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일본군 軍馬 위령비가 ‘조선 왕실 제단’이라는 용산공원

박종인 선임기자 2021. 6. 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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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260. 용산공원 역사 왜곡 대행진

지난 5월 ‘광화문광장 100년 이야기’ 시리즈를 통해 왜곡된 역사관을 토대로 진행되는 무모한 국가 토목 사업에 대해 이야기했다. ‘역사 복원’이라는 거창한 명분으로 많은 논쟁을 덮어버리고 세금과 시간을 들여 엉뚱한 역사를 창작하는 작업에 대한 이야기였다. 오늘은 그 번외편, 미국으로부터 반납받은 ‘용산공원’에 얽힌 이야기다. ‘왜곡된 근대사와 군사시설로 절단됐던 생태축 및 역사 복원’이 공원 프로젝트 주요 명분이다. 제대로 하고 있는가.

왕실이 천제(天祭)를 올리던 ‘남단’

국토교통부 산하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 홈페이지(www.park.go.kr)에는 ‘용산공원 10경’이라는 슬라이드가 게시돼 있다. 이 가운데 제10경은 조선 시대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남단(南壇·풍운뇌우단)’이다. 이 ‘남단’은 미군기지 북쪽 캠프코이너 구릉지대에 있다. 얕은 구릉 끝 쪽에 화강암을 깎은 두 기둥이, 그 사이에 자연석이 앉아 있다. 기둥 바깥으로 철 난간이 보인다. 앞에는 ‘훼손 금지’라는 영문 안내판이 서 있다. 2005년 문화재청장 유홍준과 사적분과위원들이 공식 현장 조사를 통해 내린 결론이었다. 아래 두 사진이 그 풍경을 담고 있다. 각각 2016년과 2019년 촬영한 사진이다.

2005년 문화재청이 ‘조선 왕실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남단 흔적’이라고 발표한 용산공원 부지 석물. 그런데 이 석물들은 남단이 아니라 1941년 이곳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야포병연대의 군마(軍馬) 위령비 부속물들이다. 사진 앞쪽 기단에 박혀 있는 철 난간 또한 위령비 흔적이다. 미군 캠프코이너 부지 북쪽에 있다. /박종인
2005년 문화재청이 ‘조선 왕실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남단 흔적’이라고 발표한 용산공원 부지 석물. 실제는 1941년 이곳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야포병연대의 군마(軍馬) 위령비 기단이다. 일본식 축성방식으로 쌓은 기단 모서리가 명확하다./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 김천수

2005년 문화재청 조사 과정에서 이 터가 발견되면서 1897년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서울 소공동에 원구단을 세우기 전 조선 왕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의 실체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문화재청은 이곳을 문화재로 가지정했고, 남단 터 북서쪽 주한 미국 대사관 부지는 남단 터만큼 축소됐다. 국토교통부가 내놓은 공원 설계도에는 이 남단으로 진입하는 작은 출입구가 있는데, 출입구 이름 또한 ‘남단 출입구’다. 이제 사실인지 보자.

문화재청이 ‘남단 유구'라고 주장하는 석물의 정체. 1941년 일본군 제26야포연대가 만든 군마(軍馬) 위령탑이다. ‘愛馬之碑(애마지비)’라고 새긴 비석 몸통이 자연석에 꽂혀 있다. 비석 주위에는 철 난간을 둘러놓았다. 비석을 꽂았던 돌도, 철 난간도, 일본식 돌기단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1940년대 사진엽서 아래에는 馬魂碑 朝鮮第26部隊(마혼비 조선 제26부대)’라고 인쇄돼 있다. 일본군 야포병연대가 포를 운반할 때 동원했다가 죽은 군용 말들을 위해 만든 추모비라는 뜻이다.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 김천수

日 군마(軍馬) 추모비가 조선 왕실 제단?

2005년 현장 조사에 참가했던 당시 문화재청장 유홍준(용산공원조성추진위원회 민간공동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남단 위치가) 거기예요. 그것이 있는가, 없는가 봤더니 있어요. 남단이 있는 게 아니라, 주춧돌과 위에 흐트러져 있는 게 이 자리다, 하는 사이트는 정확하게 짚을 수 있고. 그 남단의 의미는 굉장히 크고….”(2020년 1월 7일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인터뷰)

결론부터 말하자. 문화재청이 현장 조사와 문헌 조사를 통해 확정해놓은 ‘조선 왕실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남단(南壇)’은 조선과 무관하고 제단과도 상관없는 ‘일본군 군용마 비석'이다.

위 큰 사진이 1941년 이 캠프코이너 부지에 주둔하던 일본군 제26야포병연대가 세운 그 비석이다. 비석에는 ‘愛馬之碑(애마지비)’라고 새겨져 있고 그 아래 자연석, 그 아래 일본 전통 축성 방식으로 쌓은 기단, 기단 위로 철 난간이 보인다. 이 사진은 용산문화원 연구실장 김천수가 발굴해낸 당시 사진 엽서다. 엽서 오른쪽 아래에는 ‘馬魂碑 朝鮮第26部隊(마혼비 조선 제26부대)’라고 인쇄돼 있다. 일본군 야포병연대가 포를 운반할 때 동원했다가 죽은 군용 말들을 위해 만든 추모비라는 뜻이다.

