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수의 지식카페>유라시아 문화 꽃 피운 세계 첫 메트로폴리스.. 그 중심에 詩가 있었다

기자 2021. 3. 15.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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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탑에서 내려다본 시안(西安·옛 장안) 풍경. 대안탑은 당 고종이 어머니를 기려 세운 자은사에 있다. 현장이 서역에서 불경을 갖고 돌아왔을 때 이를 보관하려고 세웠다. 높이가 7층 64m에 이르며, 탑에서 장안성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위키미디어
대안탑의 야경. 진사들은 대안탑 아래에 영원히 이름을 남기는 영예를 누렸다. 백거이는 급제 후 너무 기뻐서 이런 시를 남겼다. “자은탑 아래 이름 남기는 곳이 있는데,/ 열일곱 명 중 내가 제일 어리네.” 위키미디어

■ 장은수의 도시와 문학 - ② 동아시아 수도 이상형 長安

당나라는 詩의 제국…‘인간의 정신·일상·정서’ 이전 어떤 문명도 못 해낸 풍부하고 생생한 기록 남겨

문명의 극치 일군 詩 융성은 어려웠던 과거시험 영향… 詩聖 두보도 10년간 실패하고 절망에 빠져

당나라 장안(長安)은 동아시아 수도의 이상형이다. 하늘의 질서가 완벽히 구현된 황제의 도시이고, 세상의 부가 몰려들어 쌓이는 황금의 도시이고, 사시사철 시와 노래와 춤이 어우러지는 축제의 도시이고, 유교·도교·불교·마니교·조로아스터교·기독교·이슬람교 등의 사원이 영혼을 돌보던 종교의 도시이다.

618년 수나라를 무찔러 중국의 지배자로 올라선 당나라는 연이어 주변 국가를 복속했다. 동돌궐을 쳐서 몽골을 차지하고, 고구려를 멸망시켜 만주를 얻었으며, 서돌궐을 정복해 서역의 지배권을 확보함으로써, 동서양을 연결하는 세 갈래 길, 육상 및 해상 실크로드와 초원길을 장악했다.

동으로 중원 가는 길은 멀리 신라까지 이어졌고, 서로는 실크로드가 사마르칸트를 거쳐 페르시아·로마로 연결됐으며, 남으로 진령을 넘으면 사천 거쳐 동남아로 길이 뻗었고, 북으로 황토 고원을 지나면 초원길이 열렸다. 8세기 초 전성기 장안은 유라시아 경제·문화 교류의 중심이었고, 진정한 의미로 ‘세계 최초의 메트로폴리스’였다.

시절은 태평해서 사람 살기 좋았다. 물가는 낮아 사지 못할 만큼 비싼 물건이 없었고, 치안은 안정돼 먼 곳을 여행해도 칼 한 자루 필요 없었다.

장안에는 세상 모든 것이 있었다. 장강(長江) 이남 지방이 크게 개척되면서 역참과 운하를 거쳐 풍부한 물산이 밀려들고, 페르시아·로마·베트남·캄보디아·인도·신라·일본 등 무려 300개 국가에서 상인, 유학생, 이민자들이 찾아와 장안에 자리 잡았다. 한때 장안 인구 100만 명 중 3분의 1이 소수민족과 외국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장안의 길’에서 왕정백은 말한다. “새벽 북소리에 사람들 이미 다니는데, 저녁 북 울려도 그칠 줄 모르네. 산 넘고 물 건너 만국에서 찾아와, 다투면서 먼저 황금과 비단을 바치려 하네.”

문을 닫아건 나라는 한때의 작은 번영에 만족하다 망하기 쉽고, 민족·종족에 상관없이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는 나라만이 큰 나라로 성장하는 법이다. 진(秦)나라 이사의 말처럼, “태산은 흙을 사양하지 않아서 큰 산을 이루고, 황하는 시냇물을 가리지 않아서 깊은 강을 이룬다.” 이것이 ‘제국으로 가는 길’이니, 이후의 제왕들이 장안에서 정작 본받을 것은 황금빛 궁전과 반듯한 거리가 아니라 그 길을 가득 메운 다양한 사람들이었다.

