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의 시화기행>'주름진 미소' 보며.. 비로소 '쉬는 법'을 배운다

기자 2021. 5. 4.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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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 생명의노래-어락, 54x62㎝, 혼합재료에 먹과 채색, 2009.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바닷가 휴양도시 생말로

■ (74) 프랑스 생말로

지나치게 한적한 시골마을풍경

창 닫지 않아 들려오는 파도소리

식당에 내려가니 온통 백발머리

모든 긴장 해체되고 해맑은 미소

젊을 땐 사처로 바람처럼 헤매다

나이들면 돌아와 쉴 집 필요해져

행려의 길서 만난 삶도 귀로지향

나는 여행을 하면 다소 격하게 일정을 잡는다. ‘몸아,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는 식이다. 몸에 밴 이 습관은 나이 들어도 좀체 바뀌지 않는다. 어떤 이는 나의 이런 여행 습관이 작은 공간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탓이라고 했다.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도시의 끝에서 끝까지 걸어서 30∼40분이 될까 말까 한 작은 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래서일까, 내 무의식의 또 다른 자아는 땅을 밟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넓고 많이 밟으라고 충동질해대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그 공간 체험의 결여를 어른이 돼 메꾸고 싶어 하는 심리인 것 같다. 그러다 완전히 녹초가 될 때쯤에는 하루를 비워버리고 푹 쉬어준다. 그럴 때는 아무래도 한산한 휴양지를 찾게 된다. 격한 여행의 뒤끝에, 생말로 역시 그렇게 해서 만난 곳이다. 거기서 나는 쉬는 법을 배웠다. 특히 나이 들어서 쉬는 법을.

기차가 흔들리며 벌판을 지난다. 인상파의 그림 속인 양 여기저기 쌓아 놓은 건초 더미들이 빠르게 지나쳐간다. 멀리 지평선 너머로는 무지개가 펼쳐져 있다.

일망무제로 확 트인 목초지대를 보니 가슴이 시원해진다. 도시인들은 너나없이 공간 가난에 시달린다. 칸막이와 칸막이 사이에서 시야는 차단되고 반경은 줄어든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공간 가난은 공간 극빈으로까지 치달았다. 이동 공간의 제한으로 심리적 유폐를 겪는 것이다. 오랜만에 무한 확장되는 자연 공간 속에서 자연이 주는 위로와 기쁨, 평안을 느끼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질주하는 문명에 대해 우수의 그림자를 던지는 사람은 많았다. 장 자크 루소는 평생 도시에 살았으나, “도시는 문명의 가래침, 자연으로 가라”고 외쳤다. 웬델 베리는 “컴퓨터가 혁신이라면 컴퓨터를 하지 않는 것 또한 혁신이다”는 말과 함께 대학교수 직을 그만두고 산으로 들어갔다. 그 역시 산 생활을 하면서도 도시로 강의와 출장을 다녔으며 저서도 왕성하게 출간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 분야의 대표 주자는 호숫가에 작은 나무집 한 채 짓고 재가승 같은 삶을 살며 자발적 가난과 작은 삶을 실천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들 수 있겠다. 같은 무소유를 주장했던 법정 스님마저 그의 자전적 책 ‘월든’만은 마지막 소유로 손에서 만지작거리며 놓지 못했다고 했을 정도였으니까. 여기까지일까. 사실 미국판 ‘나는 자연인이다’의 원조 지식인인 시인 존 무어(John moore)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백인이었지만 북미 인디언의 마지막 후예처럼 산에 살며 그 속에서 시(詩)로 우주와 자연을 노래했다. 훗날 대통령이 된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소문을 듣고 산속의 그를 찾아온다. 수백 년씩 된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그들은 이 신의 정원을 지키기로 약속한다. 그가 권력을 잡고 나서 이 약속은 지켜졌다. 미국에 400여 개에 달하는 자연 국립공원이 탄생한 배경이다. 시가 정치를, 그것도 바른 시각을 가진 정치를 만나 이토록 위대한 역사의 서막이 열렸던 것이다. 어머니와 아내를 같은 날 떠나보내야 했던 루스벨트는 어머니와 아내의 품 같은 대자연 속에서 위로받고 싶었고 실제로 많은 치유를 경험한다. 무어와 3박 4일 야영을 하면서 깊은 동지애적 결속도 다진다. 그는 소아마비와 천식을 이겨내고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4선을 달성했고, 대공황을 뛰어난 리더십으로 극복한 사람으로 많이 인식되지만, 무엇보다 창조주로부터 물려받은 자연을 잘 쓰고 후손들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소명감이 투철한 사람이기도 했던 것이다. 자연 국립공원을 세운 것은 빛나고 화려해 보이지는 않지만 어찌 보면 그의 정치적 위업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쉼 없이 헤집고 다녔던 격한 여정의 일정을 나는 이제 이곳 한가한 바닷가 생말로에 풀어놓고 물소리 바람 소리 속에 나를 누인다.

