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욱의 지식카페>종교적 '우울'에 갇혀있던 유럽, 탈출하려 떠난 '여행'서 신대륙 찾아

기자 2021. 4. 28. 10:4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뒤러의 ‘멜렌콜리아Ⅰ’

■ 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 (19) 서양의 본질 - 우울과 여행

신의 은총에 의존해야만 구원 가능하다는 운명종속 사상… 불행·권태로 가득 찬 존재 자체로부터 도피 꾀해

말세론 종교가 유럽을 자신의 바깥으로 뛰쳐 나가게 만들어… 콜럼버스·마젤란 같은 세기의 여행가 탄생시켜

우울(멜랑콜리아·Melancholia)을 떨쳐버리기 위해 바닷바람을 쐬고 있는 여행자는 일상과 영화 속에, 현실과 허구 속에 흔하고 흔하다. 무거운 마음을 지닌 이 여행자의 뒤에는 장대한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둘 다 늘 누워 있지만, 고양이들은 게으름을 즐기는 듯 보이고 개들은 우울해 보인다. 명상가를 흉내 내듯 웅크린 개를 보면, ‘비장(脾臟)이 개를 지배한다’는 고대인의 말이 떠오른다. 서양말에서 ‘비장’을 뜻하는 ‘spleen’은 우울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의 판화 ‘멜렌콜리아Ⅰ(Melencolia 1·1514)’에는 우울의 상징으로 웅크린 그레이하운드가 등장한다. 멜랑콜리아라는 그리스 말 자체는 ‘흑담즙’, 내장에서 나온 검은 즙을 뜻한다.

16세기 화가 뒤러의 이 ‘멜렌콜리아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이 판화 안의 모든 요소가 심오한 상징들이지만, 두 가지만 보자. 여인으로 의인화된 멜랑콜리아가 움츠려 앉아 있고, 멀리엔 ‘바다’가, 즉 해외(海外)가 있다. 우울 속으로 침잠한 이는 먼 이국으로의 여행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발터 베냐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최성만·김유동 역)에서 ‘우울’과 ‘여행’의 대조가 이루는 저 그림의 핵심 구도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먼 여행을 하고 싶어 하는 멜랑콜리적인 인간의 성향 같은 특이한 개별적인 사항들이 등장한다. 따라서 뒤러의 ‘멜렌콜리아Ⅰ’의 원경에는 바다가 있다.”

내면으로 침잠하는 우울과 여행의 터전인 바다가 꼭 붙어 있는 것이다. 실제 멜랑콜리아의 기념비적 화가 뒤러의 시대는 기념비적인 바다 여행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의 시대이기도 하다.

우울의 원천은 무엇인가? 멜랑콜리아는 서구 종교와 떼어 생각할 수 없다.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말한다. 종교 개혁시대, 자발적 선행(善行)이 아니라 신의 은총에만 의존해 구원이 이뤄진다는 운명 종속의 사상은 “위대한 인물들의 마음속에는 우울함을 심어 놓았다. … 공덕을 쌓고 속죄를 한다는 선행의 의미뿐만 아니라 궁극에 가서는 선행 자체를 거부하는 이러한 과도한 반작용에서 … 운명 종속에 대한 어두운 믿음의 일단이 드러난다. 인간 행동은 일체의 가치를 박탈당한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것이 생겨났는데 그것이 바로 공허한 세계다.”

이 ‘공허한 세계’의 명칭이 바로 ‘우울’이다. 그리고 현대의 염세주의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자기 내면에서 이 우울을 발견해 왔다. 말러가 죽기 2년 전인 1909년쯤 완성한 ‘대지의 노래’는 이런 노랫말을 가지고 있다. “슬픔이 찾아오면/마음의 화원은 황폐해지고/즐거움도 노래도 모두 사라진다./삶도 어둡고 죽음도 어둡다.” 슬픔은 이렇게 황폐한 화원 같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스며 나온다는 것을 17세기에 파스칼은 ‘팡세’(이환 역)에서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인간은 너무도 불행하기 때문에 아무런 권태의 원인 없이도 그의 구조의 고유한 상태로 인해 권태를 느낄 것이다. … 비록 왕일지라도 자기를 생각하면 비참해지리라는 것을 그들은 안다. … 인간의 마음이란 이 얼마나 공허하고 오물로 가득 차 있는가.” 철학의 중심을 내면에 대한 탐구로 옮겨 놓은 자는 파스칼과 동시대의 데카르트였다. 그러나 데카르트와 달리 파스칼에게 내면은 이성적 통찰의 대상이기보다 ‘비참’ ‘불행’ ‘권태’로 가득 차 있으며, 그것들은 ‘우울’의 또 다른 이름들이다. 이 우울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 자체와 대면하는 데서 생기는 정서다.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한 권태가 존재한다”는 레비나스의 사상은 파스칼의 저 구절의 반복인 것이다.

