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석의 푸드로지>'탱글' 알알이 씹힌다.. 초여름 입맛 살려보리

기자 2021. 6. 24.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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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을지로의 해물포차 콘셉트의 식당 ‘남작’에서 내놓는 보리 리소토. 와인으로 조린 가리비와 백합을 다 먹고 나면 국물에다 만들어주는 요리다.
위 사진은 광주 팔도강산의 보리밥. 돼지불고기와 계란찜, 제철나물 등으로 푸짐하게 상을 차리고 잘 지은 보리밥을 비벼 먹기 좋도록 사발에다 낸다. 아래는 보리로 만든 증류주 모리소주. 전북 부안에서 빚는다.
이우석 놀고먹기연구소장

■ ‘햇보리’의 계절

기원전부터 인류 먹여살린 곡물

삼국유사 주몽설화서 처음 언급

생계위해 어쩔수 없이 먹어오다

위스키·맥주 만들면서‘귀한 몸’

거친 식감도 요즘은 별미로 대접

백미보다 단백질·식이섬유 많아

나물 쓱쓱 비벼 된장국과 즐기고

서양식 술찜 요리 리소토 변신도

황금 물결 보리가 드디어 나왔다. 겨울 동토를 뚫고 싹을 내민 후 얼마나 기다린 햇보리인가. 어렵사리 춘궁기를 보내고 보리를 맞는 기분이 뿌듯하다. 5월 5일 입하(立夏)가 지나면 보리를 걷는다. 농가월령(農家月令)에선 곡우를 지나 입하에 들면 비로소 보리가 익는다 했다. 이 시기가 지나면 슬슬 채비를 해야 한다. 남쪽에선 소만(小滿)이 되기 전에 보리를 모두 베어야 모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소만은 5월 21일이다. 이달 중순부터 시중에 탈곡과 도정을 마친 햇보리가 나왔다. 예전에는 보리가 목숨을 살렸지만 요즘은 입맛부터 살린다.

보리는 생장이 빠르다. 그 덕에 벼를 심기 전에 보리를 거둘 수 있어서 예전에는 중요한 구황작물이었다. 다른 곳에 벼를 심었다가 따로 모를 내는(이앙) 까닭도 보리가 다 자랄 때까지 벼를 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가을 거둔 쌀이 일찍 떨어졌거나 수탈을 당해 먹을 것이 없어지면 보리가 익기 전까지 두세 달 간극이 생기는데 이때 기아에 시달렸다. 이를 가장 험한 고개, 보릿고개(춘궁기)라 불렀다.

보리(대맥)는 메소포타미아 삼각주 ‘비옥한 초승달 지대(the Fertile Crescent)’와 양쯔(揚子)강 상류가 원산지로 추정되는 인류의 주요 곡물 중 하나다.(종류는 서로 다르다.) 아시아의 쌀, 만주의 콩, 유럽의 밀, 북방의 수수, 신대륙의 옥수수와 함께 기원전부터 인류를 먹여 살려온 생명줄로, 그 역사는 약 1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선 삼국유사 ‘주몽설화’에 처음 언급된다. 동서고금에서 보리는 밀이나 쌀처럼 귀하게 여겨지지 않던, 그야말로 ‘잡곡(雜穀)’이었다. 그저 생계를 위해 먹어 오다 맥주를 빚거나 가축의 사료로 썼다. 서양에서도 이모작을 위해 추울 때 잘 자라는 보리를 심었는데, 보릿가루로 빵을 만들어 먹었다. 중국어로는 다마이(大麥), 일본에선 무기(麥)라 부른다. 영어로는 바를리(barley), 특히 영국 발음은 ‘발리’에 가깝다. 신기하게도 우리 발음 ‘보리’와 많이 비슷하다. 먹기는 러시아, 스칸디나비아 반도 등 추운 지역에서 많이 먹는다.

보리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한국에선 겉보리와 쌀보리 두 종류를 심는다. 논에 심는 쌀보리로는 밥을 짓고 밭에 심는 겉보리는 주로 사료나 장을 담그는 용도로 쓴다. ‘쌀’ ‘보리’를 번갈아 외치다 ‘쌀’을 외칠 때 내민 주먹을 잡는 놀이가 있다. 놀이에서도 쌀은 얼른 잡고 싶은 대상이었다. 보리는 쌀에 비해 인기가 없다. 식감이 거칠고 찰기가 거의 없어 입안에서 알알이 돌아다닌다. 게다가 밥을 지으면 특유의 향취가 난다.

