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쟁과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은거의 공간 내준 건 자연뿐이었나

글·사진 전남 광주·담양 | 김종목 기자 2021. 5. 26.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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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권 누정 풍경

[경향신문]

식영정에선 소나무와 한데 어우러진 광주호 풍경을 감상하기 좋다. 광주호 개발 때 이 식영정 부근 일대가 물에 잠겼다.
송순 87세에 회방연 열린 면앙정
무등산 ‘가사문학권’ 원류로 우뚝

대나무와 잡목이 섞인 숲에 들어앉은 정자로 다가갔다. 처마를 떠받치는 기둥과 기둥이 프레임을 이루며 풍경화를 만들어낸다. 들판 너머 가느다란 시내가 하나 흐른다. 영산강 지류 오례천이다. 기대승(1527~1572)은 이 공간 특성을 ‘탁 트임’과 ‘아늑함’으로 정리했다. 면앙정 건축 입지와 양식은 산수자연을 가까이하려는 사대부들 의지를 드러낸다.

심중량(1658~?)은 <면앙정가>에 “백이는 우러러 하늘을 보아 맑음을 얻어 자신의 뜻을 길렀고, 유하혜는 굽어 땅을 보아 순리를 얻었다”는 순자의 말을 적었다. ‘굽어보고( ) 우러러보는(仰)’ 것은 풍경 감상할 때도 적합하다. 지난 7일 면앙정이 있는 전남 담양군 봉산면 일대는 황사로 하늘이 짙었지만 말이다.

면앙정은 무등산권 누정(누각과 정자)의 대표다. 면앙정을 매개로 무등산권 유명 누정이 인물로, 사건으로 연결된다. 일대를 ‘가사문학권’ ‘호남시단’으로 부를 때 원류가 되는 누정이 면앙정이다.

면앙 송순(1493~1583)이 87세 되던 해 이곳에서 잔치가 열렸다. 과거 급제 60년을 경축하는 회방연(回榜宴)이다. 술기운이 거나해진 송순이 잠자리에 들려 하자 제자들이 직접 가마를 메고 면앙정에서 아래 마을로 데려갔다. 정조는 ‘면앙정에서 가마를 멘 일’을 호남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 시험에 어제(御題)로 내기로 했다.

애초 ‘죽록정’이었던 송강정에서
정철 ‘사미인곡’ ‘속미인곡’ 지어

스승을 가마에 태우자고 제창한 이가 송강 정철이다. 면앙정에서 4㎞ 떨어진 곳에 송강정(담양군 고서면)이 있다. 누정들 위치는 비슷하다. 산자락 끝 언덕배기에 둔다. 산과 들, 강의 풍경이 드러난다. 오르내리는 산길엔 돌계단을 낸다. 팔작지붕 건물 아래 편액이 눈에 들어와 읽었더니 ‘죽록정(竹綠亭)’이다. 애초 정철이 지은 이름이다. 후손이 송강정으로 바꿨다. 주변에 소나무도 심었다. 정철은 <사미인곡> 등을 이곳에서 지었다.

정철은 여전히 논쟁적인 인물이다. 지난 3월 담양의 송강고등학교가 개교했다. 정문에 학교 이름을 달진 못했다. 광산 이씨, 나주 나씨, 문화 류씨, 고성 정씨, 전주 이씨, 창녕 조씨 등 6개 문중 종친회장들이 기축옥사 때 호남 인재가 처형당한 일을 두고 당시 위관 직을 맡은 정철의 책임이라고 했다. 공립대안학교 명칭에 송강을 쓰지 말라는 요구였다. 기축옥사와 멸문지화 와중 살아남은 이발(1544~1590)의 후손들이 강경하다. 후손들이 제사 때 고기를 다지며 ‘철철철’ 중얼거린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정철에 비판적인 이들은 음주와 관기에 관한 기록도 거론한다. 정철 후손은 정철이 위관 직을 맡은 일이 없다며 명예훼손이라고 반박했다. 학계는 지금도 기축옥사 때 정철의 역할을 두고 논쟁한다. 송강고에 학교 이름 문제를 물으니 “계속 논의할 계획”이라는 짧은 답만 들었다.