이곳에서 며칠 쉬고 나면 다시 영국과 아일랜드, 이탈리아로 떠나야 한다. 떠나기 위해서는 일단 쉬어야 한다. 자연 속에 무방비 상태로 심신을 풀어헤치는 진정한 휴식이 따라 줘야 문명 속에서의 격한 일정을 소화해낼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나의 경우엔 그렇다. 파리를 떠나오기 전, 세상에서 가장 쉬기 좋은 곳은 어디일까요 라는 약간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 완전 녹초로 지쳐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에서 오래 산 지인은 “세상에서 제일”이라면 그건 바로 ‘집’이라고 했다. 이어서 두 번째를 추천하라면 “생말로”라고 했다.

“해수 온천한다는 곳 말이죠? 거긴… 노인들 휴양지 아닌가요.”

그는 웃으며 슬쩍 치고 들어온다. “선생님도 젊지는 않죠!”

그렇게 해서 떠난 생말로. 무엇보다 내가 있던 파리에서 멀지 않은 것이 가장 좋은 점이었다. 시장 바닥처럼 붐비는 리옹역에서 유레일패스 덕에 안락한 좌석에 앉아 도착한 생말로는 그러나 지나치게 한적한 시골이었다. 밤이 됐는데 택시를 잡을 수가 없었다. 간간이 불빛이 보일 뿐 적막강산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택시를 포기하고 예약한 호텔에 전화하니 마중을 나오겠단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리니 승용차 한 대가 역 앞 택시 정류장으로 나왔다.

창밖으로 마을의 불빛이 드문드문 건너다보이는 호텔에 여장을 풀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밤새 어디선가 웅얼거리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온다 싶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창을 닫지 않고 잔 탓에 들려오는 파도 소리였다.

식당으로 내려가니 온통 머리들이 하얗다. 노부부들이 식사하다가 이 동양인을 향해 주름살 가득 웃음을 지어 보인다. 노년이 되면 정이 그리운 것일까. 관계의 모든 긴장이 해체된 채 해맑게 짓는 저 미소. 그 순간 두려움 없이 저렇게 나이 들어간다면, 외로움 없이 내면의 꽃을 화사하게 피우며 늙어간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느리게 방파제를 걷는다. 그새 물은 빠져나가고 제방을 따라 물에 잠긴 키 큰 목책들이 마치 무슨 설치미술처럼 서 있다.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이 생각나는 구도다. 한없이 뻗는 산책로에서 스치는 이들 역시 노인들이다. 호텔마다 거의 바닷물을 끌어들인 해수 온천이 있어서 이곳이 노인들의 최고 휴양지가 됐다는 것이다. 잔잔히 불어오는 바람이 달다.

아, 이 휴식의 달콤함이라니. 그동안 쉬는 법을 몰랐다. 어디 나뿐이랴. 내 또래 한국인이라면 너나없이 그럴 터이다. 이곳에 머물며 나는 시간의 여백을 바라본다. 비로소 쉬는 법을 배운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오랜 유배 생활에서 돌아와 과천에 초당 하나를 짓고, 과천의 글 농사 짓는 농부라는 뜻으로 과농(果農)이라는 호를 지었다. 그리고 ‘귀로지재(歸老之齋)’라는 글을 써서 현판에 새겨 달았다.

예컨대 “노년에 돌아오는 집”인 것이다. 누구에게나 젊을 때는 사처로 바람처럼 헤매다가도 나이 들면 돌아와 쉴 집과 누울 처소가 필요해진다. 인생이 여행 자체이기에 여행자라고 다를 리 없다.

생말로는 그런 면에서 행려의 길에서 만난 내 생애 또 하나의 귀로지향(歸老之鄕)인 셈이다.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 바닷가 휴양도시 생말로

1~2월 이른 봄 날씨… 노년 관광객 많아

유럽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휴양지 중 하나라는 생말로는 몽생미셸과 함께 둘러보는 코스로도 이름 높다. 가장 많이 이용되는 교통편으로는 리옹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들 수 있는데 중간에 오래된 성당이 하나 있는 몽생미셸을 둘러본 후 다시 생말로행 늦은 기차를 탈 수도 있다.

원래 고립된 수도원으로 유명한 외딴 섬 몽생미셸과 달리 생말로는 관광지와 휴양지로도 이름이 높다. 해수를 실내로 끌어들인 온천호텔들이 모여 있고 방파제를 따라 일직선의 바닷가 길을 30∼40분 걸어가면 긴 성벽과 함께 올망졸망한 상가들이 나온다. 성수기를 피해 1∼2월에 가면 저렴하게 숙박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이른 봄 같은 날씨의 이 시기에는 특히 노인들의 계절이라고 할 만큼 노년 관광, 투숙객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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