특히 지난날 가난을 겪으신 어르신 중에는 보리밥이 고생했던 기억과 겹친다며 외면하는 분도 많다. 보리밥 추억이 좋다고 말하면 “고생을 덜했다”고 한다. 그만큼 가난하던 시절 지긋지긋하게 보리밥을 먹었다. 미각이란 당장 옛 기억을 소환하는 타임머신이니 그 시절 그 맛이 썩 좋을 리가 없다.

실제 보리밥은 맛있게 짓기가 어렵다. 미리 충분히 불려놔야 한다. 보리를 살짝 익혀 납작하게 누른 압맥과 보리를 쪼개 작게 만든 할맥은 대맥보다 밥을 짓기 편하고 맛도 좋다. 교외나 시중 보리밥 전문점은 미리 보리를 불려 수분을 충분히 흡수시킨 뒤 부드럽게 밥을 짓는 노하우가 있다. 센 장작불 가마솥에다 물을 넉넉히 잡아 오래 짓는 방법도 있다. 다 맛있는 이유가 있다.

보리는 백미보다 단백질과 식이섬유가 많고, 특히 다이어트에 좋아 요즘엔 젊은 층으로부터 다시 주목받고 있다. 별미로 챙겨 먹다 보니 보리 특유의 탱글탱글한 식감도 다들 좋아한다. 알알이 돌아다니는 보리 밥알의 느낌도 오히려 인기 요인이 됐다. 일부러 나물과 함께 비벼 먹으러 보리밥집을 찾는다. 밥알이 뭉치지 않아 비벼 먹기엔 쌀밥보다 더 낫다. 보리쌀로 리소토 메뉴를 내는 식당도 있다. 당연히 보리술도 재조명받고 있다. 일본 전통 증류주인 소추(燒酎) 중 보리로 담근 ‘무기 소추’가 유명한데, 요즘엔 이와 양조 방식이 유사한 국산 보리소주도 나왔다.

만년 하위 곡물에 머물렀던 보리가 세상에 다시 없는 귀중한 곡물로 인정받게 된 것은 위스키와 맥주가 발명되면서부터다. 맥아(malt)를 주원료로 하는 이 두 술이 나오며 존재감이 커졌다. 그 전에는 척박한 땅에 사는 이들이 그나마 주식으로 삼았고 풍족한 땅에선 보리를 사료로 썼다. 맥아는 보리에 싹을 틔운 후 바로 건조시킨 것이다. 이름도 ‘보리(麥)의 싹(芽)’이란 뜻이다. 왜 굳이 맥아로 만들어 쓸까. 싹이 트면 아밀라아제(amylase)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술이 되려면 당이 있어야 하는데 맥아에 함유된 아밀라아제는 보리 자체의 녹말을 스스로 엿당(말토스)과 덱스트린으로 분해한다.

이쯤 되면 뭔가 슬슬 감이 올 것이다.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배웠던 소화효소 ‘침 아밀라아제’. 바로 그 아밀라아제다. 맥아는 순우리말로 엿기름이다. 식혜나 고추장을 담글 때 쓰는 엿기름이 바로 맥아다. 엿기름 하면 기름 종류로 아는 이들이 의외로 많은데 엿기름의 기름은 기름(oil)이 아니다. 어원은 명확하지 않으나 보리가 싹을 틔우도록 ‘기르다’ 할 때의 기름(raise)으로 보는 게 다수설이다. 엿은 단맛을 낸다는 뜻이다.

수메르인이나 고대 이집트인들이 처음 맥주를 만들 때는 맥아를 쓰지 않았다. 보리를 갈아 빵 반죽을 만든 후, 이를 발효시켜 맥주를 담갔다. 이집트 벽화에 등장하는 맥주는 술이라기보다는 죽처럼 걸쭉한 상태로 추정된다. 맥주는 곧 빵이었고, 거친 곡식을 맛있게 만드는 요리의 형태였던 것이다. 막걸리병 밑바닥에 고인 진한 지게미 상태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위스키(whisky)에도 맥아를 쓴다. 보리를 많이 재배했던 스코틀랜드인이 18세기쯤 위스키를 만들어냈다. 맥아를 증류해 알코올을 생성시키는 양조법을 개발한 것. 발효된 보리술을 다시 증류하고 와인통에서 숙성시켜 오늘날의 위스키가 탄생했다. 요즘은 꼭 보리로만 만들지는 않지만 정통 위스키 하면 그래도 보리를 원료로 하는 것이 맞다. 원료 술도 맥아를 증류한 것이지만 향을 가미하지 않기에 맥주와는 다르다. 독일 맥주순수령에 따르면 맥주에는 반드시 향신료인 홉(hop)을 넣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호프집의 호프(hof)와도 다르다.

