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의 꽃이야기] 매화 핀 섬진강에서 김용택 시인 만나다

김민철 논설위원 2021. 3. 9. 07: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나 찾다가/텃밭에/흙묻은 호미만 있거든/예쁜 여자랑 손잡고/섬진강 봄물을 따라/매화꽃 보러 간 줄 알그라>

섬진강 강가에 있는 김용택 시 '봄날' 시비.

지난 주말 섬진강으로 꽃구경 갔다. 섬진강변을 걷기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차도 타면서 완주했다. 상류는 기세 좋게 자전거로 이동했다. 이제 막 매화가 피고 있었다. 고혹적인 향기가 날 때마다 돌아보면 매화가 피어 있었다. 자전거길 곳곳엔 김용택 시인의 시가 돌에 새겨져 있었다. 위 시 ‘봄날’도 그중 하나였다. 요즘에 딱 어울리는 시였다. 내 눈은 산기슭과 강변을 번갈아 보며 꽃을 찾느라 바빴다. 덕분에 만개한 길마가지나무 꽃도 찾았다.

섬진강 강가에 핀 매화.

임실군 덕치면 섬진강댐 인증센터에서 7㎞쯤 내려가니 김용택 시인문학관이 있었다. 자전거에서 내려 둘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김용택 시인의 생가와 서재, 문학관인 ‘회문재’가 있었다. 염치없이 이곳저곳 기웃거렸으나 시인은 보이지 않았다. 서재 옆 화단엔 복수초가 활짝 피어 있었다.

여기가 시인의 생가라면 시인의 시에 나오는 ‘그 여자네 집’도 근처에 있을 것 같았다. 시엔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던 집’, ‘살구꽃 피는 집/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꽃잎이 하얗게 담 넘어까지 날리는 집’ 같은 대목이 있다. 살구나무와 은행나무가 같이 있는 집을 찾아보았지만 근처에선 보이지 않았다.

자전거로 10㎞쯤 더 내려갔다가 차로 돌아오는 길에 혹시나 하고 다시 문학관에 들러보았다. 뜻밖에도 김용택 시인이 회문재 마루에 앉아 동네 주민과 얘기하고 있었다. 인사를 했더니 과객인데도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침에 전주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오다가 시 ‘봄날’을 보았다고 하니 “그 시 보았다는 사람이 많다”며 “군청에서 나와 상의도 않고 여기저기에 만들어놓았다”고 겸연쩍어했다. 시인은 “이쪽은 올해 매화가 느린 편이다. 아래로 내려가면서 구례 산수유마을, 화엄사 매화, (광양) 매화마을을 봐야지”라고 했다. 실제 일정이 그랬다.

섬진강을 배경으로 선 김용택 시인(오른쪽)과 필자.

시인은 “전엔 꽃들이 피는 순서를 기다렸다. 산에선 생강나무가 먼저 피고 그 다음엔 진달래가 피었다. 꽃가루받이 벌레를 차례로 기다린거다. 요즘엔 순서가 뒤죽박죽이다. 무질서해졌다”고 했다.

궁금한 그 여자네 집을 물으니 거긴 윗동네라고 했다.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시에 나오는) 은행나무는 베어졌고 살구나무는 고목이라 꽃이 피었다 안피었다 하더라”고 했다.

박완서 선생님이 생전 이곳에 다녀갔고 홍쌍리 매화마을을 안내한 얘기도 꺼냈다. 박완서 선생님은 시인의 시 ‘그 여자네 집’에서 착안해 일제 위안부 얘기를 다룬, 같은 제목의 단편을 썼다. 시인은 “선생님이 나물 좋아하신다고 해서 15가지 나물을 준비했는데 소식하시더라. 먹는게 까시랍더만”이라고 했다. 그 즈음이었을까. 시인의 글과 강연을 보면 박완서 선생님과 이런 일화가 나온다.

<애들 시를 교실 게시판에 붙여놓았다. 박완서 선생님이 오셔서 보다가 한 시를 보더니 “김 선생 이리 와봐요. 이놈은 진짜 시를 잘 쓰네. 나중에 커서 훌륭한 시인이 되겠어요.” “선생님, 그건 제 시인데요.” 박완서 선생님은 박장대소했다.>

‘콩, 너는 죽었다’라는 시였다. 시인은 “작가들이 봄에 피는 꽃을 가을에 피워놓거나 소쩍새를 겨울에 울게 하는 경우도 있다”며 “박완서 선생이면 잘 알아보고 썼을 것”이라고 했다.

시인과 인사를 나누고 도착한 구례 산동면 산수유마을은 노란색을 마구 칠해놓은 듯 했다. 산수유는 지금부터 절정인 것 같았다. 10여년 전 온 적이 있는데 그때보다 산수유 나무 수가 몇배는 늘어난 것 같았다. 원좌마을 옆에 서니 저 멀리 앞산 중턱까지 온통 산수유 밭이다.

산수유는 사진으로 담기 참 어려운 꽃이다. 김훈은 에세이 ‘꽃 피는 해안선’에서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고 했다. 그래서 산슈유는 한두 송이가 아니라 무리로 담아야 꽃이 핀 분위기를 살릴 수 있다.

구례 산수유마을 산수유가 만개했다.

화엄사 각황전 홍매화는 피기 시작했지만 아직 좀 일렀다. 내 관심은 이 매화보다 길상암 앞 들매화에 가 있었다. 들매화는 문화재청이 지정한 매화 천연기념물 4개 중 하나다. 물어물어 이 들매화를 찾아갔다. 길상암 앞 대나무 숲에 있었다. 대부분 매화는 접붙인 것인데, 이 매화나무(수령 450년 추정)는 매실 과육을 먹고 버린 씨가 싹터서 자란 나무여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것이다. 꽃과 열매가 다른 매화보다 작지만 꽃향기는 오히려 더 강한 것이 특징이다. 과연 멀리서도 매화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화엄사 길상전 앞 들매화가 듬성듬성 피어 있다. 천연기념물 485호다.

섬진강을 따라 내려가 화개장터에 이르니 봄기운이 완연했다. 눈길 가는 곳 어디나 하얀 매화 아니면 노란 산수유였다. 이른 것은 개나리도 피고, 백목련도 흰 꽃잎이 보여 금방이라도 벙긋 피어날 것 같았다. 화개장터에선 상인들이 내놓은 꽃 핀 매실나무나 서향(천리향) 등에서도 봄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었다.

화개장터에서 파는 꽃들. 왼쪽부터 복수초, 매실나무, 서향(천리향) 등이 있다.

광양 매화마을 가는 길은 차가 많이 막혔다. 차를 주차하고 자전거를 다시 꺼냈다. 달리는 내내 매화 향기가 밀려왔다. 매화마을 매화는 지금이 절정이었다.

광양 매화마을 매화가 만개했다. 멀리 보이는 강이 섬진강이다.

◇조선일보는 매일 아침 재테크, 부동산, IT, 스타트업, 의학, 법, 책, 사진, 영어 학습, 종교, 영화, 꽃, 동물, 중국, 영국, 군사 문제 등 21가지 주제에 대한 뉴스레터를 이메일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구독을 원하시면 <여기>를 클릭하시거나, 조선닷컴으로 접속해주세요.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