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을 점령한 고양이들..라이언 갠더 개인전 '변화율'

글·사진 김종목 기자 2021. 7. 5.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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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고양이들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전시장 좌대 위나 아래에서 늘어지거나 웅크린 채 잠을 잔다. 모형 고양이들은 선반을 차지한 채 집안을 감시하는 반려묘나 시멘트 담장 밑에서 인간을 경계하는 ‘길냥이’의 모습을 닮았다. 언뜻 봐도 진짜 고양이 같다. 박제가 아닐까 하는 걱정은 접어두자. 인조 모피로 만든 고양이다.

‘따뜻하니 노곤하다, 또는 불법 거주자들 (고양이 스모키가 조각가 조나단 몽크의 <풀 죽은 조각 2(2009)>를 만났을 때)’. 영국의 개념미술가 라이언 갠더는 작품 고양이들이 ‘현실’과 ‘가상’, ‘예술 기관’과 ‘현실 세계’ 한가운데 놓였다고 말한다.

영국의 개념미술가 라이언 갠더가 서울 강서구 마곡동 스페이스K 개인전에 내놓은 고양이 작품들은 여러 의도가 들어있다. 갠더는 작품 속 고양이들을 두고 “시소 한가운데 균형을 잡은 채 앉아 있다”고 표현한다. 시소 양쪽 끝엔 각각 ‘현실’과 ‘가상’, ‘예술 기관’과 ‘현실 세계’가 놓였다고 말한다. 진짜 고양이와 모형 고양이, 미술관으로 들어온 고양이와 그 밖에서 살아가는 길고양이가 대비된다.

‘현존의 여파, 또는 불법거주자들 (고양이 삭스가 조각가 브루스 매클린의 <1번 좌대를 위한 포즈 작업(1971)>을 만났을 때)’

갠더는 전시장에 놓인 고양이들이 ‘미술제도’에 편입된 듯도 하지만 하위 문화에 속한 존재 같기도 하다고 말한다. 이 고양이들은 ‘불법 침입자’다. “인사이더의 세상에 들어온 아웃사이더”라고 갠더는 규정한다.

‘움직이는 오브제, 또는 의도’. 아이스크림을 먹으려다 땅바닥에 떨어뜨린 경험은 흔하다. 그 흔한 ‘자연적 기호’에 해당하는 일상 경험을 미술관이란 ‘관습적 기호’로 가득찬 공간에 들여왔다.

고양이 로티와 타이거, 삭스, 스모키는 각각 에바 헤세, 수잔 힐러, 브루스 맥클린, 조나단 몽크의 논쟁적 작품이 놓였던 좌대를 점령했다. ‘따뜻하니 노곤하다, 또는 불법 거주자들 (고양이 스모키가 조각가 조나단 몽크의 <풀 죽은 조각2(2009)>를 만났을 때)’ 같은 제목이 붙었다.

몽크는 제프 쿤스의 ‘풍선 토끼’에서 바람을 빼며 무너져가는 토끼를 형상화한 전복으로 화제가 된 작가다. 갠더는 이처럼 역사적인 예술가나 존경하는 예술가들이 사용한 좌대를 같은 크기로 새로 제작해 내놓았다.

갠더는 회화, 신호등, 책처럼 인간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관습적 기호’와 보름달이나 눈 위의 발자국, 마트에 떨어진 쇼핑 리스트 같은 우연히 발견한 ‘자연적 기호’를 구분한다. 좌대를 관습적 기호로, 늘어진 고양이를 자연적 기호로 볼 수 있다.

갠더의 허구, 가상 세계는 현실, 일상 세계와 맞닿아 있다. 고양이 시리즈는 유명 작가의 사물을 끌어왔지만, 나머지 작품들은 영웅이나 위인이 아니라 가족과 보통 사람들의 일상 경험과 이야기를 불러낸다.

‘젊은 작가에게’. 8살의 갠더가 쓴 편지를 전시장 바닥에 전시했다.

‘젊은 작가에게’는 구겨진 편지 한 장이다. 8살의 갠더가 자기 자신에게 쓴 편지다. 이 편지엔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고 있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료수는 커피와 오렌지 주스이고,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볼로네즈 스파게티입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어디서나 울려 퍼지는 우리의 메아리 (1969년 미시건주 디트로이트에서 전화로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프랜시스 데바 갠더)’는 갠더의 어머니 프랜시스 데바 갠더의 모습을 담은 사진 작품이다.

‘난 다시는 뉴욕에 가지 않을거야’는 집 주인이 알지 못하는 서류 속 지폐를 가져와 주방에 뚫린 작은 구멍을 막으려던 쥐, 그 돈을 횡재로 여겨 더 큰 구멍을 뚫다가 결국 돈을 잃은 집주인에 관한 우화를 담았다. 인간과 동물 사이 ‘돈의 가치’ 문제 등을 담은 작품이다.

<어디서나 울려 퍼지는 우리의 메아리 (존재의 여파)>란 제목의 대형 빌보드 작품은 흙 묻은 아디다스 신발 한 켤레를 그린 것이다. 두 가지 이야기를 담았다. 갠더가 직접 디자인한 운동화다. 실제로 판매하기도 했다.