놀라운 개방성과 함께 새로움을 선호하는 유행이 형성되자 장안은 융성했다. 보석, 상아, 산호, 카펫, 향료 등 귀한 물건이 넘쳐나는 가운데 호풍(胡風)이라 불리는 이국 문화가 꽃을 피우고, 손님 끄는 등롱과 깃발이 거리를 장식했으며, 극도로 우아하고 세련된 취향이 장려됐다. 왕유(王維)·이백(李白)·두보(杜甫)·한유(韓愈)·백거이(白居易)·유종원(柳宗元) 등 문인들이 종이값을 올리고, 구양순(歐陽詢)·안진경(顔眞卿)의 글씨와 이구년(李龜年)의 노래가 혼을 홀리며, 아름다운 여인들이 눈부신 화장술과 화려한 춤 실력을 자랑했다. 동서양 문화가 하나로 융합되면서 일찍이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절정의 세계 문화인 당풍(唐風)이 일어났다. 모든 제국은 힘으로 일어서고 문화로써 정복한다. 비단·도자기·종이 등 전 세계로 퍼져나간 당풍은 만국이 본받고 싶은 문명의 극치였다. 그 중심에 언어, 즉 시(詩)가 있었다.

당나라는 ‘시의 제국’이었다. 청나라 때 편집된 ‘전당시(全唐詩)’에는 무려 5만 편 가까운 시가 담겨 있다. 이전의 어떤 문명도 시민의 일상과 정서에 대해 이토록 생생하고 풍부한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당시(唐詩)에는 인간 전체가 있었다. 시인들은 정신의 높이와 깊이, 출사의 포부와 은일의 여유, 문명의 일어섬과 스러짐, 자연의 아름다움과 허망함, 한낮의 쾌활한 축제와 한밤의 쓸쓸한 귀가, 야박한 민심과 피맺힌 가난, 전쟁의 고통과 민중의 피폐 등을 노래했으며, 덧없는 꽃으로부터 영원한 아름다움을, 번잡한 인간세에서 하늘의 도를 닮은 고상한 정신성을 끄집어냈다.

시의 융성은 과거시험 덕분이다. 당나라에서는 시를 잘 써야 관리가 될 수 있었다. 매번 수천 명이 응시해 10∼30명 정도 합격했으니 “봉황 무늬 옷을 입은 관리들의 행렬”에 끼려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갖은 노력에도 천하의 두보조차 10년 동안 취직에 실패했다. 취업한 친구들은 “부드러운 갖옷과 날쌘 말”로 겨울을 맞는데, 두보는 “뼈저리는” 추위에 슬퍼했다. 절망한 두보는 탄식한다. “한 걸음 더 가면 곡강(曲江)인데/ 한 걸음 걷기가 너무나 어렵구려.”(‘중양절 잠삼에게 보내다’)

곡강은 장안성 동남쪽에 있던 아름다운 인공호수 이름이다. 남쪽에는 자운루(紫雲樓)와 부용원(芙蓉園)이, 서쪽에는 행원(杏園)과 자은사(慈恩寺)가, 자은사에는 높이 솟은 대안탑(大雁塔)이 있었다. “꽃과 풀이 사방을 둘러싸고 안개 낀 강물이 아름다운” 승경(勝景)이었다. 황제는 봄마다 진사시험 합격자를 대상으로 곡강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황실 가무단을 내보내서 흥을 돋우고, 호수에 아름다운 배를 띄워 옥기린 같은 인물들을 선보였다. 위엄을 과시하며 충성을 유도하는 세련된 통치였다. 잘 차려입고 밝은 달 아래에서 “꽃을 대하고 앉아 새깃 모양 술잔을 주고받”(이백, ‘춘야연도리원 서’)은 후, 대안탑으로 몰려가 벽돌에 이름을 남기는 게 선비의 평생 꿈이었다.

곡강 연회가 있을 때 장안 사람 모두가 강변에 나와 봄볕 속에서 축제를 벌였다. 이들의 꽃 사랑은 유별났다. 합격의 감격을 노래하는 시조차 꽃구경이 핵심이었다. “봄바람에 득의양양해 말 타고 질주하면서 하루 만에 장안의 모든 꽃을 다 본다.”(맹교, ‘과거 급제 후’) 여성들 역시 꽃으로 재주를 겨뤘다. 봄이면 정성스레 가꾼 꽃을 내놓고, 아름다움을 다투는 투화(鬪花)가 성행했다.

세련이 목숨만큼 소중했으니 나들이는 한껏 꾸며야 했다. 양귀비의 사촌오빠 양국충은 특히 요란했다. 수레를 금과 옥으로 장식하고, 누대를 올려서 비단을 둘러 꾸민 후 악공 수십 명을 태워서 춤추고 노래하게 했다. 봄이면 장안 거리엔 이런 수레들이 넘쳤다.

