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에 발탁돼 노무현의 길 걸어온' 김영춘의 도전

김광수 2021. 4. 1.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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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4·7 재보궐선거]YS 비서로 정치 입문한 열린우리당 창당 주역
지역구도 타파 위해 가족 설득해 험지 부산행
'유리할 때 양보-어려울 때 출마' 선택의 연속
김영춘 더불어민주당 부산시장 후보가 지난 25일 출정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김영춘 캠프 제공
2~3일 사전투표를 앞두고 4·7 부산시장 보궐선거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정치입문 뒤 활동과 자서전, 인터뷰 등을 종합해 김영춘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박형준 국민의힘 후보가 각각 어떤 사람인지 살펴봤다.
▶관련기사 : ‘진보 출신 보수논객’ MB맨 박형준은 성공할까 
http://www.hani.co.kr/arti/area/yeongnam/989239.html

’정치적 스승은 와이에스(YS·김영삼)지만 노무현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

김영춘(59) 더불어민주당 부산시장 보궐선거 후보가 지난해 12월 펴낸 자서전 <고통에 대하여>를 보면, 오늘날 정치인 김영춘을 만든 이는 와이에스와 ’바보 노무현’이다.

김 후보와 와이에스는 1984년 11월 서울지역 대학생 264명의 민정당사 점거농성을 계기로 만났다. 당시 김 후보는 고려대 총학생회장이었고 와이에스는 전두환 군사정권에 맞서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공동의장이었다. 당시 점거농성을 기획한 김 후보를 포함해 19명이 구속됐는데, 이듬해 2월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키면서 조기석방됐다. 와이에스가 석방된 이들을 불러 점심을 사주면서 격려했고, 이때 와이에스의 비서가 김 후보에게 정치 입문을 권유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 후보는 이를 거절했다.

이후 인천에서 1년 가까이 노동운동을 하던 김 후보는 1986년 12월 와이에스를 다시 찾았다. “노동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직선제 개헌 투쟁을 하고 싶다”는 26살 청년은 그렇게 와이에스의 막내 비서가 됐고, 이후 한해 동안 6월 민주항쟁과 양김(김영삼·김대중)의 분열, 노태우 대통령 당선을 지켜봐야 했다. 와이에스는 1988년 4월 총선 출마를 권유했지만, 김 후보는 “직선제를 이뤘으니 이제 공부를 하겠다”며 고려대에 복학했다.

1990년 1월 와이에스가 노태우(민정당), 김종필(신민주공화당)과 손잡고 3당 합당을 선언하자, 김 후보는 와이에스를 찾아가 이별을 알렸다. 1년 뒤 와이에스가 만나자고 연락했다.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민자당)을 만들고 당대표가 됐지만 주류인 민정계의 견제에 시달리며 ‘차기’가 불안해지던 와이에스는 “자네가 좀 도와줘야겠다. 내가 요즘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 후보는 와이에스 손을 잡았다.

“침몰하는 배에 올라탄다며 지인들이 만류했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함께한 동지들은 배신자라고 했지만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와이에스는 1992년 12월 디제이(DJ·김대중)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고, 그는 정무비서관이 돼 와이에스를 보좌했다. 1996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와이에스는 또다시 출마를 권유했다. 신한국당에 입당해 서울 광진구갑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4년 뒤 같은 지역구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승리를 거뒀다.

김영춘 더불어민주당 부산시장 보궐선거 후보가 지난 1월 6일 자서전 <고통에 대해여> 온라인 출판기념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김영춘 캠프 제공

“노무현 대통령이 보궐선거에서 당선됐던 서울 종로구를 버리고 2000년 부산으로 가 국회의원에 도전하는 것을 보면서 부채의식을 느꼈습니다.”

김 후보는 2003년 정치경로를 바꾸는 선택을 한다. 지역주의에 도전하겠다며 이우재·김부겸·안영근·이부영과 함께 보수정당 품에서 뛰쳐나와 열린우리당 창당에 합류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들을 ‘독수리 5형제’라고 불렀다.

주변의 우려가 많았지만 그는 “재선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해서 신바람이 났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손잡고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했고, 그 역풍으로 열린우리당은 과반(152석) 의석을 차지한 1당이 됐다. 하지만 초선이 3분의 2가 넘었던(108명) 신생정당은 혼돈을 거듭하며 수권 여당의 구실을 못해냈고 2007년 8월 간판을 내려야 했다. 열린우리당의 마지막 사무총장이던 그는 2008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누군가 책임져야 했습니다. 제가 총대를 메기로 하고 정치를 접겠다고 생각했지요.”

