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용 나는 비결

한겨레21 2021. 5. 18.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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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의 사람을 위한 정책]5살 미만 어린 시절 환경의 지대한 중요성, 국가는 왜 아이들 미래에 투자해야 하는가
시민단체 ‘정치하는엄마들’이 2021년 5월4일 서울 여의도동 국회 앞에서 아동학대 사망사건 진상조사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특별법 제안자인 태호 부모가 행위극을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언론에서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아동 학대·방임 사건은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모두가 기억하는 정인이 사건이 있었죠. 경남 창녕에서 학대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4층 빌라의 지붕을 넘어 탈출한 10살 소녀나, 모텔을 전전하며 두 아이를 키우다 아이를 던져 뇌출혈을 일으킨 인천 모텔 영아 학대 사건도 모두 최근 1년 안에 발생한 일입니다. 이런 비극을 막아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큽니다.

지난 칼럼 ‘배 속 10개월 평생을 좌우한다’에서 저는 임신 기간 환경이 평생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알려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 환경은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한 사건 속 아이들은 어떤 어른의 삶을 살게 될까요? 사회가 아이들에게 좀더 나은 환경을 제공한다면 이들의 삶에 작은 볕이 들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수많은 경제학자가 노력했습니다. 최근 20년 동안 경제학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 무엇인지 제게 묻는다면 “(임신 기간을 포함한) 5살 미만 어린 시절 환경의 지대한 중요성을 밝힌 것”이라고 답하겠습니다. 경제학이 이런 것도 연구하냐며 놀랄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환경의 장기 효과’는 최근 경제학의 주요 연구 주제였고, 불우한 어린 시절은 불평등이 대물림되는 가장 중요한 경로라는 것도 밝혀냈습니다.

말라리아와 무연 휘발유가 미친 영향

먼저 편의상 ‘어린 시절’(영유아기)을 출생 이후 만 5살까지로 정의하겠습니다. 그 이후에는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 매우 다른 환경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이 불우했던 이는 성인이 돼서도 어려움을 겪을 확률이 높습니다. 불우한 환경을 이겨내고 일류대학에 진학한 성공담을 가물에 콩 나듯 듣지만 아주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대부분은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고 좋은 직장도 갖지 못합니다.

영유아기와 성인기의 삶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성인기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가 반드시 불우한 어린 시절 때문만은 아닙니다. 유전적 요인, 물리적 환경, 친구, 학교 등 수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경제학자들은 영유아기 환경이 성인기에 미치는 영향, 즉 ‘인과성’을 증명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다른 요인은 다 비슷한데 영유아기 환경만 다른 사람들을 찾아서 비교해야 합니다.

예컨대 지난 수십 년 동안 공중보건, 공기질, 의료서비스 등 아동 건강에 영향을 주는 환경은 지속적으로 개선됐습니다. 한번에 개선될 수는 없어, 지역과 시기에 따라 순차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이는 아동기 건강 환경의 영향을 측정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먼저 개선된 지역과 나중에 개선된 지역을 비교하는, 이른바 이중차분법(Difference-in-Differences)을 써서 분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건강한 환경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공중보건 사업을 살펴보겠습니다. 1920년대 미국, 1950년대 브라질·콜롬비아·멕시코 등 남미 국가들에서 대대적인 말라리아 박멸 사업을 했습니다. 디디티(DDT)라는 대단한 살충제가 개발된 덕분이죠. 어린 시절 말라리아 박멸 사업의 혜택을 본 지역의 아이들은 성인이 돼서 임금이 크게 올라, 미국은 약 12%, 남미 국가들은 평균 25% 올랐습니다(Bleakley, , 2010). 또 다른 연구에선 말라리아 박멸 사업 지역 학생들의 성적이 크게 올랐습니다(Venkataramani, , 2012). 말라리아는 뇌에 영향을 주어 인지·운동 기능 발달을 저해할 수 있는 중증질환이기에, 학업 성취와 임금에도 영향을 줍니다.