갠더는 왜 작품에 진흙 무늬를 묻힌 것일까. 자칫 다국적 스포츠 브랜드의 상품 광고로 보일 법한 작품은 또 하나의 ‘서사’가 들어가며 반전을 이룬다.

‘어디서나 울려 퍼지는 우리의 메아리 (존재의 여파)’. 이 작품엔 멕시코 대지진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오마르 루발카바라는 멕시코 사람이 갠더의 이 운동화를 신고 2017년 9월 멕시코시티 지진 때 생존자 수색 활동을 벌였다. 그는 무너진 콘크리트 빌딩에서 탈출한 생존자이기도 하다. 갠더는 자신이 디자인한 완제품을 소장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는데, 그 내용을 본 루발카바라가 운동화를 갠더에게 선물하며 지진 때 경험도 전했다. 갠더는 이 이야기에 영감 받아 ‘어디서나 울려 퍼지는 우리의 메아리 (존재의 여파)’를 제작했다. 특정 상품을 묘사한 그림이 희생과 연대, 공동체주의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승화한 것이다. 갠더는 스페이스K와 인터뷰하면서 “(내 작품들에서) 어떤 좋은 점, 도덕적인 점, 윤리적인 점, 도움이 될 만한 점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겸손한 마음, 새로운 관점, 공감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에서 떠올린 게 운동화 작품이다.

‘눈 내린 오후 뒤집힌 르 코르뷔지에 의자’
‘몇 인치의 눈이 쌓인, 뒤집힌 브로이어 의자. 마르셀 브로이어가 1925년에 디자인한 바실리 B3이다.

갠더의 예술 세계는 일상 세계의 연장이다. 정확히는 일상 경험을 예술의 장에 전시한다. 그 과정에서 ‘시간성’이라는 주제를 담는다. 고양이들 사이 놓인 <눈 내린 오후 뒤집힌 르코르뷔지에 의자>는 건축가 르코르뷔지에 등이 1928년 디자인한 것이다. 갠더는 이 안락의자를 다시 만든 뒤 대리석 수지로 만든 눈을 쌓았다. 눈이 내리고 쌓이는 시간의 축적이란 개념을 넣었다.

미술관 루프탑에 설치한 공공미술 작품인 <우리의 긴 점선 (또는 37년 전)>도 자동차 조립 엔지니어로 일하던 갠더의 아버지가 퇴직 후 공장에서 받은 시계 선물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든 작품이다. 갠더가 집 근처 해변에서 주운 자갈과 시계를 확대한 조각이다. 마치 거인 걸리버가 착용한 시계 같다. 비현실적 크기로 키운 자갈과 시계 덩어리엔 아버지의 노동, 어린 시절의 추억에 얽힌 시간을 압축했다. 시간 측량보단 장식품이나 패션 액세서리로 쓰이는 아날로그 시계에 관한 회고도 들어있다.

‘우리의 긴 점선 (또는 37년 전)은 아버지의 아날로그 시계와 자신이 주운 자갈로 시간과 변화의 문제를 표현한 작품이다.

갠더는 “‘변화’는 ‘시간’과 똑같다. 두 단어는 사실상 같은 단어일 수 있다. 변화 없이는 시간 역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사건이 일어나고 사물이 변하는 것을 통해서만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개인전 제목을 ‘변화율’이라고 달았다.

‘스튜디오 창문 너머의 풍경(2017년 11월 8일)’은 갠더의 작업실 창문을 재현한 작품이다. 컴퓨터 렌더링을 통해 구현된 애니메이션 영상이 흐른다. 왼쪽의 ‘신체적 혹은 인지적 수단에 의해 (깨진 창문 이론 5월 21일)’는 강력 테이프 등 일상 용품을 활용해 추상회화 같은 작품으로 만든 것이다.

가상과 현실의 균형, 경험과 이야기의 반영, 시간이란 추상성의 물리화 같은 갠더 특유의 개념과 패턴이 작품을 일관한다.

갠더는 “제 작업은 눈을 위한 시각적 예술이 아니라 뇌를 위한 인지적 예술”이라고 말했다. ‘개념’이니 ‘인지’니 하는 것에 미리 주눅들 필요는 없다. 그는 “예술은 엘리트적이어선 안 된다”고도 말한다. “나쁜 예술이란 주어진 예술, 똑같은 해석을 남기는 예술”이라고 했다.

좋은 예술이란 무엇인가. “한 지점에서부터 시작하지만 수많은 종점에서 끝나는 예술이다. 그 수많은 종점이란, 작품을 감상하는 수많은 관람객을 말한다. 예술은 붙잡을 수 없고, 고정할 수 없는 것이다.” 전시는 9월17일까지. 성인 5000원, 청소년 3000원.

라이언 갠더 전시장 전경. ‘관습적 기호’와 ‘자연적 기호’에 관한 작품을 걸었다. 오른쪽 벽면의 ‘자연적 기호와 관습적 기호 (다른 이들이 달을 바라보는 동안 기호를 그리는 누군가가 있었다)’는 한글 같은 여러 문자를 활용해 추상화 효과를 냈다.

글·사진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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