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를 무는 진짜 이야기들

오승훈 2021. 6. 13.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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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전쟁 막은 비즈니스맨부터
19세기 '옥스퍼드 사전' 탄생 비화까지
국내서도 '모가디슈' '한산' '영웅' 등
호기심 부르는 '실화 소재' 바탕
장르·시대 불문 영화 개봉 잇따라
몰입도 높고 사회적 환기 효과까지
영화 <더 스파이> 스틸컷.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스토리는 공감을 일으키는 인물이 뜻하지 않게 난감한 상황에 직면하나 그에 굴하지 않고 맞서 돌파구를 찾으려 할 때 발생하는 일련의 행위로 이루어져 있다”는 한 작가의 말은, ‘진짜 이야기’(True Story·실화)를 다룬 실화영화의 정의처럼 보인다.

최근 실화를 바탕으로 한 진짜 이야기들이 극장가를 찾고 있다.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더 스파이>부터 게리 올드먼 주연의 <크라이시스>, 멜 깁슨, 숀 펜 주연의 <프로페서 앤 매드맨>까지 실화영화들이 잇따라 개봉하고 있다. 한국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류승완 감독의 <모가디슈>와 윤제균 감독의 <영웅>, 김한민 감독의 <한산: 용의 출현> 등 하반기 한국영화 기대작들 가운데서도 실제 사건과 인물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여럿이다. 코로나19로 침체 일로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영화계가 실화영화를 기반으로 재기에 나선 모양새다.

영화 <크라이시스> 스틸컷. 누리픽쳐스 제공

최근 개봉한 실화영화들은 사회고발성 스릴러부터 휴먼드라마, 첩보물까지 내용 면에서도 다채롭다. 먼저 4월28일 개봉한 <더 스파이>는 냉전이 최고조에 달한 1960년대에 일어난 역사적인 첩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지난달 20일 극장에 걸린 <크라이시스>는 초일류기업인 제약회사에서 내놓은 약물이 마약 대용으로 활용되는 폐해를 현실감 있게 다룬다. 진실을 은폐하려는 거대기업에 맞선 대학교수의 싸움을 스릴러 기법으로 담았다.

현재 상영 중인 <프로페서 앤 매드맨>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벌어진 ‘옥스퍼드 사전 편찬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다. 책임자인 괴짜 교수 제임스 머리(멜 깁슨)는 영어를 쓰는 모든 이들로부터 단어와 예문을 모으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는다. 전국에서 편지가 답지하던 어느 날, 머리는 고전 속에서 수백개 예문을 뽑아낸 인상적인 편지를 발견한다. 닥터 윌리엄 마이너(숀 펜)가 보낸 탁월한 편지로 인해 불가능해 보였던 사전 편찬 작업에 속도가 붙는다. 멜 깁슨과 숀 펜의 연기 대결만으로도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영화 <프로페서 앤 매드맨>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하반기 극장가에 상륙할 한국 실화영화들도 액션에서 역사물, 뮤지컬까지 다양한 장르 구성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군함도>(2017) 이후 4년 만에 메가폰을 잡은 류승완 감독의 <모가디슈>는 하반기 한국영화의 흥행을 책임질 이른바 ‘텐트폴’ 영화다. 1991년,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서 내전이 발발한다. 통신도 두절된 채 고립돼 있던 대한민국 대사관 직원과 가족들은 살육이 벌어지는 그곳을 탈출하기 위해 모험을 감행한다.

영화 <모가디슈> 포스터.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한산: 용의 출현>은 <명량>(2014)으로 역대 1위인 1700만 관객을 동원한 김한민 감독이 7년 만에 다시 만든 이순신 영화다. 명량대첩 5년 전에 벌어진 ‘한산도대첩’을 그린 전쟁 액션영화로 압도적인 적으로부터 조선을 지켜내려는 이순신과 수군들의 활약을 복원했다.

<해운대>(2009), <국제시장>(2014) 등 천만영화를 두편이나 내놓은 윤제균 감독의 신작 <영웅>은 안중근 의사의 삶을 담은 동명의 뮤지컬을 스크린으로 옮긴 것이다. 1909년 10월,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일본 법정의 사형 판결을 받고 순국할 때까지 마지막 1년을 그렸다. 뮤지컬과 마찬가지로 정성화가 안중근을 연기했고, 김고은·나문희 등도 출연한다.

뮤지컬 영화 <영웅>의 포스터. 씨제이엔터테인먼트 제공

한국 영화계에 실화영화가 조금씩 주목받고 있는 데는 실화영화만의 장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얘기만큼 싱크로율 100%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좋은 소재는 없다. 비정규직 파업이 모티브가 된 <카트>(2014)의 주인공에게 닥친 현실, 정규직 전환을 앞두고 돌연 계약 해지를 당한 실제 이야기는 당시 많은 이의 공감을 얻었다. 이처럼 관객들은 실화영화를 통해 영화가 곧 현실이라 느끼며 영화에 더 깊게 몰입할 수 있다.

역사의 기록이자 시대를 넘어서는 감동 콘텐츠란 점도 매력적인 요소다. 1950년대 미국의 매카시 광풍 때문에 가명으로 활동했던 시나리오 작가 돌턴 트럼보의 생을 담은 <트럼보>(2016)는 스테디셀러 영화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로마의 휴일>(1955)의 실제 시나리오 작가였던 그는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바람에 생계를 위해 가명만 11개를 사용해 시나리오를 썼다. <트럼보>는 시대의 기록물이자 반성문이 됐다. 천주교 성직자들의 성폭력을 파헤친 <보스턴 글로브> 탐사팀 취재를 다룬 <스포트라이트>(2016)는 지금도 저널리즘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영화로 평가받는다.