자기 치장도 중요했다. “장안 물가에는 미인도 많네./ 피부 결은 부드럽고 매끈하며 몸집은 아담한데,/ 수놓은 비단옷에 늦봄 햇살 비추니,/ 주름 잡힌 금 공작, 은 기린이 눈부시네.”(두보, ‘미인의 노래’) 여인들은 옥 매미 장식과 금비녀를 세 겹으로 꽂고, 머리카락 사이사이는 진주들로 가득 장식했다. 수시로 유행이 바뀌는 장안에서 미인 되기는 힘들었다. 자신을 꾸미는 수련을 끝없이 요구했다. 여인들은 유행에 처져 비웃음당할까 두려워했다. “화장 마치고 나직한 목소리로 남편에게 묻나니/ 눈썹의 짙고 옅음이 유행에 맞나요.” 평생 긴장을 풀지 못하고 유행의 첨단에 서야 하는 도시, 그것이 장안이었다.

당나라 300년 역사는 기이하다. 초당(初唐)-성당(盛唐)-중당(中唐)-만당(晩唐)으로 나뉜다. 장안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낙유원(樂游原)에 올랐을 때 이상은은 예감했다. “석양은 아름답기 그지없으나, 다만 황혼에 가깝구나.” 열흘 붉은 꽃은 없었다. 장안은 절정의 아름다움(성당)에서 곧바로 낙화했고, 여력으로 150년을 이어갔다. 측천무후 일족을 무찌르고 황제에 오른 현종의 집권 반세기 동안이 성당(盛唐)이다.

현종은 정치를 잘했다. 아름다운 건물을 올려서 도시를 꾸미고, 축제를 장려해 일상을 풍요롭게 했다. 사랑도 알았다. 현종과 양귀비 두 사람은 “하늘에선 날개를 나란히 하고 나는 새가 되고 땅에선 가지가 연결된 나무가 되”(백거이, ‘장한몽’)기를 꿈꿨다. 꽃 좋고 물 맑은 남산에 화청궁(華淸宮)을 지어서 “따뜻한 부용꽃 휘장을 치고” 달밤에 둘이 온천을 즐겼다. 미인은 ‘배달 음식’을 즐겼으니, 멀리 사천 땅 신선한 여지를 맛보고자 백성들을 밤낮으로 달리게 했다. 새벽 배송은 언제나 극한의 사치일 뿐. 현종은 미인의 입에 열매가 담기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으나, 그것이 서민의 고통을 삼키는 것인 줄 몰랐다.

안녹산이 난을 일으켜 북소리가 땅을 흔들며 몰려오자 갑자기 파멸이 찾아왔다. 양귀비 잘못이 아니다. 사치가 부패를 낳으면서 지배계급 내부의 투쟁이 격화되고, 세금이 증가하면서 땅을 잃고 떠도는 농민들이 늘어나 통치가 한계에 부닥쳤을 뿐이다. 곡강에서 두보는 폐허가 된 장안성을 보면서 울먹였다. “밝은 눈동자 흰 치아의 미인은 어디에 있는가./ 피에 더러워져 떠도는 혼 돌아오지 못하는구나.”(‘슬픈 강가에서’) 장안의 종말이었다. 이후, 역사의 무대는 강남으로 넘어갔고, 장안은 결국 성세를 회복하지 못했다.

문학평론가

■ 당나라에서는 왜 시로 관리를 뽑았을까.

당나라 과거에는 크게 진사(進士)와 명경(明經) 두 종류가 있었다. 명경은 경전 내용을 시험했고, 진사는 시를 통해 능력을 살폈다. 머리 좋으면 누구나 잘하는 명경보다 통찰력과 창의력을 겸비한 진사가 출세에 유리했다. 요직에 배치돼 고위직에 오를 확률이 높았다. 당나라 재상의 90%는 진사 출신이었다. 응시자는 이름을 알리려고 명소에 시를 걸어두거나 행권(行卷)하면서 고관들한테 바쳤다. 평판이 높아야 급제에 유리했으니 다투어 좋은 시를 쓰려 했다. 시는 창조성을 시험하는 훌륭한 도구였다. 첸무(錢穆)가 밝혔듯, 정해진 글자 수에 엄격한 율격을 지키면서 포부를 보이려면 고사와 전고를 자유로이 활용해야 했고, 이것은 문제의 핵심을 꿰뚫는 사고력, 경전과 역사에 대한 지식, 고매한 사고와 인간 이해가 뒷받침돼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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