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노동 굴레 벗고, 당당한 '노동자'로 첫발 딛는 가사노동자

박은경 2021. 6. 18.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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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국제가사노동자의 날 기념 토론회]

국내 약14만명 추정되는 가사노동자
지난 68년간 근로기준법 적용 제외돼
복지 사각지대, 여성 노인빈곤 방치

내년 5월부터 산재 · 4대보험 등 적용해
소비자·노동자 추가비용 부담줘선 안돼
공익 제공기관 육성, 세제·재정지원 절실
6월16일 서울 영등포구 한국노총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10회 국제가사노동자의 날 기념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가사근로법’ 현안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결혼 후 가사와 육아로 경력이 단절됐던 백정옥씨는 가정형편이 어려워지자 일자리 구하기에 나섰다. 어렵사리 찾은 첫 일자리는 산후관리사였고, 지금은 가사노동자로 12년째 일을 하고 있다. 쉬는 날이면 관련 기관에 찾아가 직접 교육도 들을 만큼 일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던 그녀는 오랜 경험과 연륜을 인정받아 업계 베테랑으로 꼽힌다. 하지만 본인의 직업을 주변에 소개할 때면 막막함을 느끼곤 했다.

가정부, 가사도우미, 가사돌봄관리사…시대에 따라 직업명은 조금씩 달라져왔지만, 가사노동에 대한 정의와 역할은 명확하지 않다. 가사노동이 1952년 근로기준법 적용 범위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1인 가구와 맞벌이 가구가 증가하며 가사서비스 수요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 가사노동은 비공식노동으로서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노동의 지위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가사노동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가사노동자 다수가 50대~70대 여성인 점을 감안하면 제도권 밖에 있는 가사노동의 문제는 고령 여성의 취약한 노동환경과 노인 빈곤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국제노동기구(ILO)에서도 이러한 가사노동 실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2011년 가사노동자를 위한 양질의 일자리협약을 채택했다. 동시에 국제가사노동자의 날도 선포했다. 한국에서는 국제가사노동자의 날 선포 10주년이 되는 올해서야 비로소 가사노동자의 노동자 지위를 인정하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지난 6월16일 서울 영등포구 한국노총에서는 제10회 국제가사노동자의 날을 맞아 지난달 21일 국회에서 통과된 가사노동자법의 주요내용과 후속과제를 짚어보는 토론회가 열렸다. 한국가사노동자협회와 한국여성기독청년회(YWCA)연합회, 한국노동조합총연맹,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더불어민주당 이수진(비례)·김영배 의원실이 공동주최한 이날 행사는 가사노동자법을 발의한 이 이원과 임이자(국민의힘)·강은미(정의당) 의원 등에 대한 감사패 증정식과 토론회로 이뤄졌다.

지난달 21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가사근로자법(가사근로자 고용개선에 관한 법)은 가사서비스 제공기관을 정부가 인증하고, 인증기관에 고용된 가사노동자에게 노동관계법을 적용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법 시행은 내년 5월부터다. 발제에 나선 최영미 한국가사노동자협회 대표는 “호출근로, 1인근로, 가정 내 노동이라는 특성으로 68년간 법적,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지 않던 가사노동이 양성화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특히, 이주노동자들이 많은 입주가사근로자에 대한 조항이 포함돼, 이주노동자 권익 증진의 기반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국내 가사노동자들 중 이주가사노동자는 약 10%에 달한다. 높아지는 국내 가사노동 수요를 볼 때 이들의 수는 지금보다 훨씬 늘어나겠지만, 이들을 위한 법·사회적 합의는 거의 없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이주노동자를 포함해 더 많은 가사노동자들을 법적 보호망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해결해야할 과제도 적잖다는게 전문가들 분석이다.

최 대표는 “가사근로자들의 근로환경과 조건이 제대로 개선되기 위해서는 제공기관 확대와 육성이 시급하다”며 “입법과정에서 공익적 제공기관 육성에 대한 조항이 삭제된 점은 유감”이라고 밝혔다. 돌봄과 마찬가지로 가사서비스도 노동자와 소비자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공공성 확보가 중요하다. 현재 가사서비스 시장의 95%를 대기업 등 큰 규모 업체들이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협동조합과 같이 공공성격을 가진 제공기관들이 설 자리를 잃게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우려되는 대목이다.

미고용 노동자에 대한 보호책 마련도 주요과제 중 하나다. 가사노동자법의 적용 대상은 인증을 받은 제공기관에 소속돼 일주일에 최소 15시간 이상 일한 노동자다. 인증 제공기관이 아닌 직업소개소나, 개인간 거래를 통해 가사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들은 이 법의 적용을 받지 못한다. 최 대표는 “늘어나는 온라인 플랫폼 추세를 볼 때, 미고용 노동자를 위한 실태조사와 가사서비스 공공플랫폼 도입을 위한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며 “이 법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확대하기 위해서는 운동주체인 가사노동자들의 참여와 노동조합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부 기념식에서 이수진 더불어민주당(비례·오른쪽 두번째) 의원이 축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순영 한국YWCA연합회 위원, 안창숙 한국가사노동자협회 이사, 장명자 성남YWCA 돌봄과살림협동조합 회원, 백정옥 사회적협동조합 행복한돌봄 가사관리사, 이 의원, 김현중 한국노총 상임부위원장.

윤정향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가사근로자법은) 이용자의 부당행위나 근로자의 부당노동에 대응하기 위한 고충처리 조항이 담겨있지만, 노동자 권리 보호 보다는 서비스 제공자가 바뀌는 형태로 대응하는 경우가 많다”며 “노동자 지원센터 등 고충처리 절차를 구체적으로 만드는게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가사근로자법은 이처럼 비공식 노동자를 법과 제도 안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지만, 특별법으로서 갖는 한계도 분명히 존재한다.

유정엽 한국노총 정책2본부장은 “여전히 근로기준법 상 가사노동자에 대한 적용 배제 조항이 남아 있고, 적용대상과 보호수준이 근로기준법 보다 낮은 수준이 그치는 점이 아쉽다”며 “미고용노동자에 대한 실태조사를 통해 이들에 대한 입법적 조치가 필요하고, 향후 공익적 제공기관 육성에 대한 정부의 적극 지원이 중요하다”며 강조했다.

이에 대해 최준하 고용노동부 고용문화개선정책과장은 “정부에서도 현재 15만명의 가사노동자들을 5년에 걸쳐 최대 50%까지 적용대상으로 끌어들이는 목표를 갖고 있다”며 “제공기관과 가사노동자, 이용자에 대한 세제 지원에 중점을 둘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윤아 여성가족부 여성인력개발과장도 “양질의 여성일자리 확산을 위해 사회적기업과 공적 제공기관 육성하고, 직업훈련과 취업지원서비스 등을 담은 교육서비스 제공에 주력하겠다”고 덧붙였다.

박은경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팀장 ek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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