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난 '조금 특별한' 선생님이었을 뿐

한겨레 2021. 6. 5.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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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토요판]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
32. *당신 곁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뻔뻔스럽게 잘 살아왔는데
새로 일자리 구하려 할 때
'남성이었던 사람' 드러내자
휘청이며 절망 곱씹게 돼
십년 일했던 전 직장 동료들
유독 나를 따르던 학생들
주변의 뒤틀린 말들 속에서
우뚝 선 어른들, 지금도 감사해
2019년 김비 작가가 부산 중앙동의 공간 ‘회복하는 생활’에서 소설 쓰기 수업을 하는 모습. 김비 제공

7년 전 아는 사람이라곤 오직 한 사람뿐이었던 도시에서, 나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여러 차례 면접을 봤다. 이력서에 호적 정정 사실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내가 써온 책들과, 진행한 강연들, 그리고 ‘트랜스젠더’라는 단어가 들어간 제목의 책까지 모두 빠짐없이 적어 넣었다. 굳이 밝힐 필요 없는 개인적 영역이긴 했지만, 나는 내가 ‘남성’으로 기록되었던 사람이란 사실을 굳이 감추고 싶지는 않았다.

나 자신을 감추고 사는 삶이 지긋지긋하기도 했지만, 트랜스젠더는 어디에든 있고 성소수자의 삶은 결코 누구에게도 부끄러울 필요 없다는 믿음의 표현이자 최소한의 개인적 운동이기도 했다. 동시에, 어디에든 한 사람을 순수하게 존중할 수 있는 시민들이 존재하리란 믿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자리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경력이 십년을 훨씬 넘겼고 지원한 일자리가 일반 강사 자리였음에도 그랬다. 일단 면접을 보러 오라는 곳이 있어 ‘시범 강의’를 통해 강의 능력을 확인하고 채용까지 되었는데,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채용을 취소하는 일도 있었다. 무슨 일로 채용 취소가 된 거냐고 물어도 개인적인 사생활 운운하며 답변하지 않은 채, 나오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다.

분노와 억울함과 부당함에 관한 불편한 감정들이 머릿속에 뒤엉켰다. 낙담은 당연했지만, 낙담을 다시 한번 내던지는 일은 하지 않았다. 한번이면 족한 절망을 다시 곱씹으면서 인간이 얼마나 피폐해질 수 있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좋은 일이란 끝도 없이 곱씹으며 감사해도 좋지만, 나쁜 일은 어서 빨리 끊어내고 다시 또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일.

선명한 ‘정신승리’를 위하여

그날 하루 나는 다른 속도로 호흡을 하고 골목을 걷고 늘어진 나뭇가지들을 올려다보면서 부대낀 마음을 다독였다. 그럴 때면 몽롱하기만 한 희망적인 말이나 생각보다, 오히려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문장이 쓸모있었다. ‘뭐, 다들 그런 거지.’ ‘어차피 인연도 없었던 사람들 때문에 나 스스로를 망가뜨릴 필요는 없는 일이지.’ 나는 제일 유치하고 그래서 더 선명한 ‘정신승리’를 위한 말들을 곱씹으며 골목을 여러 바퀴 돌았다. 돌고 또 돌며 사진도 찍었다. 의미가 없이 거기에 있는 듯하면서도, 또한 다른 의미를 지닌 것 같은 골목의 풍경에 나를 비추었다. 아무도 돌아봐주지 않지만, 여전히 거기에서 나름의 존재로 빛나는 그것들을 사진 속에 담았다.

다시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면서 또 몇달이 지났다. 그렇게 또 다른 학원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부부가 운영하는 학원의 첫인상은 참 좋았고, 두 분 모두 반갑게 나를 맞이해주셨다. 동료들도 학생들까지도 어쩐지 다정한 느낌이었다. 그중에 몇몇 아이들은 유독 나를 따랐는데, 내 책을 읽은 분들의 자녀인지 어쩐지 나를 아는 눈치였다. 나는 더 진심을 다해 아이들을 대했고, 기대가 어긋나지 않도록 애썼다.

2004년 영어 강사로 일하던 전 직장 학원에서의 김비 작가 모습. 김비 제공

하지만 나에 관한 소문이 퍼졌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공교롭게도 학원생들이 줄고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나는 그곳에서 역시 더 이상 일을 계속할 수 없었다.