무등산권 누정은 정철의 문학적 성취에 기대 있다. 송강정 앞 도로는 송강로다. 광주호를 따라 소쇄원을 거쳐 가는 길이 가사문학로다. 일대는 가사문학면이다.

식영정 마루에서 본 광주호.
식영정은 광주호 감상하기 적격
연결된 부용당, 연못 풍광 뛰어나

정철이 광주호 동남 끝쪽에 있는 식영정(息影亭). 일대 승경을 두고 쓴 게 <성산별곡>이다. 정철의 가사문학에 대한 찬양도 고조된다. 식영정 초입 ‘송강 정철 가사의 터’ 표지석 글은 다음과 같다. “위대한 시인은 종이가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 위에 시를 쓴다. 이곳 식영정 마루턱에 서면 바람도 옛 운율로 불고 냇물도 푸른 글씨가 되어 흐르나니 우리는 지금 풀 한 포기 흙 한 줌에서 송강의 가사 성산별곡을 온몸으로 읽는다.”

김신중 전남대 국문과 교수는 “식영정이 도가적 은일의 여유가 깃든 공간이라며, 송강정은 유가적 출처의 고뇌가 밴 공간”이라고 말한다.

지금 식영정은 임억령(1496~1568)이 <식영정기>를 내놓을 때 그것이 아니다. 이곳도 정철 후손이 새로 지었다. 이름은 장자 제물 편 ‘외영오적’의 “그림자를 끊으려면 그늘에 들어야지, 식영이면 그만인 것을”에서 뽑았다고 한다.

풍경 덕에 당쟁 같은 역사가 빚어낸 긴장감을 덜어낸다. 식영정과 연결된 부용당은 연못 덕에 더 뛰어난 풍광을 내놓는다. 건축물은 자연에 안기듯 은근하게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면앙정은 ‘호남 시단의 맹주’로 평가받는 송순이 42세 때 대사헌 직을 그만두고 온 뒤 세웠다. 87세 때 회방연이 열렸다. 누종은 공부도 하고, 술도 먹던 곳이다. 송순의 면앙정은 인물로, 사건으로 무등산권 다른 누정과 이어진다.
식영정 주변 부용당.

송순과 정철을 둘러싼 관계, 당쟁과 사화의 역사가 이어진다. 송순이 식영정과 소쇄원, 환벽당을 두고 일동삼물이라고 했다. 양산보(1503~1557)는 스승 조광조(1482~1520)가 사사당한 이후 소쇄원을 건립했다. 환벽당은 사촌 김윤제(1501~1572)가 을사사화 이후 귀향해 지었다. 김윤제가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집안이 화를 입은 정철을 거둬 외손녀와 결혼시켰다. 양산보는 김윤제의 매형이다. 김윤제의 제자가 식영정 주인 김성원이다.

식영정에서 광주시와 담양군 경계를 가르는 충효교를 지나면 환벽당이 나온다. 200m 떨어진 곳에 들어선 게 취가정이다. 의병장 김덕령(1567~1596)을 기리려 후손들이 만든 정자다. 다시 정철의 이름이 나온다. 정철 제자 석주 권필이 술에 취한 채 꿈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며 한 맺힌 노래를 부르는 김덕령을 달래려 화답의 시를 지었다는 내용이 안내판에 기록됐다. 김덕령을 기리는 또 다른 정자가 풍암정이다. 동생 김덕보가 세웠다. 둘째형 김덕령은 역모로 죽고, 큰형 김덕홍은 임진왜란 때 전사하고, 형수는 왜군에 살해당했다. 툭하면 죽고 죽임을 당하던, 삶과 죽음이 일상으로 교차하던 세상에서 자연 말고 기댈 데는 없는 듯도 하다.

