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감수자도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2021. 4. 1. 03: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외국 영화를 원제 그대로 개봉하곤 하는 한국과 달리 중국은 외화 제목을 철저히 번역한다. 대개는 원제에 충실한 직역이거나 직관적으로 이해 가능한 의역이다. ‘어벤저스’는 ‘복수자들’, ‘캡틴 아메리카’는 ‘미국 대장’, ‘헐크’는 ‘녹색 거인’, ‘토르’는 ‘뇌신’이다. ‘브레이브 하트’는 ‘용감한 마음’, ‘킹덤 오브 헤븐’은 ‘천국왕조’, ‘마션’은 ‘화성 구원’으로 번역했다. 만화도 예외가 아니다. ‘라이언 킹’은 ‘사자왕’, ‘라푼젤’은 ‘장발 공주’다. 원제 그대로 개봉한 외화는 극히 드물다. ‘해리포터’를 ‘하리보더’로 번역한 정도가 고작이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이 같은 현상은 외래어 사용을 기피하는 중국의 독특한 어문정책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어를 모르는 관객이 많아서이기도 하다. 우리도 영어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 많았던 예전에는 외화 제목을 완전히 우리말로 번역했다. 그러다가 교육 수준이 점차 높아지면서 원제 그대로 개봉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아마 중국도 차차 우리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싶다.

중국의 외화 제목 번역은 다소 억지스러워 실소가 터질 때도 있지만, 간혹 고사성어를 이용한 절묘한 번역으로 감탄을 자아내기도 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긴 제목을 의지할 데 없는 노인이라는 옛말 ‘노무소의(老無所依)’로 축약한 것도 그중 하나다. 최근 본 것 중에는 ‘감수자도(監守自盜)’가 눈에 띈다. 풀이하자면 ‘살피고 지켜야 하는 사람이 스스로 훔친다’는 말이다. ‘감수자도’의 원제는 ‘아머드(armored)’, 현금수송차로 쓰는 장갑 트럭이다. 현금수송업체 직원들이 현금수송차를 탈취한다는 줄거리의 영화다. 현금수송차 습격은 그다지 새로운 소재가 아니다. 다만 일확천금을 노리는 무법자가 현금수송차를 노리는 이전의 영화와 달리, 이 영화에서는 현금수송차를 지켜야 할 직원들이 되레 도둑질을 한다. ‘감수자도’라는 번역은 이 점을 강조한 것이다.

‘감수자도’는 본디 <한서> ‘형법지’에서 유래한 법률용어다. 쉽게 말해 도둑질의 일종이다. 도둑질이라고 다 같은 도둑질이 아니다. 남을 위협해서 물건을 빼앗으면 강도, 남몰래 훔치면 절도, 그리고 관리 책임자가 공금을 훔치는 것이 감수자도다. 감수자도는 책임을 저버리고 신뢰를 배반하는 짓인 만큼 처벌 수위도 높다. 조선시대 형사사건 지침서 <대명률>에 따르면 감수자도범은 주범과 공범을 막론하고 오른쪽 팔뚝에 관청의 재물을 훔친 도둑이라는 문신을 새겼다. 처벌은 훔친 액수에 따라 달라지는데, 단순 절도 사건에 비해 처벌 수위가 갑절로 높았다. 단순 절도범은 80관 이상의 금액을 훔쳐야 사형에 처하지만, 감수자도범의 경우 그 절반만 훔쳐도 사형이다. 관리자가 책임을 저버린 죄를 무겁게 물었던 것이다.

옛날과 달리 지금은 관리자가 범죄를 저질러도 딱히 가중 처벌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런 법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만, 관행이라느니 그간의 공로를 참작한다느니 하는 핑계로 오히려 처벌이 가벼워지는 것이 현실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번 LH 사태 역시 이렇게 매듭지어지지 않을까 싶다. 정부는 토지를 몰수하겠다느니 이익을 환수하겠다느니 큰소리치지만,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다. 증거를 확보하는 것부터가 난관이다.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뒷북 대응이라는 비난은 피하기 어렵다.

대규모 개발 예정지에는 사전 정보를 입수한 투기꾼이 판을 치는 법,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다. 유독 이번에 국민적 분노가 들끓는 것은 그 투기꾼이 다름 아닌 서민 주거 안정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은 LH 임직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서다. 전형적인 감수자도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정부의 주장대로 건국 이래 켜켜이 쌓인 적폐이며 누적된 관행이다. 그렇다고 책임이 가벼워지는 건 아니다. 그 적폐와 관행은 현 정부가 집권한 지난 4년 동안에도 변함없었다. ‘적폐 청산’이라는 구호가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