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요원 해볼래? 자리생겼다" [천현우의 쇳밥일지 (2)]

천현우 용접노동자 2021. 7. 4.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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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쪽은 주야교대에 68시간을 꽉꽉 채워 일하는 게 기본 옵션이다. 군대와 유사한 문제가 있어 이런 회사에 입사한 특례병은 상당수가 버티지 못하고 도로 입영신청을 했다. 환희 반 걱정 반이다.

[경향신문]

김광석의 명곡, ‘이등병의 편지’는 참 묘한 노래다. 몇줄 안 되는 가사의 주인공이 생판 남이었다가 어느 순간 내 얘기가 된다. ‘어느 순간’이란 바로 입영통지서가 날아온 시점, 전문대를 졸업한 지 한달도 되지 않은 때였다. 삶의 우선순위란 기나긴 줄에 갑자기 나타난 병역의무가 새치기를 했다.

그날부터 가슴과 머리가 따로 놀았다. 본능에 가까운 거부감과 각오를 가장한 체념. 심장은 복학생들의 ‘군대 썰’을 들을 때마다 느꼈던 두려움에 떨었고, 이성은 어차피 거쳐 가야 할 길 걷는 동안 진로 결정을 유예할 수 있다며 위로했다. 입대 날짜가 일주일 앞까지 다가왔을 때였다. 집에서 주호민의 군대 이야기 만화 <짬>을 읽으며 시간 죽치고 있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지도교수였다.

“현우야, 기능요원 해볼래? 자리 생겼다.” 산업기능요원. 산업체에서 일하며 병역을 대체하는 제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워낙 좁은 자리다 보니 방송이나 신문에선 기능요원 제도를 유명인들의 병역 도피처처럼 다루곤 했다. 실제론 같은 병역대체 의무를 하더라도 노동 강도는 회사마다 천차만별이었다. 특히 공장 쪽은 주야교대에 68시간을 꽉꽉 채워 일하는 게 기본 옵션이었다. 이런 회사에 입사한 특례병은 상당수가 버티지 못하고 도로 입영신청을 했다. 혹시 나도 그런 꼴이 되진 않을까? 환희 반 걱정 반으로 지도교수의 제안을 승낙했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A/S기사의 본질은 서비스직

내 첫 장기 근무지가 될 회사는 경남 창원 팔용동에 있는 작은 공장이었다. 공장 내부는 대단히 깔끔했고 이렇다 할 위험한 일도 없었다. 생산 현장은 여성 두분이 사실상 사령탑을 맡고 있었다. 10년 경력의 반장은 온갖 제품에 들어가는 부품의 위치를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5년차 이모는 손이 빨라 내가 제품 하나 만들 시간에 두개를 너끈히 만들었다.

좁은 현장에 7명이 옹기종기 모여 일하는 소사장제라 장단점의 경계가 희미했다. 암만 막역한 사이도 언제나 반가울 순 없는 법인지라 호탕하고 책임감 강한 선배는 이따금 막말을 했다. 한 번은 내 바로 앞에 들어온 선배를 화장실로 데려가 뺨을 때리기도 했다. 다들 그 사실을 알았지만, 적당히 묵인했다. 군대와 유사한 문제점이었다. 피해자가 특례병이다 보니 ‘더러워 이직한다’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경찰 부르자니 닫힌 사회의 생태계가 망가졌다. 그 좁은 회사에서 서로 얼굴 보기 민망해지는 상황을 어찌 견디란 말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보낸 시간이 다섯달. 문제의 선배는 소집해제 기간을 채워 회사를 나갔다.

이후 특례병은 나를 포함한 4명 체제로 돌아갔는데, 내 역할은 A/S였다. 제품 도면을 꼼꼼히 살피고, 검사 기계 작동방식을 익혔다. 수리 후 처리 양식도 새로 만들었다. 제품을 잘 고치고 기록에 누락만 없으면 무탈하겠다는 생각은 선임자가 나가자마자 착각으로 드러났다. A/S 기사의 본질은 기능직이 아니라 그토록 하기 싫었던 서비스직에 가까웠다. 전화가 하루에 수십통이 걸려왔고, 수시로 납품사의 항의전화까지 감내해야 했다. 노령층 고객이 많아 소통의 어려움도 많았다.

