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버스 타고 한옥에 체크인.. 기와 지붕 아래 고즈넉한 서울이 펼쳐졌다

남정미 기자 2021. 6. 5.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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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뉴타운서 즐기는 전통, 은평 한옥 마을
서울 은평구 진관동 일대를 재개발해 들어선 은평 한옥 마을은 2015년 본격 입주를 시작한 ‘신(新)한옥마을’이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북한산이 아직 잠에서 덜 깬 걸까. 지난달 30일 오전, 시내버스 7211번을 타고 도착한 서울 ‘은평 한옥 마을’에선 맹꽁이가 ‘맹~맹~’ 울었다. 서울에서 듣는 양서류 울음소리도 낯설거니와, 흔히 듣던 개구리 울음소리가 아니어서 적잖이 당황했다. 솔직히 처음엔 두꺼비를 의심했다. ‘맹꽁이’란 말이 답답한 사람 놀릴 때나 쓰는 줄 알았지, 이렇게 맹렬하게 울어대는 동물일 줄이야.

북한산 자락 아래 한옥 150여 채가 모인 은평 한옥 마을은 서울의 ‘치트키’ 같은 곳이다. 컴퓨터 게임에서 ‘치트키’를 쓰면 어려운 상황이 부정 행위 수준으로 강력하게 해결되듯, 굳이 지방까지 가거나 연차 내지 않아도 퇴근길 버스 타고 가볍게 들러 한옥 마을을 맘껏 누릴 수 있다. 2012년 서울 은평구 진관동 일대 6만5500㎡를 재개발해 만들었는데, 2015년부터 본격적인 입주가 시작됐다. 최근엔 게스트 하우스나 유명 카페들이 생겨 외부인도 많이 찾는다.

한옥 스테이가 가능한 ‘응정헌’의 2층 공간./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한옥 마을에 다다랐음은 눈이 먼저 안다. 고층 빌딩과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선 서울에서 이렇게 낮은 고도의 풍경을 본 일이 있었던가. 아파트와 빌딩이 양보한 자리엔 북한산이 보름달처럼 꽉 차게 들어섰다. 그저 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그렇게 담대해질 수 있다는 걸 나는 이날 알았다. 어쩌면 우리가 이렇게 아등바등 작은 마음으로 사는 건 산을 못 보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한옥은 산을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주거 공간이다. 키 자랑을 하지 않는 한옥은 결코 다른 가옥의 시야를 가로막거나, 다른 이의 시선을 허투루 뺏는 일이 없다. 태생이 흙과 나무인 탓에 주변 경관과도 자연스레 어우러진다. 바람이 불면 풍경 소리와 함께 찔레꽃 향기를 실어 가만히 앞마당에 내려놓는다. 배우 윤여정이 안주인으로 나섰던 한옥 체험 리얼리티 프로그램 ‘윤스테이’가 부러웠다면, 멀리 가지 말고 이 치트키를 쓰길 바란다.

◇은평과 한옥과 미술과 문학

은평 한옥 마을 초입에 있는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은 이곳의 터줏대감 같은 곳이다. 은평과 한옥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자랑한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은평 한옥마을 여행은 은평역사한옥박물관(02-351-8524)에서 시작하길 권한다. 이름 그대로 ‘은평’과 ‘한옥’의 역사에 대한 방대한 자료가 집약돼 있는, 은평 한옥마을의 모체에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주차 시설이 그리 여유롭지 않은 한옥 마을에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주차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2시간 이하 30분당 500원, 관람객에 한해 30분 무료).

2층 은평역사실에서는 은평구가 조선 제1대로인 의주대로의 첫 번째 길목이었던 시절부터, 은평뉴타운 개발 당시의 발굴 유물까지 세세하게 훑을 수 있다. 3층 한옥전시실은 나무 모형을 이용한 한옥 만들기 체험, 재활용 상자를 활용한 살고 싶은 집 만들기 등 체험형 전시가 많아 저학년 자녀들이 와서 즐기기 좋다.

오는 9월 26일까지 이곳에서 진행되는 강홍구 작가의 특별 사진전 ‘집 꽃 마을’도 눈여겨볼 만하다. 중견 사진작가 강홍구는 2001년 그린벨트 지역으로 묶여 있던 시절의 진관동부터 재개발을 거쳐 신도시로 변모한 은평 뉴타운까지, 이 일대를 20년간 성실하게 기록해왔다. 전시는 ‘내 집 뜰에서 십수 년 머문 해당화와,/ 삼년을 먹고 짖던 잡종견이 자신들을 버리고/ 우리 갈 줄 아는 듯하였다’는 재개발의 풍경을 담은 이유경의 시 ‘해당화와 개’와 만나 더욱 확장된다. 관람료는 일반 1000원, 초·중·고·대학생·군인 500원이다.

‘셋이서 문학관’ 속 중광 스님의 글과 그림을 모아놓은 곳.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한옥과 문학을 떨어뜨려 생각할 수 있을까. 셋이서 문학관(02-355-5800·입장료 무료)은 천상병·중광·이외수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세 작가의 시와 그림을 담은 시화집 ‘도적놈 셋이서’에서 이름을 따왔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생을 노래한 천상병의 ‘귀천' 등 작가들의 대표작과 직접 쓴 원고지, 집기가 전시돼 있다. 문학관에서는 시와 수필, 소설 등을 쓰는 ‘나만의 문집 만들기’ 프로그램도 운영하는데, 최근엔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으로 수업한다.