마지막 수업을 마무리하고 퇴사하던 날, 나는 부부 중 아내였던 부원장님께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부원장님은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우리도 같이하고 싶었는데 아쉽고 미안하다며 섭섭해했는데, 나는 별것 아닌 그 응답이 참 고마웠다. 퀴어인 우리들은 얼마나 여러 번 불필요한 일상 검증을 통과해야 하는 걸까? 모호하고 흐릿한 짐작만으로 진실이 되어버린 믿음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도대체 무얼까?

나는 꽤 크게 휘청거렸고, 한동안 다른 곳에 이력서를 넣지 못했다. 마흔을 훌쩍 넘은 나이인데도, 성소수자로 뻔뻔스럽게 잘 살아오며 강단이 생겼다고 믿었던 나였는데도 그랬다.

어차피 다른 곳에 이력서를 넣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눈을 뜰 때마다 회의감과 무력감이 뒤엉켜 나를 짓눌렀다. 그럴 때마다 별것 아닌 그 무게를 이겨내기 쉽지 않았다. 다시 그저 또 한번의 낙담이면 족할 일인데, 골목을 돌고 나뭇가지를 올려다보고 뻔한 정신승리를 머릿속으로 되뇌면 그뿐인데, 아무리 돌고 돌아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현실은 떨쳐내기 쉽지 않았다. 문밖에는 온통 나를 떠밀기 위한 손들뿐인 것만 같았다. 신랑이라도 곁에 없었다면 아마 나는 그 위기를 견뎌내기 쉽지 않았을 일이었다.

함께 축하해준 나의 전 동료들

그러나 나는 성소수자인 나를 지켜주던 또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처음 강사 생활을 시작한 직장에서, 나는 십년 넘게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주민번호 숫자 하나가 달라지는 문제이긴 했지만) 같은 직장에 들어갈 때에는 남자였고 나올 때에는 여자였는데, 나의 직장생활에는 조금의 불편함도 없었고 그만큼 행복했고 즐거웠다. 물론 서류상의 기록이 바뀌었을 뿐, 내 겉모습이 크게 변한 건 아니었다. 성 확정 수술을 하고 다시 직장에 돌아갔을 때, ‘왜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 묻던 직장 동료의 동그래진 눈을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그럼 뭐가 변해? 바지라도 벗어서 보여줄까?’ 하고 반문하던 나와 함께 모두 크게 웃던 그 웃음소리도.

수술을 받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찾아온 부모님들도 계셨다. 아이와 함께 찾아와 축하의 말들을 전해주셨다. 물론 너무 어린 아이들에게는 ‘치질 수술’(?)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사춘기 아이들이 나로 인해 혼란을 겪거나 힘겨워하는 일은 없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조금은 무서운 선생님이었고, 부모님들에게는 아이에 관해 깊은 이야기를 같이 나눌 수 있는 이웃이 되었으리라, 그렇게 되기를 바랐고 그렇게 믿고 있는데 그러한 나의 믿음이 틀린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나는 조금 특별한 선생님이었고, 직장을 그만둘 때 역시 조금 특별한 선생님이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고맙게도 특별한 사람으로 환대받으며 직장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돌아보면, 그때 나에게 아이를 맡겼던 부모님들의 마음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이제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를, 막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를 ‘특별한’ 선생님에게 맡기면서 얼마나 많은 불안과 의심이 싹텄을지, 또한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불신의 말들이 그들을 흔들었을지.

그러나 부모님들은 직접 나를 보고, 나를 만나고, 나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 의심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렸을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 그런 사람한테 아이를…’ 주변의 왜곡되고 뒤틀린 말들을 바로잡으며 우뚝 선 어른들이었으리라. 나는 지금에서야 추억처럼 그분들께 감사를 전한다. 모두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지내고 계실까, 다들 건강은 괜찮으실까, 그때처럼 다 자란 아이들 이야기, 늙어가는 이야기 같이 나누며 인사드릴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고, 멀리서만 반가운 꿈을 꾼다.

여전히 각오가 필요한 직장생활

성소수자에게 직장생활이 어려우리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다만 조금 어색하고 낯설 뿐 그마저도 하루 이틀 일주일 내에 허물어지고 말 일이다. 함께 일하는 사람의 조건이란 결국 그 사람 자체에 있다는 걸 우리 사회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뛰어난 지식과 학식이 빛을 발하는 분야도 있겠지만, 대부분 일상의 영역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이란 ‘일상을 함께하는 사람’이란 의미와 다르지 않다. 애쓰는 동료가 보이고 진심 어린 마음이 보이면 함께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 인지상정. 같이 일해보니 그 사람의 학벌이나 환경적 조건이 별 의미 없는 것처럼 성별이나 성정체성 역시 넘어서면 그뿐, 같이 하는 일에 몰두하는 서로라면 충분한 일이다.