세상 재화 중에서 중량 대비 값이 비싸기로는 위스키가 만만찮은 것을 보면, 허드레 곡물 보리가 위스키 양조에 쓰이면서 비로소 엄청난 부가가치를 갖게 됐다. 보리는 단백질 등 영양가가 높고 보존성이 좋아 건빵 등 비상식량 등에 쓰인다. 다만 찰기가 부족해 국수나 떡을 만들 때 가공 편의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요리가 별로 없는 편이다. 한국에서는 보통 보리밥을 짓거나 볶아서 보리차를 끓인다. 서양에선 건강식 빵을 만들거나 샐러드에 흩뿌리는 용도로 쓰인다.

차가운 날씨 속 한 줌 볕만으로도 무럭무럭 자라난 햇보리가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이른 수확의 즐거움에 덩달아 기분도 고양된다. 이제 살아날 것은 되살아나리라는 기대감까지 든다. 경제도, 세상도, 입맛도.

놀고먹기연구소장

■ 어디서 먹을까

◇의왕옛날보리밥=경기 의왕에 위치한 보리밥 골목에 있는 집이다. 보리밥과 나물을 한 상 가득 내온다. 이 일대가 보리밥촌을 이루고 있다. 다양한 나물 찬을 취향대로 올리고 참기름 고추장에 쓱쓱 비비면 향취가 싱그럽다. 쌈에 싸먹을 수 있도록 별도 쌈채도 내온다. 보리밥은 잘 흩어지니 성미 급한 이도 곧잘 비빈다. 입에 넣으면 아삭한 쌈과 부드러운 나물, 그리고 낱낱 흩어지는 보리 밥알의 식감이 뛰어나다. 보리의 구수한 맛이 된장찌개와도 잘 어울린다. 이 집 물김치도 자랑거리다. 고기반찬이 없어도 든든한 식사를 할 수 있다. 경기 의왕시 손골길 17. 8000원.

◇팔도강산=광주 무등산 보리밥 맛집으로 소문난 팔도강산은 황송할 정도로 푸짐하다. 제철나물 찬과 장아찌, 젓갈, 김치 등을 동그란 상에 빼곡히 차려내고 여기다 돼지불고기와 계란찜 등 든든한 단백질 반찬을 곁들여 낸다. 보들보들 잘 지은 보리밥을 나물에 비벼 먹기 딱 좋도록 사발에 담아준다. 잘 섞인 보리밥을 한술 입에 떠넣으면 각각의 찬이 내는 맛의 조화를 한입에 느껴볼 수 있다. 참기름과 고추장도 별미지만 넣지 않아도 그럭저럭 간이 맞는다. 남도 상차림답게 곁들인 된장국도 허투루 낸 것이 아니다. 광주 지산유원지 인근 무등산 허리에 독채 건물로 있다. 광주 동구 지호로127번길 10-7. 보리밥 1인분 8000원.

◇형제식당=서울 회현역 인근 남대문시장에 국내에서 가장 손님이 많은 보리밥 골목이 있다. 하나같이 보리밥과 칼국수, 냉면을 판다. 주문 즉시 콩나물, 상추, 무생채 나물 등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반찬을 쓱쓱 얹어서 준다. 쌀과 보리를 반반 넣은 보리밥이 채소와 잘도 어울린다. 특이한 점은 보리밥을 주문하면 시래기 된장국과 함께 비빔냉면, 칼국수를 곁들여 내준다.(사진) 원플러스투(1+2) 시스템이다. 칼국수를 주문하면 냉면을 주고, 반대로 주문해도 그리한다. 메인과 곁들임 접시 크기가 다르다. 보리밥 맛과 가격은 거개 비슷한데 이 집 칼국수 육수가 시원하기로 소문났다. 찰밥을 주문하면 1000원을 더 받는다.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4길 42-1. 7000원.

◇해물포차 남작=서울 힙지로(을지로)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새로운 식당 남작(濫酌). 낡은 인쇄골목 사이에 숨겨놓은 듯 근사한 다이닝 공간이 펼쳐진다. 그 안을 채우는 음악과 테이블 위에 오르는 음식은 더욱 힙하다. 콘셉트는 해물포차지만 그릴과 오븐, 히노키 도마 등을 갖추고 다양한 동서양 음식을 차려낸다. 생선회에서부터 한식, 일식, 이탈리안 등 식도락 향연이다. 서양식 술찜도 있는데 외양부터가 근사하다. 큼지막한 가리비와 백합 등을 화이트와인으로 자작하게 조려냈다. 다 먹고 나면 보리를 넣어 리소토를 해준다. 조개와 와인을 뭉근한 불로 끓이는 동안 진한 육수가 탱글탱글한 보리 알을 감칠맛으로 코팅한다. 마무리가 근사하다. 보리가 다했다. 서울 중구 을지로14길 16-8 1층. 2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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