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양성평등 족보 '다빈치 DNA' 해남윤씨-나주정씨

2021. 5. 4.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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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윤씨는 인근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 정약용의 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정약용이 집필활동을 하고 학문을 연구할 거처 '다산초당'을 지어줬고, 18~20세기 윤씨 후손들은 다산의 뜻을 본받아 지역을 이끌고 가풍을 정립했으며, 향촌파 종가는 다산의 학문을 증보해 집대성하기도 했다.

해남윤씨 항촌파 종가는 다산 정약용(1762~1836)과 인연이 깊고 다산학의 계승자로 알려진 윤정기(1814~1879)가 실학과 경학의 저술들을 보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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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윤두수-윤정기, 정약전-정약용 네
해남윤씨 향촌파 종가는 다산 학문 집대성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해남윤씨는 인근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 정약용의 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정약용이 집필활동을 하고 학문을 연구할 거처 ‘다산초당’을 지어줬고, 18~20세기 윤씨 후손들은 다산의 뜻을 본받아 지역을 이끌고 가풍을 정립했으며, 향촌파 종가는 다산의 학문을 증보해 집대성하기도 했다.

다산초당 [문화재청 제공]

다산의 본관은 나주인데 어머니가 해남윤씨라서 외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입었다. 아버지 정재원이 화순현감에 있을 때 외가인 해남에 내려가 공부를 하고, 외사촌과 놀기도 했다. 다산 어머니 윤씨의 할아버지는 다산에게도 이어졌을 ‘다빈치 DNA’를 가진 공재 윤두서이고, 공재 윤두서는 천재와 충절의 문신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다.

전남 강진군 주작산 아래 도암면 항촌에 있는 해남윤씨 항촌파종가는 14세인 윤세우가 조선 명종 때 만호를 지내고 강진 도암 항촌에 들어와 항촌파 만호공종가를 열었다.

해남윤씨 향촌파종가의 명발당 [남도일보 제공]

참고로 같은 고을, 같은 집안이지만, 13세 윤구, 16세 윤선도, 19세 윤두서는 해남윤씨 8개파 중 어초은파이다. ▶헤럴드경제 올해 2월9일자, 남도일보 지난해 1월22일자 ‘어초은 종가’ 참조

향촌파를 포함하는 해남윤씨가 가정의달 5월에 주목받는 귀감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 중에서 양성평등 족보 포맷을 빼놓을 수 없다.

‘해남윤씨 족보 목판’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됐다. 족보는 부계는 물론 모계까지 모두 기록하고, 자녀를 남녀 순이 아니라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했다. 외손까지 기록에 남김으로써 여성의 권익을 남성과 동등하게 인정하고, 호남지역 성씨 인물의 맥락을 잘 파악하도록 한 사료이다.

전남 해남을 본관으로 하는 윤씨는 고려 문종 때 사람 윤존부를 시조로 한다. 시조 8세손 윤광전이 고려 공민왕 때 사온서직장을 지내고 고려가 기울자 은둔하면서 두 아들 윤단봉·윤단학 형제를 데리고 강진에 가문의 터전을 마련했다.

추원당(덕정동) [남도일보 제공]

해남윤씨 항촌파 종가는 다산 정약용(1762~1836)과 인연이 깊고 다산학의 계승자로 알려진 윤정기(1814~1879)가 실학과 경학의 저술들을 보물로 남겼다.

강진 도암은 항촌파종가의 세거지이면서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 다산초당이 있는 곳이다. 두 집안의 인연은 정약용의 부친 정재원(1730~1792)이 화순현감을 지낼 때, 처가인 해남 연동을 왕래하면서 해남윤씨 21세 윤광택(1732~1804)의 별장에서 머물게 되면서 시작됐다.

22세 윤서유(1764~1821)는 부친 윤광택의 명으로 사촌동생 윤시유를 보내 유배 중인 정약용을 돕고 위로한다. 윤서유는 장남 윤창모(윤영희, 1795~1856)를 다산초당에 보내 공부하게 하고, 1812년 다산의 딸과 혼인하게 하여 정약용과 사돈을 맺는다.

1808년 5월 한 가족과 다름없던 다산네와 윤씨네는 용혈암으로 소풍을 간다. 윤창모, 정학유(1786~1855), 정홍림 등 양가 아이들이 참 즐거웠던 모양이다. 다산은 이날 행복에 겨워 ‘용혈행’이라는 시를 짓는데, “좋아라고 뛰는 애들, 그 기를 꺾을 수 없어”라면서 그 험한 산에 해가 지도록 놀았다고 적었다. 농가월령가로 유명한 학유는 좋아라고 뛸 나이가 아니었다.

24세 윤정기(1814~1879)가 윤창모와 나주정씨 사이에서 태어나 다산 정약용의 외손자가 된다. 윤정기는 스물세살이 되기까지 다산에게서 배웠고 이후에는 외숙부인 정학연에게 가르침을 받아 다산학을 이었다.

정약용 작, 매조서정. 이른 봄 정취에 그치지 않고,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그림이다.

방산 윤정기는 외조부 정약용이 부족부분 때문에 안타까워했던 ‘시경강의’를 보완한 저서 ‘시경강의속집’을 비롯, 역전익속·동환록·물명고(物名考)를 저술하고, 500여편의 시와 문장 등을 ‘방산유고’에 남겼다.

종가인 명발당과 별장인 농산별업, 옹산별업 터 등 방산 윤정기의 유적은 강진군 향토문화유산 제27호로 지정됐다. 다산학단에 윤정기의 역학, 경학, 지리학, 시문장 등이 있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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