삼각산 금암미술관은 한옥과 미술의 만남이 얼마나 근사한지를 잘 보여주는 공간이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문학관 옆에 자리한 삼각산 금암 미술관(02-351-4343·입장료 무료)은 한옥이 미술과 만나면 얼마나 운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공간이다. 다만 오는 6월 30일까지 새 전시 준비를 위해 약 한 달간 휴관한다. 이후 7월 1일부터 14일까지 ‘백두대간 사진전’을, 7월 20일부터 10월 3일까지 ‘한지에 빛을 담다’ 기획전을 진행한다.

◇독립운동 근거지 ‘진관사’와 백초월길

한옥 마을 인근 진관사에는 전통 차를 맛볼 수 있는 연지원이 있다. 진관사를 오르느라 가빴던 숨을 잠시 고르기 좋다./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은평 한옥 마을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한 곳이 인근에 있는 절 진관사(02-359-8410)와 백초월 길이다. 2009년 5월 26일, 진관사 칠성각을 보수하던 현장에서 한지로 둘둘 말린 뭉치 하나가 발견됐다. 풀어보니 일장기 위에 태극과 4괘를 덮어 그린, 귀퉁이가 불에 타고 군데군데 얼룩진 태극기가 있었다. ‘신대한’ ‘조선독립신문’ ‘독립신문’ 등 항일 인쇄물도 함께 나왔다.

학계와 불교계는 이를 보관해 둔 사람이 일제강점기 시절 진관사에서 수행하던 백초월 스님(1878~1944)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백초월 스님은 만해·용성 스님 같은 불교계 항일 인사의 독립운동 활동을 지원했으며, 임시정부와 연락망을 만들어 독립군을 위한 군자금을 마련하고 전달했다. 독립운동 자금 문제로 투옥돼 수감생활을 하다, 1944년 6월 29일 청주교도소에서 순국했다. 진관사는 백초월 스님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진관사 입구 교차로부터 진관사까지 약 1㎞ 구간을 ‘백초월 길’이라 이름 붙였다. 지난해 10월 별세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49재도 진관사에서 지냈다.

굳이 이런 배경이 아니더라도 절을 병풍처럼 둘러싼 북한산 바위봉우리, 풍채 좋은 노송, 여름이면 시원하게 내려치는 계곡 물소리가 이 길을 걸어야 할 이유를 더한다. ‘진관사 계곡’은 서울에 몇 안 되는 도심 계곡이기도 하다.

진관사에 있는 연지원을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진관사를 오르느라 가빴던 숨은 사찰 내 전통찻집 연지원에서 가다듬을 수 있다. 쌍화차·대추차(각 6000원) 등 전통 차는 물론이고 여름에는 미숫가루(5000원), 팥빙수(8000원)도 맛볼 수 있다. 처마 아래 진관사 계곡을 바라보며 먹는 팥빙수의 시원함은 어떤 에어컨도 흉내 내지 못할 것이다.

진관사 연지원에서 맛볼 수 있는 팥빙수와 오미자차./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한옥을 파노라마 뷰로 즐기는 식당

한옥 마을 내 한옥 대다수는 주민이 실제 사는 주거지다. 이 마을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고즈넉한 한옥 분위기를 느끼기엔 좋지만, 길거리 간식이나 한복 대여점 등 상업시설은 부족한 편이다.

식당 ‘1인 1상’에 전시된 목공예가 양병용 작가의 소반./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한옥 마을 초입에 자리한 식당 1인 1상(02-357-1111)과 카페 1인 1잔은 이런 아쉬움 속에 일당백(一當百)을 하는 곳이다. 5층짜리 건물 전체를 식당과 카페로 운영하는데, 매 층의 인테리어가 매우 감각적이다. 3층 카페에는 일본의 목재 가구 브랜드인 가리모쿠가, 4층 식당에서는 목공예가 양병용 작가의 소반이 전시돼 있다. 층마다 낸 통유리창에선 파노라마 뷰로 한옥마을 전경을 즐길 수 있다. 그중에서도 옥상정원으로 운영되는 루프탑에서 내려보는 뷰가 단연 압도적이다. 북한산 아래 푸르게 빛나는 한옥 기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잠시 시곗바늘이 거꾸로 감긴 듯하다.

식당 ‘1인 1상'에서는 소반 위에 정갈한 양식 한 상을 내온다./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1인 1상에서는 ‘관자를 올린 새우 호박 사프란 리소토’(2만5000원) 등 소반 위에 내오는 정갈한 양식 한상을 맛볼 수 있다. 테이블에 앉아서 소반을 즐길 수 있도록 식탁 크기를 다른 곳보다 낮춰서 주문 제작했다. 1인 1잔 카페에서는 커피와 함께 두텁떡(5500원)등 전통 디저트를 내온다.

인근의 북한산 제빵소(02-352-3548)는 최근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의 MSG 워너비 편을 촬영한 곳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한옥이 아주 잘 보이는 뷰는 아니지만, 바로 앞에 숲이 조성돼 있어 시원한 경관을 자랑한다. 콩고물앙버터빵, 공주통밤식빵 등 창의적인 빵 메뉴가 많다.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나오는 길, 드디어 맹꽁이 울음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냈다. 마을 가운데에 조성된 은평 한옥마을 생물 다양성 습지다. 북방산 개구리, 도롱뇽을 비롯해 멸종위기 야생동식물(2급)로 지정된 맹꽁이가 집단 서식한다는 팻말이 섰다. 습지를 따라 나무 덱길을 걷는데, 역시나 맹꽁이가 맹렬하게 운다. 그 소리에 맞춰 습지에 뿌리를 박은 여름 풀들이 춤을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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