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윤여정' 키키 키린이 재일한국인으로 소문났던 이유

고경석 2021. 4. 2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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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키키 키린(왼쪽)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마음산책 제공
“난 배우로서 살기보다 연예계에서 사는 쪽이 좋아. 가장 싫은 곳이지만, 이 연예계에 가만히 앉아서 여러 사람을 보는 거야. 재밌거든.”

연기 인생 말년을 함께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말처럼 키키 키린(1943~2018)은 대배우는 아니었어도 관객을 매혹시키는 독특한 매력이 있는 배우였다. 스스로를 배우로 생각하기보다 연예인으로 여기려 했다는 것부터 그렇다. 그는 고레에다 감독에게 자신의 위치가 ‘연예인으로 어디쯤에 어떤 느낌으로 있을까’ 생각하며 “관객의 기대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가져가려고” 했다고 말했다. 다른 배우들이 배역 연구에 몰두해 있을 때 그는 여기에 더해 ‘세상은 이제 이런 데 질렸군’ ‘보기 싫어지고 있네’ ‘이런 걸 원하고 있어’ 같은 걸 느끼고 생각하며 연기에 임했다는 것이다. 나무를 관찰하면서도 동시에 숲과 땅과 하늘을 보는 눈을 가진 배우, 키키 키린의 연기에 특별한 매력이 있었던 건 이런 이유에서였는지 모른다.

키키 키린은 그 어떤 인터뷰에서도 배우로서 세속적인 탐욕을 드러내지도, 예술가의 고결한 야심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는 TV드라마보다 연극이나 영화가 우월하다고 여기지도 않았고 주연을 연기하고자 하는 욕심을 내지도 않았으며 연기자로서 대단한 업적을 남기고자 하는 뜻도 없었다. 일생을 조연배우로 살아온 그를 대배우라 하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배우보다 세상과 사람을 통찰하고 이를 따뜻한 시선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속 깊은 배우였다. 연예계를 바라보는 시각부터 그렇다.

"연예계라는 곳에는 정말이지 무시무시할 정도로 색정과 욕망이 줄줄 흐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엄청나게 고요한 것, 깨끗한 것이 줄줄 흐를 때도 있어. 그것들이 꼬인 새끼줄처럼 공존하는 와중에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세계에요. 살아남기 위해서 하는 건 아냐,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을 보면 나름대로…… 납득이 가. 그래서 재밌어. 스님처럼 수행하는 세계였다면 도저히 해나갈 수 없지. 하지만 온갖 도깨비들이 설치는 세계이기 때문에 좋구나, 재밌구나 생각해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키키 키린과 12년간 나눈 대화

최근 국내 출간된 ‘키키 키린의 말’(마음산책 발행)은 일본의 명배우 키키 키린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2008년 ‘걸어도 걸어도’부터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어느 가족’(2018)까지 6편의 영화를 함께 만들었던 고레에다 감독이 햇수로 12년간 그와 나눴던 대화를 책으로 엮었다. 잡지 ‘스위치’에 먼저 연재했던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당시 사정 상 넣지 못했던 대화를 추가하고 스케줄 수첩과 촬영 일지를 들춰보며 떠올린 기억과 고찰을 덧붙였다고 감독은 설명했다.

키키 키린이 국내에 알려진 건 주로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을 통해서였기에 국내 팬들에겐 고인을 추억하기에 이 책이 안성맞춤일 듯하다.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들에 출연하게 된 과정부터 여러 뒷이야기, 캐릭터와 연기에 관한 대화가 밀도 높게 담겼기 때문이다. 후기 출연작 중 ‘도쿄 타워’ ‘악인’ ‘내 어머니의 인생’ ‘모리의 정원’ 등 고레에다 감독이 연출하지 않은 영화들과 관련한 이야기도 들어볼 수 있다.


고레에다 감독, 어머니를 잃고 또 다른 어머니를 만나다

약간의 과장을 덧붙이자면 키키 키린은 고레에다 감독이 어머니를 잃고 만난 또 한 명의 어머니였다. 그 스스로도 “어머니를 잃은 것을 어떻게든 작품(‘걸어도 걸어도’)으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키린씨를 만날 수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고 말했다. 연출가를 꿈꾸기 전부터 그의 출연작을 봐왔던 고레에다에게 ‘걸어도 걸어도’는 오래도록 좋아하던 배우와 함께 찍는 첫 작품으로 더할 나위 없었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 키키 키린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처음으로 함께 촬영환 작품이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이유로 영화계의 이방인이었다. 고레에다 감독은 TV 다큐멘터리를 찍으며 연출을 시작했고, 키키 키린은 “영화는 계속 남으니까 싫었”기에 TV를 주무대로 활동했다. 배우들이 TV 출연과 광고 출연을 낮게 평가할 때도 키린은 주저 없이 드라마와 광고를 선택했다. 대표작 중 하나인 ‘데라우치 간타로 일가’에선 30대 초반의 나이에 머리를 탈색하고 할머니 역할까지 했다. 젊은 여배우에게 이 같은 제안이 오면 기분이 상할 만도 하지만 그는 "딱히 무슨 역이든 상관없었지만 할머니라면 몸을 많이 안 움직여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웃어 넘긴다.

키린은 재일한국인을 연기한 적도 있다. 한국인 차별에 분노해 일본인 조직폭력배를 살해한 죄로 체포돼 24년간 복역한 재일한국인 김희로를 다룬 드라마 '김의 전쟁-라이플마 살인사건'(1991)에서 김희로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 캐릭터를 너무도 잘 소화해서였는지 방송 당시에는 '키키 키린은 재일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고 한다. 한국인 할머니를 어떻게 연기했기에 그런 소문까지 났을까.