구원 없이 존재하는 우울한 자는 내면에서 대면하는 자기 자신을 무거운 ‘짐’ 자체로 발견한다.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강명순 역)는 바로 참을 수 없는 ‘짐’이란 자기 자신임을 잘 알려주고 있다. “그를 산에서 끌어내 세상 속으로 다시 몰아낸 한 가지 재앙이 일어나지만 않았다면 아마 그는 죽을 때까지 거기서 살았을 것이다. … 그것은 바깥세상의 재앙이 아니라 내면세계에서 일어난 재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고통스러운 재앙이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이제 그르누이는 도망가 숨을 곳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 그르누이는 그게 어떤 냄새인지 알고 있었다. 바로 자신의 냄새였다.”

이렇게 내면이 안식의 장소가 아니라 못 견디게 만드는 재앙의 장소라면, 인간은 자기 바깥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다. 바로 ‘여행’을 하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존재에서 존재자로’는 내면으로부터의 탈출이 여행의 동기라는 것을 다음처럼 잘 파악하고 있다. “권태 속에서 우리는 보다 아름다운 곳에 대한 동경 속에서, 존재의 이런저런 모습들 가운데 하나로부터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부터 도피하고자 한다. 여행을 위한 안내서도 없고 기한도 정해지지 않은 도피, 그것은 어느 곳엔가 정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 우울한 마음의 ‘여행 예찬자들’이 출현한다. 바로 보들레르가 있다. ‘우울’과 ‘여행’은 가장 보들레르다운 화두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악의 꽃’(윤영애 역)에 ‘우울(Spleen)’이라는 제목의 시를 여러 편 남겼는데, 이 시들에서 내면으로의 침잠이 우울을 불러온다. “낮고 무거운 하늘이 뚜껑처럼/오랜 권태에 신음하는 정신을 내리누르고,/ … /소리 없는 더러운 거미 떼가/우리 머릿속 깊은 곳에 그물을 친다./ … /북도, 음악도 없는 길고 긴 영구차들이/내 넋 속에서 서서히 줄지어 가고,/ ‘희망’은 패하여 눈물짓고, 포악한 ‘고뇌’가/숙인 내 머리통에 검은 기를 꽂는다.”

이렇게 내면으로 침잠한 영혼의 풍경은 우울이다. 그리고 우울을 뿌리치고자 저 영혼은 ‘여행’을 희구한다. “진정한 여행자들은 오직 떠나기 위해/떠나는 사람들. 마음도 가볍게, 풍선처럼,/주어진 숙명을 빠져나가지 못하면서,/까닭도 모르는 채 늘 ‘가자!’하고 외친다./ … /우리는 증기도 돛도 없이 여행하고파!/우리 감옥의 권태를 위로해 주기 위해.”(‘여행’에서) 여행이란 ‘내면으로부터 떠나기 위한 떠남’이 관건인 여행인 것이다. 그러나 앞서 베냐민이 말한 “운명 종속”이, 그리고 보들레르가 말하고 있는 “주어진 숙명”이 여행자를 계속 우울한 내면에 붙잡아 두려 한다.

멜빌의 ‘모비딕’(1851)의 주인공을 바다 여행으로 이끄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 역시 우울이다. “당분간 배를 타고 나가 세계의 바다를 두루 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내가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리고 혈액순환을 조절하기 위해 늘 쓰는 방법이다. … 이것이 나에게는 권총과 총알 대신이다.”(김석희 역) 여행은 우울한 영혼이 권총과 총알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피하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다.