유해물질에 노출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주유소에서 ‘무연’ 휘발유라는 문구를 한 번쯤 보셨을 것입니다. 원래는 기술적 이유로 납을 첨가한 ‘유연’ 휘발유를 사용했는데, 많은 과학자가 납의 유해성을 지적하자 선진국에서는 1970년대에 유연 휘발유를 퇴출했습니다. 최근 스웨덴의 한 연구는 유연 휘발유 퇴출로 공기 중 납의 농도가 줄고, 이것이 학업 성취와 임금 증가로 이어졌다는 걸 밝혔습니다(Grönqvist, Nilsson, Robling, , 2020).

저소득층에서 훨씬 큰 효과

가정환경도 중요합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소득이 늘면 교육과 건강에 더 투자할 여력이 생깁니다. 코코아의 국제가격이 오르면 아프리카 가나의 코코아 재배 지역 자녀들이 혜택을 입습니다. 어린이들은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어른이 돼서 스트레스가 적은 삶을 삽니다(Adhvaryu, Fenske, Nyshadham, , 2019). 노르웨이가 생산하는 북해 브렌트유 가격이 오르면, 노르웨이 어린이들의 인지능력과 학업 성취가 올라갑니다. 그 혜택은 저소득층에서 훨씬 크게 나타납니다(Løken, Mogstad, and Wiswall, , 2012).

학대와 방임의 영향은 어떨까요? 미국 자료를 분석해보면 학대를 경험한 아이들은 지능지수(IQ)가 5% 정도 낮고, 직장을 가질 확률도 50%나 줄어듭니다. 취업해도 임금이 평균 24% 정도 낮습니다(Currie and Widom, , 2010). 하지만 유년기의 학대가 성인기 불우한 삶의 유일한 이유는 아닙니다. 이 아이들은 학대 외에 성장 과정에서 수많은 불리한 환경(가난, 폭력, 나쁜 친구)을 함께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과성’을 밝혀내기가 어렵습니다.

경제학자들은 양질의 영유아 교육(Early Childhood Education) 프로그램 효과를 살펴봤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미국 시카고대학의 제임스 헤크먼 교수입니다. 헤크먼 교수는 다양한 정책평가에 사용되는 계량경제학 방법을 발전시킨 공로로 2000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죠. 구직자의 직업교육 프로그램 효과 같은 노동시장 정책을 주로 분석하던 그는, 노벨상 수상 이후 연구 분야를 바꿔 영유아·아동 환경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헤크먼 교수가 만들어낸 지난 20년의 성과는 그가 두 번째 노벨경제학상을 받는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정도입니다.

대표적 프로그램이 1964년 시작된 ‘헤드 스타트’(Head Start)입니다. 이 프로그램의 특징은 영유아기에 저소득층(대부분 만 3~4살 자녀가 있는 흑인 가정)을 대상으로 영양·보건·보육 문제를 다룹니다. 부모를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고 가정방문도 자주 합니다.

1960년대 미국 미시간주에서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실시한 ‘페리 프리스쿨 프로그램’(Perry Preschool Program)과 이와 유사한 노스캐롤라이나주의 ‘ABC/CARE 프로그램’(The Carolina Abecedarian Project and the Carolina Approach to Responsive Education)도 있습니다. 이들 프로그램은 효과를 평가할 수 있도록 ‘무작위 통제실험’을 했습니다. 즉, 지원자 중 프로그램에 참여할 사람을 제비를 뽑아서 결정한 뒤 이들을 40년 이상 추적해 조사했습니다.

효과는 상당했습니다. 헤드 스타트 참여자는 청소년기에 범죄에 가담할 확률을 낮췄습니다. 페리 프리스쿨 프로그램의 수혜자는 학업 성취, 취업 여부, 소득, 결혼 여부, 건강, 범죄 모든 영역에서 훨씬 나은 삶을 살았습니다(Heckman et al. , 2010/ Conti et al. , 2013). 이는 놀랍게도 지능지수 같은 인지능력보다는 자존감, 참을성, 정서적 안정 같은 비인지능력(Non-cognitive skill)에서 기인했습니다(Heckman et al. , 2013).