송강정은 정철이 <사미인곡>을 지은 곳이다. 정철은 ‘죽록정’이라 이름 붙였다. 후손이 정자 주변에 소나무를 심었다. 담양이 중심인 가사문학권’은 송강의 문학적 성취에 의존한다. 한편으로 기축옥사 때 정철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이어진다.
김덕보는 큰 형 김덕홍, 둘째 형 김덕령의 죽음 이후 풍암정을 지어 은거의 삶을 추구한다. 풍암정 앞으론 원효계곡이 흐른다.
의병장 김덕령을 기리는 풍암정
은거·은둔의 공간 성격 잘 보여

무등산권 누정에서 가장 오래된 게 독수정(獨守亭)이다.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되고, 고려가 망한 뒤 전신민이 두문동에서 두 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은거하며 지은 곳이다. 독수정 이름은 이백의 “백이와 숙제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홀로 지절 지키며 서산에서 굶주렸는가”라는 글에서 따왔다. 독수정은 북향이다. 그는 송도(개성)를 바라보며 매일 절을 했다고 한다.

은거와 은둔의 누정 공간 특징은 풍암정에서도 나타난다. ‘단풍나무 우거진 벼랑’이라 ‘풍암’인데, 단풍나무 풍(楓)보다 바람 풍(風)자를 써도 좋을 법했다. 바람소리, 물소리가 한데 어우러지며 기막힌 소리를 냈다. 주변 풍암제는 원효계곡 물을 받으려 1973년 만든 것인데, 가을 단풍으로 유명하다. 풍암정과 풍암제를 잇는 길이 의병길이다. 이곳에서 광주 호수생태공원을 거쳐 환벽당에 이르는 길은 걷기에도 좋다.

충효동 도요지에서 풍암정 가는 길에 만난 풍경. 허수아비 너머는 무등산국립공원 자락이다.
풍암정과 풍암제, 광주생태공원을 둔 충효동 일대는 도보 여행하기 좋은 곳이다.

광주호는 인공호수다. 1970년대 광주 충효동, 담양군 고서면·가사문학면의 일부가 수몰됐다. 식영정 밑을 흐르던 창계도 수몰과 도로 확장으로 옛 모습을 잃었다. 지금 생태공원 초입에 천연기념물 제539호인 충효동 왕버들군은 수몰을 피해갔다. 임진왜란 뒤 김덕령을 기리려 심었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충효동 부근은 무돌길이 이어진다. 평촌 반디마을도 무돌길 코스 중 하나다. 동네 집들은 담벼락에 꽃화분을 내놓았다. 길 가던 이에게 “왜 이리 꽃이 많나? 담장은 왜 이리 낮나?”라고 물었더니 “물 한잔 마시며 듣고 가라”면서 쉼터로 안내한다. 평촌마을 자연문화해설사 공은주씨다. 쉼터를 떠날 때 ‘무돌길 쉼터’ 간판을 보니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입니다’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광주 평촌 반디마을 집들은 담벼락에 꽃화분을 내놓았다. 담장도 낮다.
평촌마을 ‘무돌길 쉼터’에선 물 한잔 얻어 마시고, 충분히 쉴 수 있다. 쉼터 간판은 ‘평촌마을 주민들의 구슬땀이 빚어낸 곳으로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입니다’라고 썼다.

무등산권 누정·원림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자는 움직임이 있어 이 일대를 찾았다. 지난달 19일 장재성 의원실 주최로 광주시의회에서 토론회가 열렸다. 광주, 담양, 화순에 흩어진 무등산권 누정을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과 연계하고,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을 합한 복합유산을 추진하는 제안이 나왔다. 누정의 정신을 5·18 광주정신과 잇자는 제언도 나왔다. 이 제언의 실현은 쉬워 보이지 않았다. 취가정같이 김덕령과 관련된 장소는 광주정신과 맥이 닿았지만, 송강정 같은 곳이나 은거·은둔의 특성을 어떻게 광주정신과 연계할지가 과제인 듯했다.

