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40] 어떤 낡음은 아름답다

채민기 기자 2021. 4. 16.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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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았어도 단정하게 관리한 옷차림
자신을 가꾸는 삶의 태도 드러내
공직자들의 망가진 구두와 가방
청렴 아닌 국민 앞에 無禮 아닌지
손질을 마친 코도반 부츠와 관리용 도구들. 구둣솔 앞쪽으로 주름을 펼 때 쓰이는 디어본(deer bone·사슴 정강이 뼈)이 보인다.

이 칼럼의 마감을 앞두고 노트북과 씨름하던 늦은 밤. 구두라도 닦아 볼까 싶어 신발장을 열었다. 구두를 닦는다는 건 정직하게 몸을 움직여 작지만 빛나는 성과를 이룩하는 행위이며 거기엔 어딘가 명상적인 구석이 있다. 반질반질하게 광이 올라올 때까지 구두를 문지르다 보면 어지러웠던 생각이 이윽고 정리되는 것이다.

검은색 부츠를 집어들었다. 처음에 발목이 끊어질 듯 아파 붕대를 감고 신었던 신발이 지금은 거짓말처럼 길이 들었다. 이제 안창에 발바닥 모양대로 굴곡이 생겨서 정말 내 신발 같다. 바닥 안쪽에 부드러운 코르크를 채우는 굿이어웰트 제법의 구두는 체중을 견디며 이렇게 변해 간다.

사슴 뼈도 꺼냈다. 신발장에 이런 물건이 들어 있는 이유에 대해선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이번에 닦은 부츠가 코도반(cordovan)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말 엉덩이 부분의 가죽인 코도반은 소가죽보다 밀도가 높아 구두 발등의 주름이 다른 모양으로 잡힌다. 소가죽이 주름살처럼 조글조글해진다면 코도반은 굵게 물결치듯 주름진다. 이걸 사슴의 정강이 뼈로 문질러 펴는 것이다.

이 작업은 조금 주의하면 다른 막대기로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적당한 기름기를 머금어 가죽을 보호해 준다는 스코틀랜드산 사슴 뼈가 어엿한 구두 손질 도구로 취급된다는 사실에 매료돼 주문 버튼을 눌렀던 것이다. 야밤에 사슴 정강이 뼈로 말 엉덩이 가죽을 문지르면서 앞으로 내 걸음걸이를 닮은 주름이 발등에 멋지게 잡히길 기대했다.

와인이나 위스키처럼 패션도 숙성되는 것이다. 패션 분야를 취재하면서 전문가들에게 어떤 옷이 멋진 옷이냐고 물어볼 기회가 있었다. 상당수가 ‘사람과 함께 익어온 옷’이라고 했다. 수사(修辭)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체형 따라 알맞게 잡힌 면 재킷의 주름, 세탁을 거듭하며 톤이 달라진 청바지의 워싱(물빠짐), 매만질수록 깊어지는 구두의 광택. 이런 것들로 인해 공장에서 나온 기성품이 세상에 하나뿐인 물건이 된다.

멋지게 낡은 옷에선 삶을 대하는 태도가 드러나기도 한다. 영국의 찰스 왕세자는 남성복의 전범(典範)과도 같은 왕실 일원이지만 그의 패션이 화제가 되는 것은 짜깁기한 양복이 포착되는 순간이다. 그것 또한 모종의 이미지 메이킹일 수도 있으나, 완벽하게 재단된 재킷 자락을 공들여 수선한 흔적을 보면서 나는 아끼는 물건에 애정을 쏟는 인간적 면모를 느낀다. 일본의 구두 손질 장인 하세가와 유야는 저서에서 가죽이 갈라진 구두에 다른 가죽을 덧대 새 디자인으로 재탄생시키는 기법을 ‘찰스 패치’라고 소개했다. “찰스 왕세자가 이런 방법으로 아끼는 구두를 수십년씩 신었다”는 설명과 함께.

높은 분들의 뒤축 떨어진 구두와 해진 가방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것이 의도적 연출이었는지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그랬다면 너무나 서글픈 일이고 아니었다 해도 씁쓸하기는 마찬가지다. 낡은 정도를 넘어 물건이 망가진 채로 그냥 다닌다는 건 적어도 그 방면으로는 자기 관리가 안 됐다는 얘기일 뿐이다. 더구나 고위 공직자가 그런 차림으로 공식적인 자리에 서는 것은 청렴 아닌 무례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반바지나 슬리퍼였다면 분명 태도 논란이 일었을 텐데 구두와 가방은 엉망이어도 상관없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구두코에 조금씩 윤이 나기 시작했다. 20년, 30년 뒤에 ‘명품 구두를 신는 사람’보다 ‘초년병 때 장만한 구두를 여전히 깨끗하게 신고 다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어느 정도 성공적인 삶이었다고 자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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