더군다나 의료기기란 제품의 특성상, 모호한 영역이 많아 자연스레 양심 없는 장사꾼도 꼬이게 마련이었다. 이들이 만병통치약인 양 광고하며 팔아댄 기계의 뒤처리는 모두 내 몫이었다. 특히 도산한 업체 제품은 골칫덩이 그 자체였다. 하나같이 덩치가 큰 제품들이라 노인들이 택배로 보내기엔 어렵고, 어떻게 회사까지 도착했다 한들 부품이 부족해 수리도 지난하기 짝이 없었다. 이럴 땐 늘 회사의 이익과 개인의 양심이 부딪치곤 했다. 과장은 “못 고치니까 폐기하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 논리가 틀렸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납품했을 뿐이고, 고장은 망한 회사 제품을 산 고객들이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욕을 하든 말든 안 된다고 잡아떼기로 일관했다. 그러다 마음이 바뀐 건 한 노인의 전화였다. 거동이 불편한 그분은 남편을 먼저 보내고 대부분 집안에만 계셨다. 그러다 한 교회 사람이 제품을 소개해줬다는데, 그 기계로 물리치료를 하고 나면 30분은 걸어다닐 수 있다고 했다. 결국 200만원이란 거금을 들여 구매했는데 기계가 고장 났고, 그 교회 사람은 연락을 받지 않아 혼자 겨우겨우 제조사 전화번호를 알아냈다고 했다. 새 제품을 사야 한다는 말에 그분은 눈물을 흘렸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라 비싼 의료기기를 다시 살 여력이 없다고 했다.

퇴근 후 스펙 쌓기는 불가능

그 사연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땐 도저히 이성의 줄자를 갖다 댈 수가 없었다. 인근 공구상가에서 다이오드와 트랜스를 사고, 고등학생 이후 집에 처박혀 있던 인두기와 멀티 미터를 챙겨 휴일 순천행 버스에 올랐다. 동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낡은 도시. 물어물어 도착한 허름한 집 안에서 허리 구부정한 노인이 나왔다. 다행히 수리는 성공했고, 꼬깃꼬깃한 1만원짜리 3장을 극구 사양하며 마산으로 돌아왔다.

입사 반년. 슬슬 일이 손에 익었고, 일감이 없어 무척 한가한 겨울이었다. 월급 도둑이라는 단어가 한창 유행하던 시기였는데 본의 아니게 자기소개가 됐다. 지금 아니면 언제 직장생활을 하면서 공부해보랴. 마침 대학 다니면서 끝끝내 못 딴 자격증 생각이 떠올랐다. 교수들이 따면 절대 안 굶어죽는다며 열과 성으로 광을 팔던 전기산업기사. 스펙 더 쌓아 나쁠 것 없단 생각에 국비지원 자격증 학원에 등록했다.

학원의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낡디낡은 상가는 먼지의 안식처요, 거미들의 사냥터였다. 강의실엔 칼에 긁히거나 볼펜 낙서가 남아 있는 책상과 리벳이 달랑대는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저녁반은 모두 직장인들이다 보니 좁고 퀴퀴한 곳에 피로의 아지랑이가 넘실댔다. 강의 중간 쉬는 시간에 이야기 들어보면 전부 먹고사는 이야기였다. 그 퍽퍽한 주제에 공감은 갔지만, 듣고 있자면 우울해져선 금방 강의실로 돌아가 쪽잠을 자곤 했다. 막상 일과 공부를 병행해보니 몸은 힘들었고 마음도 버거웠다. 시험까지 앞으로 2주일, 회사가 갑자기 큰 업체와 계약하면서 매일 밤 10시 퇴근하게 됐다. 자연히 학원비 환급은 물 건너갔고, 암기의 황금기 또한 날려먹고 말았다. 일요일도 출근해 시험장엔 아예 가지도 못했다. 그날 이후로 ‘퇴근 후 스펙 쌓기’는 단 한 번도 시도한 적이 없다. 엄두조차 나질 않는다. 일하면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정말이지 초인이다. 그런데 그런 초인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경쟁해야 살아남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천현우는 2011년에 전문대 전자과를 졸업해 중소기업을 전전했다. 청춘 2막이라 생각했던 시기에 찾아온 가난으로 본래 전공과 무관한 용접공이 됐다. 낮에는 쇠를 녹여 제품을 완성하고, 밤에는 생각을 녹여 글을 완성하는 삶을 살고 있다.

천현우 용접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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