로 원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고층 생활이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지난 4일 찾은 여의도 시범아파트. 현관문 앞에 2층짜리 계단이 별도로 조성됐다. /고성민 기자

여의시범 각 가구 현관문 앞에는 두 칸짜리 계단이 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아파트가 대중화되지 않은지라, 단독주택의 풍경을 사뭇 낸 것이다. 1970년 8월 19일자 조선일보는 “현관 앞은 모두 계단을 만들어 마이홈의 기분을 맛보게 했다”고 적었다. 현재도 여의시범 현관문 앞에는 이같은 두 칸짜리 계단이 남아 있다. 계단 양 옆으로는 가구별로 화단을 꾸미거나 짐을 놓을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재건축 갈등… 안전백서 만든 주민들

여의시범 주민들은 2008년부터 재건축을 추진했다. 2017년 안전진단 D등급 판정을 받고 한국자산신탁을 사업시행자로 지정했다. 그러나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부동산 시장 불안정’을 이유로 2018년 지구단위계획 수립 절차를 보류해 몇년간 여의시범 재건축 사업이 완전히 멈췄다. 박 전 시장은 지구단위계획을 통한 ‘여의도 통개발’이 필요한데, 여의도 지구단위계획이 집값 상승을 부추기기 때문에 지구단위계획 수립을 보류한다는 주장을 폈다.

여의시범 주민들은 2020년 3월 서울시의회에 ‘여의도 아파트지구 지구단위계획 조속한 수립’ 청원을 제기했다. 재건축이 기약 없이 지연되며 안전상 문제가 심화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정비사업 지연에 따른 안전사고에 대비해 서울시가 책임성 있는 대책을 수립할 것 ▲부동산 시장 불안정을 이유로 발표를 지연한 ‘여의도 아파트지구 지구단위계획’을 조속히 결정·발표할 것 ▲지구단위계획의 조속한 발표가 어려울 경우 개별 재건축이 가능하도록 대안을 마련할 것 등 3가지를 요구했다.

여의시범 주민들은 2021년 1월에는 ‘붕괴 위험에서 고통받는 여의도 시범아파트 6000여명 시민일동’의 이름으로 자발적으로 ‘안전사고백서’를 펴냈다. 백서는 총 190여 페이지다. 2017~2020년 4년간의 각종 안전사고 발생 현황과 주민 요청상황을 적어 언론과 정치인 등에 배포했다. 안전사고백서에 따르면 여의시범은 노후화에 따라 2020년 1~11개월 사이 총 9000여건의 유지보수 신청이 관리사무소에 접수됐다.

이제형 여의시범 재건축정비위원장은 “6600볼트(V) 전기가 흐르는 낡은 지구변전실이 아파트 지하에 위치해 안전사고 위험성이 크고, 철근이 부식되며 시멘트를 바깥으로 밀어내는 탈루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면서 “언제 사고가 날지 우려하며 고통 속에 재건축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는 “집값 안정 필요성에 대해선 공감하지만, 여의시범 재건축을 막은 기간 동안 과연 집값 안정이 됐느냐”면서 “아직까지 집값 안정 타령만 하는 것은 시민의 생명과 안전사고 위험을 외면하는 몹쓸 정책”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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