이제 세 사진을 비교해보라. 촬영 시기는 1941년, 2016년, 2019년. 80년 세월이 흘렀지만 촬영된 장소와 피사체는 동일하다. 왼쪽 위 사진에는 비석을 꽂았던 자연석과 기단에 설치한 철 난간이 보인다. 왼쪽 아래 사진에는 1941년 사진 엽서에 보이는 일본식 기단이 명확하게 보인다. 모서리 각도는 흔한 일본식 축성 방식과 동일하다.

1953년 8월 5일 미군 정찰대가 촬영한 용산기지. 용산고등학교로 가는 현 두텁바위로 옆으로 복개되지 않은 후암천이 보인다. 문화재청이 ‘남단 터’로 발표한 자리(동그라미 표시)에는 계단 좌우로 원형 및 사각형 구조물 윤곽이 보인다. /미국국립기록관리청(NARA)

미군 정찰기가 촬영한 군마비

문화재청장 유홍준과 사적분과위원들이 본 주춧돌은 이 일본군 말 비석 지지석이다. 외형부터 주춧돌과 다르다. 조선 시대 목조 건물 주춧돌과 전혀 형식이 다른, 일본군 작품이다. ‘세종실록'에는 남단 풍운뇌우단 규모가 ‘사방 2장 3척에 높이 2척 7촌’이라고 기록돼 있다.(‘세종실록’ 128권 ‘오례‧단유(壇壝)’) 가로, 세로 각 7m에 높이 80㎝짜리 ‘제단’이다. 토지신과 곡식신 제단인 사직단보다 조금 작다. 두 제단 모두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워야 하는 ‘건물’이 아니라 벽과 지붕이 존재하지 않는 ‘제단’이다.

6·25 전쟁 종료 직후인 1953년 8월 5일 미군이 촬영한 항공사진에도 마혼비가 보인다.(위 동그라미 사진) 얕고 좁은 구릉에 계단이 나 있고 구릉 위 왼쪽에는 원형 구조물이, 오른쪽에는 사각형 구조물 윤곽이 나타나 있다. 당시 또 다른 사진 엽서에는 이들 구조물을 건설하던 무렵 공사 현장도 촬영돼 있다. 사진은 많은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또 문화재청이 ‘남단 유구(遺構)’라 한 비석 기단 잔재 옆에는 기다란 화강암 하나가 누워 있는데, 그 형태는 마혼비 비석 자체와 유사하다. “조심스럽지만, 그 돌을 뒤집으면 실체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용산문화원 연구실장 김천수)

2005년 이후 문화재청은 미군기지 내에 있는 이 구조물에 대해 추가 조사를 하지 못했다. 이후 ‘일본군 말 비석’은 ‘조선 왕실 천제단 유구’로 확정됐다. 대한민국 문화재청이 이를 조선 왕실 천제단이라 하고 보존과 복원을 궁리 중이다. 국토교통부는 ‘용산 10경’에 선정했다. 코미디 같은데 웃을 수가 없다.

1860년대 김정호가 그린 ‘경조오부도’. 남단은 남산 방향인 후암천 북쪽에 표시돼 있다. 지금 삼광초등학교 부근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이 추정한 현 남단 터는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위치와 거리가 멀다.

여기가 남단 터라고?

현존하는 각종 서울 고지도에는 남단 위치가 어김없이 표기돼 있다. 실측도가 아니기에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물길’과 ‘산줄기’를 찾아보면 대략적인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1860년대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 부속 ‘경조오부도’도 마찬가지다. 위 사진이 경조오부도다(위 항공사진과 비교하기 위해 왼쪽으로 90도 눕혀놓았다).

지도에는 ‘남단’이 현 후암천과 남산 사이에 표시돼 있다. 그리고 당시 역참이었던 청파역에서 동쪽이다. ‘풍운뇌우단은 남교(南郊) 청파역동(靑坡驛洞) 송림 사이에 있는데 남단(南壇)이라고 부른다. 남향(南向)이다.’(1486년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도에 표기된 남단(하얀 동그라미)은 현재 후암천 북쪽에 있다. 후암천은 1962년 복개돼 남영동에서 용산고등학교로 향한 도로로 변했다. 용산기지 외곽이다. 문화재청이 남단이라고 확정한 용산공원 내 남단 터는 아직 기지 내에 남아 있는 만초천 북쪽 산줄기 끝이다.

고지도가 아무리 부정확해도 물길 남과 북이 바뀔 수는 없다. 조사단이 고지도와 현장 지형 변화를 고려하지 못한 게 아닐까. 문화재청이 남단 위치를 조사한 2005년 당시에는 이미 후암천이 도로 아래 복개된 이후였다. 현 추정지는 오류일 확률이 높다.

