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이 그려준 초상화 보물 지정, 나주향교의 기원 [남도종가]

2021. 6. 15. 08: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파주염씨 공민왕 장인집, 여말선초 우여곡절
가옥 명륜당化, 훗날 그자리 나주향교 세워져
나주 금성관서 작업한 혼천의,자명종 제작참여
영산강변 새월마을서 고려말 동북아역사 상념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두루미 떼 날아드는 영산강변 언덕, 나주시 송월동엔 새월마을이 있다. 임금이 신하이자 장인의 그림을 손수 그려 하사했던 파주 염씨의 후손들이 사는 여러 곳 중 한 세거지이다. 아울러 나라를 구하고도 내부 권력투쟁 때문에 화를 입은 안타까운 이야기도 전해진다.

공민왕이 직접 그려 하사한 염제신 초상은 보물 제1097호로 지정됐다.

고려말 몽골제국 원과 고려를 오가며 벼슬을 지낸 염제신(1304~1382)은 자주 외교를 시도한 공민왕 때를 포함해 두 번 공신에 올라 곡성(파주)부원군, 곡성백으로 책봉됐다. 그와 그의 딸(愼妃:신비)이 보인 충성심 때문에 공민왕은 염제신의 사위가 된다.

부리야트 혈족 출신의 수장이 제국 건설을 이끌었던 몽골은 수천년전 형제 연방국(부리야트=부여, 고리=고려, 몽골)이라는 인연을 내세워 고려와 보다 긴밀해지는 국제정치 수단을 썼는데, 고려-원 사이 결혼을 장려하는 것이었다. 고려 왕은 몽골 공주과 결혼해야 했다.

염제신의 고모가 원의 귀족과 결혼했고, 아버지를 일찍 여읜 그는 원에서 고모부 집에서 자라, 그곳에선 익정사승, 고려에선 우정승, 문하시중에 까지 올랐다.

공민왕은 충신이자 장인인 염제신에게 초상화를 그려준다. 염제신 초상은 섬세한 필치와 품격을 가진 작품으로 평가받으면서 국가 보물 제1097호로 지정됐다. 이색의 목은문고에 ‘공민왕이 친히 (염제신의 초상을) 그려 하사했다’고 기록돼 있다.

나주 송월동에 있는 파주염씨 국파공파 금파종가 [남도일보 제공]

염제신의 장남 염국보(?~1388, 호는 국파)는 성리학을 공부하고 익재 이제현의 문생으로 과거급제해 정몽주와 함께 고려말 개혁에 참여했다. 벼슬은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에 올라 서성군에 책봉됐으며 국파공파의 파조가 된다.

염제신의 3남 염정수(?~1388)는 이색의 문하에서 공부해 과거급제했고 대사헌, 우문관대제학을 역임했으며 훤정집을 남겼다.

차남 염흥방(?~1388)은 도병마사에 올라 홍건적 평정, 개경 수복,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웠으나, 위화도회군이 있었던 1388년, 권력투쟁에 휘말려 가문이 참화(戊辰被禍:무진피화)를 당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3형제는 464년이 흐른 뒤에야 나주 금강사에 배향됐다. 이 가문의 활약과 위기는 드라마 ‘기황후’, ‘정도전’, 영화 ‘쌍화점’ 등을 통해, 다소 각색은 되었지만 비쳐진 바 있다.

나주 금강사

무진피화 때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염이(염국보의 손자)는 조선 건국 이후 폐와(문을 닫아 걸고 세상을 피함)한뒤 ‘명예와 지위를 구하지 말라’는 유지를 남겼다. 그의 차남 염순공(?~?)은 대사헌 김덕용의 딸과 혼인하고 나주에 입향했다.

염순공은 행랑채를 명륜당으로 만들어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 집터가 현재 나주향교 위치다. 그의 학행과 가문 내력이 알려져 세종대왕이 중군사직, 사헌부지평을 제수했으나 고사했다.

염순공의 아들 염재(?~?)는 두문동(고려 수호세력) 후손을 등용하는 세종의 부름을 받아 송화(용인)현감을 역임했다. 청백의 목민으로 평가되어 사후 청백비가 세워졌다.

염공필(1569~?, 호는 금파)은 이괄의 난 때 임회 장군 의병창의에 참여해 호남절의록에 올랐고 금파종가를 열었다.

이후 염영서(?~1781)가 홍대용이 혼천의, 자명종을 나주 금성관에서 제작할 때 실학자 나경적의 제자로서 참여해 조선 과학기술 발전에도 기여했다.

금강사 건물이 낡아 보존에 어려움을 겪었던 염제신 초상화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겼다. 파주염씨의 시조는 고려초 개국공신인 염형명이며, 고려말 충신인 염제신은 14세손이다.

참고로, 지금의 중국 대륙을 점령했던 상고사-고대사 주요 국가를 살펴보면, 서북방, 요하 이북과 동북방, 산동~광동 연안 상당부분, 연해주 등은 고조선,부여,고구려(만주,여진,말갈 포함),남북국(신라,발해:진국)을 중심으로 몽골,돌궐,훈(흉노),모용 선비 등을 포함한 북방계가 장악했다.

만리장성 이남 내륙만 현재 중국의 주류인 한족이 차지했을 뿐, 광동,복건성, 장족자치구, 운남, 귀주성 지역엔 남방계와 7세기 북에서 이주한 유민들이 크고 작은 공동체를 형성해 포진해 있었다.

우리와 언어적으로, 풍속면에서 유사점이 상당한 북방계는 고대사는 물론, 중세, 근대에 까지 아예 중원 전체를 장악(원=몽골, 청=여진,金의 나라)하며 한족문화, 남방계문화와의 조화 혹은 통합을 꾀하기도 했다.

몽골의 중원 경영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몽골은 한족을 문화적으로 통합하기 어렵자 여러 면에서 비슷한 점이 있는 고려를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를 형제 민족으로 여기고 한족 제압에 활용하려 했다면, 좀 더 존중했어야지, 왜 그렇게 거칠게 하고 핍박했나”는 소회는 고려말 역사를 접할때 마다 느껴지는 소회다.

abc@heraldcorp.com

- Copyrights ⓒ 헤럴드경제 & heraldbiz.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헤럴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