김영춘 더불어민주당 부산시장 보궐선거 후보가 부산 사하구 개금골목식당에서 마스크를 쓰고 상인들과 인사하고 있다. 김영춘 캠프 제공

정치와 거리를 두며 국내·외를 돌아다니던 김 후보는 2009년 몽골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바로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로 달려가 상주로 장례식장을 지켰다. 그곳에서 지역주의 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했던 노무현의 뜻을 다시 이어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2010년 민주당 지명직 최고위원이었던 그는 험지인 부산에서 출마를 선언했다. 노무현이 갔던 길이었다. 아내가 반대했고 중1이던 아들은 프로야구 엘지트윈스 팬인데 롯데자이언츠 팬이 될 수 있냐고 투정을 부렸다. 2011년 홀로 부산에 내려왔고 이듬해 아내와 아들도 합류했다.

주변에서는 그나마 민주당세가 있는 북·강서·사하구나 젊은층이 많은 해운대구를 권유했지만, 그는 노인층이 많고 보수세가 강한 부산진구갑을 선택했다. 결과는 씁쓸했다. 그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지역부터 바꾸고 싶었다. 지금도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김 후보는 1962년 부산 부산진구 부암동에서 쌀집 아들로 태어났다. 자전거에 쌀을 싣고 부암동 일대를 누볐다. 부산에서 초·중·고를 마치고 재수 끝에 고려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단과대학 수석이어서 4년 장학금이 보장됐지만 그는 전두환 등 신군부의 광주시민 학살에 분노하며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장학금은 1년으로 끝났다.

흔히 정치인에게 양보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자주 양보했다.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부산시장 후보가 됐지만 오거돈 무소속 후보를 밀었다. 지방정권 교체가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 후보는 1.31%포인트 차이로 낙선했다. 아름다운 양보를 하는 모습을 눈여겨본 부산진구갑 유권자들은 2년 뒤인 2016년 4월 총선에서 김 후보를 선택했다.

2016년 4월 총선이 끝난 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호남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참패해서 농어촌에 지역구를 둔 3선 이상 국회의원이 없다”며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연락했지만 거절했단다. 지역구인 부산진구갑이 바다를 끼고 있지 않아 관련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서병수 당시 부산시장에게 전화해 “내가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장을 맡으면 부산 발전에 도움이 되겠냐”고 물었고, 서 시장은 “무조건 도움이 된다”고 했다고 한다. 그는 ”내 선거에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동북아해양도시를 꿈꾸는 부산 발전을 위해 수락했다”고 말했다.

2018년 부산시장에 다시 도전하기로 결심했지만, 이번엔 당에서 불출마를 요구했다. 부산시장 출마를 위해선 국회의원직을 던져야 하는데 험지인 부산에서 1석이라도 더 지켜야한다는 논리였다. ‘해운산업 재건을 위한 5개년 사업’ 등 해양수산부 장관으로서 추진해오던 업무들도 마음에 걸렸다. 결국 그는 불출마를 선언했고, 민주당에 입당한 오거돈 후보가 18%포인트 차이로 재선을 노리던 서병수 자유한국당 후보를 눌렀다. 지방자치제 실시 뒤 23년 만에 이뤄진 부산에서의 첫 지방정권 교체였다.

김영춘 더불어민주당 부산시장 후보 주요 경력과 공약

김 후보는 지난해 4월 총선에서 또 분루를 삼켰다. 미래통합당 서병수 후보에게 3.5%포인트 차이로 졌다. 그는 “내가 자만했고 부족했다”고 말했지만 부산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으며 부산 곳곳을 돌아다녀 자신의 선거에 집중하지 못한 것도 패배의 원인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그는 이번 부산시장 보궐선거에도 가시밭길을 걷고 있다. 정권 후반기 여당 후보인데다 여당에 귀책사유가 있는 보궐선거였지만, 당의 요구에 국회 사무총장을 6개월 만에 내려놓고 불길로 뛰어들었다.

김 후보는 윗사람에게 쓴소리도 거침없이 한다. 와이에스나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할 말은 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마음고생도 많았다고 한다. 사람과의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명분 없는 일에는 타협을 하지 못하는 스타일도 여기에 한몫 한다.

김 후보를 아끼는 사람들은 “유리한 정치지형일 때는 양보하고 불리한 정치지형일 때만 나선다. 권력 의지가 약하다”고 말한다. 이에 그는 답한다.

“지역구도를 허물고 지역균형 발전을 위해서라면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필요하다면 또 양보할 것입니다.”

다만 그의 아름다운 도전을 응원하는 사람들은 부산보다 서울에 더 많은 듯하다.

부산/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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