"할머니 역할을 할 때는 늘 밑위를 길게 해서 다리 모양이 드러나지 않는 몸빼를 입는데, 나이를 먹은 한국 사람은 밑위가 짧아. 그게 포인트라고 생각해서 선로 장면은 그렇게 걸었어. 뒤병을 들고 걷는 실루엣이 누가 봐도 한국인이라는 소리를 들었지. 난 비교적 체형으로 커버하려는 면이 있어. (중략) (체형으로 연기한다는 뜻이냐는 고레에다의 질문에) 체형이지. 그야말로 절대적으로 체형이에요.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런 거야. 그래서 난 얼굴에 주름 같은 걸 그린 적이 없어. 언제나 체형이에요."

키키 키린, 평범하지만 허를 찌르는 매력의 배우

키키 키린은 거침 없는 발언으로 유명하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찍으면서는 주연배우 아야세 하루카에게 성형수술을 했냐고 물어보고, 고레에다 감독에게도 여배우에게 반한 경우가 있냐고 물어 당황케 한다. 남편인 가수 우치다 유야(1939~2019)에 대한 발언도 거침 없다.

키키 키린이 연기하는 어머니, 할머니는 늘 평범하면서도 허를 찌르는 매력이 있다. 때론 어린이처럼 짓궂은 장난을 치기도 하고 뜻밖의 강인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가 연기하는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매력을 지닌 인물은 어떻게 나왔을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캐스팅할 때 ‘이 역할은 평범한 느낌의 사람이면 좋겠어요’라고들 하지, 하지만 정말로 그런 사람을 데려다 놓으면 그저 ‘평범할’ 뿐이야. ‘평범한 사람의 매력’이 있어야만 하는데도. (중략) 분명 그 사람은 평소 모습 그대로지만, 영화 속에서 그 역할이 매력적으로 나오느냐 마느냐는 별개에요. 그런 데서 대부분 캐스팅이 실패하지. ‘평범한 역할’을 매력 있게 연기하는 건 귀찮은 작업이거든.”

“연기로 뭘 하려는 게 아니라, 자연스레 숨 쉬듯 그곳에 존재하는 거”

키린의 연기가 더욱 매력적인 것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데 있어서 독특한 매력을 드러내면서도 지극히 자연스럽게 극에 녹아들어서다. 식사 장면에서도 보통 여배우들은 음식을 많이 먹지 않지만 그는 음식을 입 안에 잔뜩 넣고는 자연스럽게 대사를 내뱉는다. 고레에다 감독의 감탄에 그는 "그렇게 안 하면 거짓말이 되거든"이라고 간단히 받아친다. "음식을 실제로 만드는 것, 혹은 실제로 먹는 것, 연기를 해나가면서 동시에 실제로 먹어나가는 것.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처럼 키린의 연기에는 영화적인 독특함과 TV드라마의 일상성이 공존하는데 이는 오랜 기간 TV 홈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체득한 것이다. 그는 “연기로 뭘 하려는 게 아니라, 자연스레 숨 쉬듯 그곳에 존재하는 거”라는 점을 강조했다.

고레에다 감독은 키키 키린이 종종 즉흥 연기로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면서 각본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줬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어느 가족’에서 키키 키린이 주인공 안도 사쿠라에게 “언니, 자세히 보니까 예쁘네”라고 말한다거나, 귤을 껍질도 까지 않은 채 베어 물고 알맹이를 갉아 떼어내듯 먹거나, 바닷가에서 가족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며 “고마웠어”라고 중얼거린 연기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키키 키린은 “반사적으로 불쑥 튀어나왔을 뿐”이라거나 “그렇게 깊은 뜻은 없었는데”라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 넘긴다. 그러면서도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를 제대로 느끼고 찍어주는 연출가가 드물다면서 고레에다 감독을 치켜세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 책은 수신되니 않는 연예편지"

키키 키린의 소탈한 성격은 대화 곳곳에서 드러난다. “나의 작품을 남기자거나 예술 작품이라거나 그런 사고방식이 없”다면서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재미있게 태연하게 살 수 있으면 된다는 식으로 오늘까지 살아온 인간”이라고 자신을 묘사한다. 소탈하고 '쿨'하며 유머러스하면서도 개성 넘치는 건 윤여정과 닮았다.

키린은 고레에다 감독과의 이별도 쿨하게 했다. ‘어느 가족’을 찍고 칸영화제에 다녀온 뒤 일본 개봉 첫 날 건강이 악화한 키린은 감독에게 안녕을 고했다. “이제 할머니는 잊고 당신은 당신의 시간을 젊은 사람을 위해 써. 난 더 이상 안 만날 테니까.” 그 후 키린은 감독의 요청에도 절대 다시 만나주지 않았다. 그로부터 석달 뒤 그는 고레에다 어머니의 기일이기도 한 9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영화 '어느 가족'에 출연한 키키 키린. 암투병으로 수척해진 상태였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촬영을 마쳤다.

고레에다 감독은 책을 마치며 이런 글과 함께 마음 속의 진한 그리움을 전했다.

“사랑해야 할 대상이 이제 여기에 존재하지 않고, 손에 닿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부재’를 그립게 여긴다. 이 ‘그리워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불행한 체질의 인간이 작가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뜻에서 이 책은 나에게 이제는 수신되지 않는 ‘연애편지’일 것이다.”
키키 키린의 말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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