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의 문헌 속 '밥상'] 여름철 입맛 돋우는, 냉국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2021. 7. 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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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무더위에 숨이 막힌다. 애오라지 냉국 한 사발 들이켜고 싶다. 물 많이 잡아 삼삼하게 담근 여름김치도 고맙지만 대접 한가득 담긴 냉국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어, 시원타!’를 외치는 여름날의 맛, 그 관능은 어떤가. 한국인의 여름에 아로새긴 이 음식은 과연 언제 태어났을까? 무어라 단언하기 어렵다. 그저 문헌과 민속자료를 따라갈 뿐이다. 20세기 전반의 어휘부터 재밌다. 그때는 조선어 매체마다 사물의 이름, 어휘의 선택을 두고 극심한 혼란을 겪을 때다. 예컨대 같은 음식의 이름을 놓고 칼국수, 제비국, 밀국수가 표준 경쟁을 했다. 수제비는 밀수제비, 뜨적제비 등과 경쟁했다. 그러다 남은 표준어로 ‘수제비’를, 북은 문화어로 ‘뜨더국’을 택해 오늘에 이른다. 냉국도 그랬다. 그때에는 ‘냉국’과 함께 ‘생갱(生羹)’ ‘찬국’, ‘창국’이 나란히 쓰였다. 이윽고 1938년 문세영(1888~?)이 엮은 <조선어사전>에 ‘냉국’이 대표 표제어로 오르면서 ‘찬국’은 냉국 뒤로 물러났다. 오늘날 북의 문화어에서는 ‘랭국’이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요리책 속의 어휘와 조리법도 지나칠 수 없다. 방신영(1890~1977)은 <조선요리제법>(1921년판)에 ‘외찬국’(오이냉국)을 올리고 이렇게 설명했다. 쓴맛 없는 연한 오이를 풀잎같이 얇게 썰어 간장과 초가 잘 배도록 꼭꼭 눌러두었다가, 보시기에 담아 물 부어 가며 간을 맞추고, 파와 고춧가루를 살짝 더해 완성한다. 우리가 오늘날 즐기는 오이냉국의 원형이 여실하다. 그런데 외찬국은 ‘침채(김치) 담그는 법’에 묶였으며, 오이김치와 장김치 사이에 자리한다. 냉국을 간단한 여름 대용 김치로 여긴 셈이다. 하긴 장마철과 한여름을 건너다 여름김치마저 동나고 나면 냉국 빼고 달리 무슨 음식으로 청신함과 새콤함을 밥상에 불러들이겠는가. 냉국은 이런 조건과 감각의 산물이다.

다시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1934년판)으로 건너가 보자. 여기서 냉국은 ‘찬국 만드는 법’ 동아리로 독립한다. 외찬국은 메역찬국(미역냉국), 김찬국과 어깨가 나란하다. 단, 여기 실린 미역냉국과 김냉국은 소고기 살코기를 볶아 국물을 내고, 식초로 산미를 더하는 방식이다. 귀한 해초에다 소고기볶음과 그 육즙이 어울린 가운데 짙은 감칠맛과 새콤함이 감도는 냉국이라니. 반찬을 넘은 일품요리, 대용 김칫국과는 속성이 다른 음식의 등장이다. 이처럼 겨우 10년 사이 음식에 관한 설명의 변화가 급박하기 이를 데 없다. 음식의 일상이나 기록이 변하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한편 방신영과 동시대에 요리인으로 활동한 이용기(1870~?), 조자호(1912~1976)의 냉국 설명도 방신영과 비슷하다. 여기 이르러 냉국이 왜 그것뿐이냐! 하는 독자의 고함이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지는 것만 같다. 맞다, 글만 뒤져 그렇다는 것이지, 냉국은 한반도의 들판과 골짜기와 하구와 해안을 따라 주워섬기기가 숨찰 만큼 다양하다. 가지냉국, 양배추냉국, 물외냉국, 파초(반치)냉국, 노각냉국, 배추냉국, 더덕냉국, 실파냉국, 마늘냉국, 두릅냉국, 각색버섯냉국, 오이지냉국, 무짠지냉국, 밀피냉국, 묵냉국, 청각냉국, 다시마냉국, 톳냉국, 성게냉국, 해삼미역냉국…. 이 이름은 다만 주재료만 드러낼 뿐이다. 국물만 해도 장국 바탕이 있는가 하면 된장물을 쓰는 수도 있다. 된장국이나 콩나물국을 차게 식혀 바탕을 마련하기도 한다. 묵냉국 또한 올챙이묵, 도토리묵, 메밀묵, 우무묵 저마다의 풍미가 다르다. 신맛 또한 식초에서 그치지 않는다. 집집마다 지역마다 초고추장, 마지막까지 남은 묵은 김칫국, 물김치, 산갓물김치 등등을 다양하게 활용했다. 신맛을 유자로 단장하기도 한다.

냉국의 간과 깊은 맛을 살리려면? 기본은 간장이다. 냉국을 말아본 사람은 제대로 담가 익힌 간장, 왜간장과는 정체가 다른 간장의 제 맛과 제 자리를 안다. 냉국에 호사를 베푼다면? 소고기 장조림 국물, 게장 국물 한 방울이 이보다 더 요긴할 수 없다. 소박하면 소박한 대로 좋고, 작정하고 덤비면 덤비는 보람이 있는 한 대접, 냉국의 계절이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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