누정은 조선시대 유한계급의 공간이었다. 사대부들이 공부도 했지만, 유흥도 즐겼다. 조태성 전남대 호남학과 교수의 발제가 와 닿았다. 그는 “일하는 중간 들녘 막걸리 한 사발 웃음 한 소리 나누고, 아무런 욕심 없이 자연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는 공간”인 모정(茅亭)을 주시했다. 모정은 ‘풀로 엮어 만든 정자’라는 뜻이다. 나무 아래나 들 복판에 세웠다. 선비들의 사랑방은 누정, 일꾼들의 사랑방은 모정이라는 식으로 대비되곤 한다. 조 교수는 “누정은 상류지배층의 문화가 구체적으로 발현되는 장소다. 이후 생겨난 모정과 백성의 생활은 왜 지워져야 하는가”라고 말했다. “특정 계급의 어떤 가치만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조선의 상하층부 삶이 다 녹아든 공간”으로 누정·모정을 함께 봐야 한다는 취지의 말이다.

충효동 왕버들. 김덕령 나무라고도 부른다.
풍암정 주변 풍암제. 1973년 조성한 인공저수지다. 가을단풍이 유명하다. 단풍나무 풍(楓)자를 쓴다.
농민에게도 자리를 내준 명옥헌
누정과 모정의 정신 결합한 곳

누정과 모정의 정신이 결합한 곳이 명옥헌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 형태에 최소한의 인공만 가미한 걸 원림(園林)이라 한다. 일본식 정원과 구별할 때 쓴다. 명옥헌은 원림(苑林)이라 표기한다. 담장을 두지 않아 ‘苑’ 자를 썼다고 한다. 산에 든 여느 누정과 달리 명옥헌은 들판 부근에 섰다. 농부들이 언제든 쉬러 올 수 있는 거리다. 조선시대 농민들이 이 공간을 편히 오갔는지 기록은 찾지 못했다.

곁으로는 계곡이 흐른다. ‘개울물 소리가 옥구슬 흘러가는 소리 같다’고 명옥헌(鳴玉軒)이다. 배롱나무 수십 그루가 명옥헌과 주변 연못에 심겼다. 문지방 너머 배롱나무가 연못에 가지를 드리웠다. 주인 오희도(1583~1623)가 자신이 머무르는 공간을 망재(忘齋)라 지었는데, 시름과 잡념을 잊게 만드는 풍경이다.

명옥헌 연못에 비친 배롱나무. 명옥헌은 담장을 두르지 않았다. 입장료도 받지 않는다. 배롱나무꽃(목백일홍)은 여름에 핀다.
명옥헌.

무등산권 누정은 당쟁과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 지어진 게 많다. 은거와 은둔이 자연합일의 문학적 성취를 이뤄내곤 했다. 누정의 자연에서 현재의 고통을 읽어낸 이도 있다. 김해자 시인이 한때 이곳을 다녀간 뒤 시를 남겼다.

“배롱꽃 배시시 웃다가/ 목을 간지르는 비에 젖어 떨어졌네/ 젖어 더 붉은 꽃잎 못물에 투신했네// 겨울이 가기 무섭게/ 성마른 봄꽃 뻗쳐오를 때/ 암수술 꽉 채워 파랗게 굴리며 소리도 없더니/ 꽃이란 꽃 한꺼번에 타올라 후두둑 지고 없는 한여름/ 톡, 톡, 꽃잎 터뜨리더니// 먼저 떨어져 갔네 구호 한마디 없이/ 저마다 한 잎뿐인 생의 주사위/ 연못에 던져졌네 떨어져 더 붉었네.”

명옥헌으로 가려면 후산저수지를 지나야 한다. 수백년 된 버드나무가 심어졌다.

‘명옥헌에서 김주리를 보다’라는 제목의 시다. 김해자는 백일홍에서 동지의 생애와 죽음을 떠올렸다. 김주리는 노동운동가다. 1982년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봉제공장에 취업했다. 해고 노동자들이 주인인 공장을 만들려고 생산공동체 미모사를 결성했다. 이곳에서 일하다 1993년 화상을 입어 사망했다. 김해자는 김주리의 동지였다.

백일홍은 여름에 100일 동안 피고 진다. ‘못물에 투신한 붉은 꽃잎’ 보러 한여름 다시 오리라 다짐했다.

글·사진 전남 광주·담양 |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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