돌이켜보면 각자의 인생영화 중 상당수는 실화영화일 확률이 높다. “우리는 우리의 삶도 하나의 스토리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스토리에 그토록 흥미를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퓰리처상 심사위원 잭 하트의 말은 우리가 실화에 빠져드는 배경을 가늠하게 해준다. 모든 스토리는 특별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조금 더 특별하다.

영화 <한산>의 포스터.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제작자 입장에서도 이미 검증이 이루어진 이야기를 영화화한다는 점에서 실화영화는 비교적 안전한 선택이다. 영화 <도가니>(2011)와 <변호인>(2013), <택시운전사>(2017), <1987>(2017)처럼 실제 사건을 재조명해 사회적으로 환기하는 효과까지 있다. 위대한 영화는 영화사를 바꾸지만, 잘 만든 실화영화는 세상을 바꾼다.

물론 100% 실화에 해당하는 르포, 전기, 회고록 등 논픽션들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미국에 비해, 한국의 실화 소재 콘텐츠 시장 생태계가 취약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변화의 조짐도 뚜렷하다. 국내 최초의 실화 소재 전문기획사 ‘팩트스토리’의 고나무 대표는 “영화 <재심>(2017), <공작>(2018)처럼 실화 르포의 판권을 구입해 만든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늘고 있다. 국내 최초 프로파일러인 권일용의 연쇄살인 추적기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과 미제 살인사건을 다룬 실화 르포 등의 영상 판권도 이미 팔린 상태다”라고 했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이거 실화냐’ 필수 관람 영화 4선

실화영화는 힘이 세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상상력의 소산이라지만, 실화영화는 사실이라는 물성으로 인해 더 넓은 공감을 이룰 수 있다. 실화영화를 통해 우리는 세계의 비참과 부조리가 오늘도 여전하다는 것을, 이를 뛰어넘는 기적 또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기 미국의 속살을 보여주는 실화영화 4편이 있다. 상상력으로는 담을 수 없는 현실을 보고 싶다면 실화를 권한다.

<모리타니안> 스틸컷. 퍼스트런 제공

먼저 테러와의 전쟁이 남긴 상흔과 관련된 영화 두편을 소개한다. 케빈 맥도널드 감독의 <모리타니안>(지난 3월 개봉)은 9·11 테러 용의자로 지목돼 기소는 물론 재판도 없이 6년째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된 아프리카 모리타니공화국 출신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정부를 대리해 이 남자를 기소하는 군검찰 스투 코우치로, 조디 포스터가 이에 맞선 인권 변호사 낸시 홀랜더로 열연했다. 9·11 테러로 동료를 잃은 스투가 “어떻게 테러 용의자의 변호를 맡을 수 있냐”고 묻자 낸시가 말한다. “난 그를 변호할 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법도 변호하는 거예요.” 오바마 행정부에서 벌어진 관타나모 수용소의 인권유린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작품으로, 견제받지 않는 국가는 결국 괴물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메리카 스나이퍼> 스틸컷.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모리타니안>이 외부자에게 가한 미국의 국가폭력을 의미한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아메리칸 스나이퍼>(2015)는 테러와의 전쟁에 참전한 미국인의 트라우마를 응시한다. 전설적인 스나이퍼인 크리스 카일(브래들리 쿠퍼)은 5일 동안의 신혼 생활을 뒤로하고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전장인 이라크로 향한다. 그리워하던 가족 곁으로 돌아오지만, 전황 소식에 괴로워하다 결국 이라크로 되돌아간다. 앞서 <아버지의 깃발>(2007)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국내 미개봉)를 통해 국가주의와 전쟁의 광기를 비판한 바 있는 감독은, 이 작품에서도 인간을 황폐화시키는 전쟁의 본질을 폭로한다. 간결하고 매끄러운 연출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크리스 카일의 동명 회고록이 원작이다.

<골드> 스틸컷. 조이앤시네마 제공

황금만능주의와 인종차별이라는 미국 사회의 치부를 드러낸 두편의 실화영화도 있다. 스티븐 게이건 감독의 <골드>(2017)는 인생역전의 한방을 노리고 금광을 찾는 한 남자의 드라마틱한 삶을 다룬다. 주변의 비웃음에도 케니(매슈 매커너헤이)는 지질학자와 함께 인도네시아 정글로 금광을 찾아 떠난다. 모든 상황이 절망적일 때 발견된 금광. 성취감에 취한 케니는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벼락부자에서 벼락거지로 전락한다.

<버든:세상을 바꾸는 힘> 스틸컷. 101스튜디오스 제공

앤드루 헤클러 감독의 <버든: 세상을 바꾸는 힘>(2020)은 백인우월주의단체인 케이케이케이(KKK)단의 일원이었던 주인공 마이크 버든(개릿 헤들런드)이 주디(앤드리아 라이즈버러)와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변모해가는 과정을 담은 감동적인 영화다. 주디의 권유로 단체에서 탈퇴한 버든은 옛 동지들로부터 복수를 당해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런 그를 돕는 것은 단체에 저항해온 흑인 목사 케네디(포리스트 휘터커). 가난한 백인으로 자라 흑인을 혐오하는 일 말고는 달리 배운 게 없던 버든에게 놀라운 변화가 시작된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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