‘용산중학교 동쪽에서 야포대 병영 뜰 북부에 이르는 작은 언덕 ‘남쪽’에 남단이 있었다. 언덕은 깎아서 평탄한 도로가 되었다.’(국역 ‘경성부사’ 1권, 총독부, 1934, p109) 남산에서 용산고등학교에 연결된 언덕은 지금 도로가 나 있다. 그 남쪽에 남단이 있었으니 복개된 후암천 북쪽, 현 삼광초등학교 자리일 확률이 크다.(히라키 마코토(平木實), ‘조선 후기의 원구단 제사에 관하여(2)’, 조선학보 157, 천리대 조선학회, 2005) 1936년도판 ‘경성부사’2권 873쪽에는 ‘야포병영 중앙운동장 남쪽 끝’이라고 돼 있다. 문헌에 대한 검증이 더 필요한데, 이 작업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대동여지도(1861)에 표시한 한북정맥과 용산공원 지역. 지도상 공원부지 내 유일한 산줄기인 둔지산 줄기는 지금도 남아 있다. 그리고 산경표에 나오는 '한북정맥'은 용산공원과 거리가 멀다./대동여지도=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여기에 백두대간 ‘생태축’이?

현 용산공원 설계자는 네덜란드 조경가 구즈와 이로재 대표인 한국 건축가 승효상이다. 승효상은 ‘대동여지도’를 근거로 ‘한북정맥’에서 이어지는 용산 생태축을 되살려 한강 건너까지 잇겠다고 했다.(2012년 ‘신동아’ 6월호 인터뷰) ‘용산은 한강과 연결해주면 백두산의 어떤 에콜로지컬 엑시스(생태학적 축)가 흘러 한강까지 이어지는 그 와중에 있는 공원이라는 관점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승효상, 2016년 11월 25일 ‘아드리안 구즈와 승효상 용산공원 특별대담회’)

‘대동여지도’에는 현 공원 부지에 산줄기가 딱 하나 표시돼 있다. ‘둔지산’이라 부르는 산줄기다. 그런데 ‘단절돼 있던 자연을 다시 잇는 작업’은 터무니없다. 둔지산은 여전히 공원 안에 남아 있으니까. 이 지역과 무관하게 서울 북쪽으로 흘러가는 ‘한북정맥’을 앞세운 ‘생태축 복원’ 주장도 터무니없다.

용산공원 부지에 산재해 있는 문인석. 옛 둔지미마을이 남긴 흔적들이다. 미군이 이 석물들에 자기네 미학에 맞춰 색을 칠해놓았다. 둔지미 마을은 1916년 일본군 병영 건설을 위해 강제 이주당했다. /박종인

복원할 역사, 사라진 둔지방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군은 대륙 진출을 위한 군용철도를 건설하는데, 그 정거장 위치가 현 신용산역이다. 철도역 주변과 군사기지를 중심으로 일본인 신시가지가 급속도로 건설됐다. 그 철도 동쪽에 건설한 군사기지를 일본군은 용산기지라고 불렀다.

용산공원 역사 설정을 주도한 유홍준은 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거기 있는 산을 용산이라고 그랬으니까. 용 용자에 뫼 산자로 해서.”(2020년 1월 7일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인터뷰)

유홍준이 말한 ‘거기’는 지금 용산공원 부지를 말한다. 사실이 아니다. ‘거기’에는 용산(龍山)이라는 산도 없었고 따라서 아무도 이곳을 용산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옛 용산은 서대문쪽 안산 줄기에서 한강 쪽으로 뻗어 있는 산줄기가 용을 닮아 붙은 이름이다. 지금 원효대로 좌우측 지역, 구체적으로는 숙명여대~효창동~공덕동~용문동~원효로2가 지역이 옛 용산이다. 조선 후기 공식 명칭은 ‘용산방’이었다.

현재 용산공원 부지 지역은 ‘둔지방(芚芝坊 혹은 屯之坊)’이었다. 용산방은 ‘용산’을 중심으로 한 마을이었고 둔지방은 이곳에 있는 ‘둔지산(屯之山)’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마을이었다. 둔지방에는 둔지미라는 마을이 있었다. 1906년과 1916년 일본군은 둔지미 주민을 보광동 일대로 강제이주시키고 병영을 건설했다.

공원 부지에는 각종 석물을 비롯한 둔지미 흔적이 남아 있다. 한성에서 남대문을 나와 한강으로 가던 옛 길도 남아 있다. 공원 설계도에는 둔지미와 이들 옛길에 대한 고려가 보이지 않는다. 서울시는 오히려 일본군과 총독부가 만든 ‘한강대로’를 ‘국가상징거리’로 조성할 계획이다.

어설픈 역사 복원의 재복원

100년 넘도록 외국이 점유했던 땅이었다. 그 땅에 얽힌 역사를 복원하려면 당연히 똑바로 해야 한다. 그런데 2005년 이후 제대로 된 조사 없이 구호만으로 거대한 공원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남단, 옛길, 둔지미 등 역사와 전통에 대한 관심과 고민 그리고 깊이 있는 생각이 없다는 게 문제가 아닐까 한다. 남단 터의 어설픈 확정도, 공원 명칭도. 역사를 진중하게 바라보려는 인식이 더 필요하다.”(용산문화원 연구실장 김천수) 여기까지 어설프게 시작해서 어설프게 진행 중인 용산공원 프로젝트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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