내 경우라면 나를 환대해준 그 마음들이 참 고마워 더욱 진심을 다하고 애를 쓸 수 있었으니 한 학원에서 십년 넘게 일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착취하고 착취당하는 관계가 아니라면, 존중하는 관계 속에서 성소수자의 존재는 오히려 성숙한 직업 현장을 증명하는 가늠자가 되는 일이 아닐지.

좋은 일이란 끝도 없이 곱씹으며 감사해도 좋지만, 나쁜 일은 어서 빨리 끊어내고 다시 또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일. 사진 유지

그럼에도 성소수자의 직장생활은 여전히 각오가 필요하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다면, 오고 가는 일상의 대화 속에 피로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사생활 침해와 다름없는 질문이나 폭력이 ‘관심’이나 ‘걱정’으로 치환되는 분위기 속에, 성소수자는 항상 과묵한 사람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단순히 침묵을 지키는 존재로 남겨질 수 있는 분위기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불편하지 않은 직장생활을 위해 억지로 자신을 감추고 억누르며 매일의 생활을 이어가야 한다면 이는 또 다른 의미의 억압이고 불평등이다.

‘사생활입니다, 그런 질문은 삼가주세요’라는 응답이 어떤 불이익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분위기라면 좋으련만, ‘공동체’라는 우리의 인식은 과도하게 자의적이다. 함께 존중받는 의미의 가족이 아닌, 사랑이란 이름으로 서로를 착취하는 ‘낡은 가족주의’는 이 사회 어디에나 깊이 뿌리박혀 있다. 지난 시대의 성장을 발판 삼아 여전히 그 ‘정상성’을 유지한 채다.

성소수자로서 나는 그러한 불평등을 넘어서는 품 넓은 시민들의 힘을 목격하기도 했지만, 시민사회의 성숙함이 법제도와 사회제도의 수정을 미뤄도 괜찮다는 보장일 리 없다. 이는 오히려 이 사회의 성숙함을 증명할 기회가 아닐까? 이미 우리 곁에 존재하는, ‘존중’의 의미를 실천하는 시민들, 성숙한 사회 구성원으로 우리 곁에 함께하는 무수히 많은 시민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소중한 기회 말이다.

‘참 멋진 동료였다’ 믿는다

하지만 직장에서, 가까운 주변에서 여전히 성소수자의 존재는 지워진 채다. 한 사람의 성 확정 치료가 한 인간의 능력 상실로 치환되어버리는 현실에서, 스스로 일궈낸 시민사회의 성숙함마저 흔들리는 것만 같다. 이제는 고인이 되어버린 변희수 하사의 군 동료들이 보여준 지지와 응원이 그렇게 단박에 훼손되어도 괜찮은 일인가? 더 이상 우리 곁에 존재하지 않는 그 역시 안타까워하고, 미안해하고, 마음 아플 일이 아닐까?

나는 성소수자의 진정한 동료였던 그들이 상처 입지 않기를 바란다. 이 나라의 자랑스러운 군인이며 뜨거운 동료애를 보여준 그들이 흔들리지 않고 다시 또 성소수자 동료들을 반갑게 맞이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참으로 멋진 동료였다’고 그 역시 하늘 위에서 회상하고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작년 여름, 학원에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가르쳤던 학생이 멋진 짝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코로나 때문에 결혼식에 초대하기는 쉽지 않지만, 알려드리고 싶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나는 약간의 축의금을 보냈고, 뭘 이렇게 많이 보내셨냐고 답장이 왔다. 큰돈은 아니었다. 나는 능력만 된다면 너희에게 집이라도 지어주고 싶다고 답장했다. 부풀린 말이긴 했지만, 그만큼 크고 깊은 내 진심을 전하고픈 마음이었다.

그는 다시 또 최선을 다해 잘 살겠다고 답해왔다. 최선을 다해 살아갈 때가 가장 행복한 것 같다고 다시 한번 적었다. 선생님께도 좋은 일 생기면 꼭 연락 달라고 했는데, 이미 좋은 일이 너무 많이 생겼다. 모든 것이 너희들 덕분이고, 너희 부모님들 덕분이다. 나는 ‘그래, 우리 다 같이 최선을 다해 살자’고 답하며,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 소제목은 르포 작가 희정의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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