ABC/CARE 프로그램도 큰 효과를 보여줬습니다. 표1에 결과를 정리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즈음에 실시한 PIAT(Peabody Individual Achievement Test)에서 여학생은 점수가 95.6점에서 4.9점 상승했고, 남학생은 93.5점에서 7.7점 상승했습니다.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할 확률도 크게 늘었습니다. 30살의 소득은 특히 남자에게서 많이 증가했습니다. 남자 대조군의 평균소득은 2014년 기준 2만9340달러(약 3천만원)인데 처치군의 평균소득은 이보다 1만9809달러 많았습니다. 임금이 무려 68%나 늘어났습니다(García et al. , 2020). 고혈압, 고지혈증, 비만이 될 확률도 크게 낮아졌습니다.

비인지 기능의 중요성

영유아 조기교육 프로그램은 성적 개선 효과가 비교적 제한적입니다. 유일하게 성적이 상승한 것은 ABC/CARE 프로그램인데, 이마저도 단기에만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임금과 건강에 미치는 상당한 효과는 어디서 왔을까요?

사람을 성공적인 삶으로 이끄는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연구한 헤크먼 교수의 연구를 살펴봐야 합니다(Heckman, Stixrud, and Urzua, , 2006). 임금수준, 교육 연한, 건강, 안정적 가정생활 등을 성공적인 삶의 척도로 잡았습니다.

부모들은 자녀가 우수한 대학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 갖기를 바랍니다. 자녀에 대한 투자는 학원과 과외수업 등 아이들의 인지능력을 높이는 데 집중됐습니다. 헤크먼 교수의 연구 결과는 인지능력과 더불어 그동안 우리가 소홀히 여겼던 자존감, 자기효능감, 참을성(끈기), 성실성, 개방성, 정서적 안정, 개인이 자기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 같은 비인지능력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페리 프리스쿨 프로그램이 보여준 것처럼요.

그림1은 인지능력(왼쪽)과 비인지능력(오른쪽)이 임금에 미치는 영향을 나타냅니다. 미국 사례로, 첫 번째는 남성, 두 번째는 여성입니다. 인지 및 비인지 능력이 높아질수록 임금이 상승합니다.

주목할 부분은 인지능력 못지않게 비인지능력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가령 끈기 있는 학생은 교육에 더 투자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임금도 증가하지요. 성격 좋은 사람은 회사생활을 더 잘하지요. 인지·비인지 능력은 또한 상보적입니다. 이를 모두 갖춘 사람이 사회에서 인정받고 성공할 확률이 훨씬 높지요. 이 형태는 교육, 건강 분야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유아 조기교육 프로그램의 효과는 상당 부분 비인지능력 상승으로 나타났습니다. 모든 영유아 프로그램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장기적 효과의 비결입니다. 미국에는 학교 성적이 오르지 않았다고 영유아 프로그램을 비판하고, 때로 없애야 한다고까지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소득층 아이들을 가난의 대물림에서 구하려면 성적 향상도 필요하지만, 자존감과 참을성을 높이는 등 비인지능력 개선도 반드시 동반돼야 합니다.

장기적 효과의 비결

영유아 프로그램부터 직업교육까지 평생 인적자본을 연구한 헤크먼 교수는 이 연구 결과를 집대성해, 삶의 주기에 따라 인적자본 투자의 비용 효과성을 살펴봤습니다. 그 결과가 유명한 ‘헤크먼 곡선’입니다(그림2). 헤크먼 곡선은 임신기·아동에 대한 초기 투자가 직업교육 같은 성인기 투자보다 비용 면에서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저소득층 아이들은 다양한 위험에 노출돼 있습니다. 가난의 대물림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합니다. 양질의 영유아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건 아이들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불평등을 개선할 수 있습니다. 아이를 위한 투자는 정치적 견해 차이가 적은 편으로, 사회가 비교적 쉽게 합의하는 가치 있는 투자입니다. 국가는 아이들의 미래에 우선 투자해야 합니다.

김현철 홍콩과학기술대 경제학과·미국 코넬대학 정책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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