20세기에 와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사르트르의 첫 소설 제목 ‘구토’(1938)는 출판사 사장 갈리마르가 붙여준 것이고, 저자가 붙인 원래 제목은 ‘멜랑콜리아(우울)’였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엔 뒤러의 저 판화가 이 소설의 프랑스어판 표지 그림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는 바이지만, 소설의 주인공 로캉탱은 존재의 이유가 없는 우울한 영혼인 동시에 1930년대 “중부 유럽, 북아프리카, 극동아시아를 여행”한 여행자이기도 하다. 소설 마지막에 주인공은 생활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라며 또 파리로 떠나려 한다. 우울한 영혼은 이렇게 안간힘을 써서 여행하고 싶어 한다.

이런 ‘우울’과 ‘여행’은 한 개인의 고뇌가 아니라 서양의 영혼 전체가 걸린 문제다.

뒤러가 유럽의 북쪽에서 멜랑콜리아를 주제로 판화를 제작하기 직전에 유럽의 남쪽에선 종말론에 깊이 빠져든 콜럼버스가 새로운 세계를 향한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종말론적 신비주의자로서 콜럼버스의 면모에 대해선 주경철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참조). 당시 스페인에는 종말론이 만연했고, 이는 콜럼버스가 쓴 ‘예언서’에 깊은 영향을 줬다. 그의 종교적 견해를 담은 이 책에서 콜럼버스는 당대를 종말 직전에 놓인 시대로 발견한다. 실제 그는 이른바 ‘알폰수 국왕의 표’에 따라 종말까지 남은 시간을 구체적으로 계산한다. “이 계산에 따르면, 앞에서 인용했던 박학한 견해대로 이 세상이 완수되는 데 7000년이 걸린다고 하므로 이제 150년이 남았다.”(주경철, 위의 책에서 재인용) 150년 남은 말세를 대비하는 길이 콜럼버스에게는 해외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금을 찾아, 시온 산에 성전을 다시 짓는 스페인 왕의 사명을 돕겠다고 왕에게 편지를 쓰게 된다.

죄의식으로 가득한 영혼이 유럽에서 탄생했고, 구원받지 못할 자기 운명의 가능성을 내면에서 우울하게 응시하던 이 영혼으로부터 여행의 꿈이 탄생했으며, 그 꿈이 우울한 유럽을 벗어나 우연히 신대륙의 발견으로까지 이어졌다면 과장된 생각일까? 물론 이 모든 일은 신대륙의 황금이 강력한 자석처럼 곁에서 이끌어줘야 했지만 말이다.

유럽은 원죄와 죄의식과 말세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고, 이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우울은 유럽을 자신의 바깥으로 뛰쳐나가고 싶게 했다. 그것이 콜럼버스, 마젤란, 다 가마 같은 여행가들을 탄생시켰다.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자기 수명을 10년은 빼앗아 갔다고 한탄한 경도의 비밀도 곧 풀렸다. 날짜 변경선의 발견에 도전하는 여행의 시대를 그린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전날의 섬’(이윤기 역)의 주인공이 말하듯 경도 측정은 결국 유럽을 바다의 제왕으로 만들었다. “경도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국가가 바다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되겠군요!” 배들은 다른 대륙의 해안에 도달했고, 여유로운 우울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식민지의 선명한 채찍질 같은 고통이 지구를 뒤덮기 시작했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멜랑콜리아(Melancholia) : 멜랑콜리아라는 성향은 고대부터 연구됐으며, 의학, 철학, 문학 등의 관심이 교차되는 영역에 놓여 있다. 고대 그리스에선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 이 4가지 체액에 따라 사람의 성향이나 질병의 원인을 파악했다. 우울한 성향은 흑담즙, 즉 ‘멜랑(melan·검다)+콜레(chole·담즙)’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멜랑콜리아는 질병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뒤러와 동시대의 신비주의자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1486∼1535)는 멜랑콜리아를 3단계로 구분했는데, 상상력과 예술가의 단계, 이성과 과학자의 단계, 직관적 사유와 신학자의 단계가 그것이다. 뒤러의 판화 ‘멜렌콜리아Ⅰ’의 주인공이 지적인 강렬한 눈빛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멜랑콜리아가 그녀에게 저런 창조적 능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 문화닷컴 | 네이버 뉴스 채널 구독 | 모바일 웹 | 슬기로운 문화생활 ]

[Copyrightⓒmunhwa.com '대한민국 오후를 여는 유일석간 문화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구독신청:02)3701-5555 / 모바일 웹:m.munhwa.com)]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