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이 '아주머니'라 불리는 그들은..오늘도 '노회찬 버스' 첫차에 올랐다

오경민 기자 2021. 3. 8.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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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6411번 시내버스는 매일 오전 4시 서울 구로구 거리공원 정류장에서 출발한다. 8일 첫차 출발 전부터 노회찬재단 직원들이 세계 여성의날을 맞아 노동자들에게 장미꽃을 전달하기 위해 서 있었다. 오전 3시40분 모자를 푹 눌러쓴 김윤수씨(47·가명)가 정류장 벤치에 처음 앉았다. 강남구의 한 식당에서 일하는 그는 “일찍 가야 하는데 고속터미널에서 다른 버스로 환승해야 하니 첫차를 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한동안 일터를 잃었다가 다시 찾은 김씨는 올해로 5년째 이 버스를 타고 있다.

노회찬 전 정의당 의원은 생전에 해마다 3월8일이 되면 국회 청소노동자들에게 장미꽃을 건넸다. 노 전 의원은 2012년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지만 ‘아주머니’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며 청소노동자들을 ‘투명인간’에 비유했다. 그러면서 투명인간들이 새벽마다 구로구에서 강남구로 가기 위해 6411번 버스를 탄다고 했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지금도 6411번 버스의 주 고객은 변함없이 중장년 여성 노동자들이다.

오전 3시50분 이연자씨(68·가명)가 정류장에 도착했다. 조돈문 노회찬재단 이사장(가톨릭대 명예교수)이 장미꽃을 건네자 “어머, 여성의날이라고?”라며 웃었다. 그는 이 버스를 10년 넘게 탔다. 첫차 사정에 훤한 그는 기자에게 “신도림역에서 1명 타고, 영림중학교에서 한 3명 타고, 구로구청에서는 여럿 타고…”라고 설명했다. 그는 선릉역 근처 한 빌딩을 청소한다. 공식 근무시간은 오전 6시에 시작되지만 매번 그보다 일찍 일터에 도착한다. “직원들 나오면 다시 더러워 지고, 먼지 날리고 일하기 힘들어요. 그 전에 미리 다 해놓는 게 좋지”라고 그는 말했다. 기자가 ‘휴게실이 어떻냐’고 묻자 “다른 데를 안 가봐서…그래도 괜찮다”라고 답했다. 그는 “코로나19가 끝나서 1년에 4번씩 야유회도 가고, 봄·가을 회식도 했으면 좋겠다”며 “내 몸이 허락하는 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8일 새벽 4시 서울 구로구 거리 공원 정류장에서 윤수씨와 연자씨가 장미꽃을 들고 6411번 버스 첫차에 오르고 있다.


출발 후 세 번째 정류장인 미래초등학교에 이르자 박정순씨(76·가명)가 버스에 올라탔다. 그 역시 강남역 주변의 한 빌딩에서 5년째 일하는 청소노동자다. 직업을 묻자 그는 “이 시간에 버스 타는 사람들, 다 미화 아니면 경비지. 사람들 출근하기 전에 먼저 가는 사람들”이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박씨 역시 근무시간보다 일찍 출근한다. 용역회사 소속인 그는 주 5일, 하루 8시간씩 일하고 140만원가량을 손에 쥔다고 했다. 그는 “나이 많은 사람들은 원래 최저임금 안 쳐줘. 이 나이에 일할 데가 없으니 그래도 써주면 고맙지”라고 했다.

그와 대화를 마치고 버스를 둘러보니 버스 안은 노동자들로 북적였다. 절반 이상이 파마머리에 분홍, 보라 등 화려한 색의 경량 패딩을 입은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박씨가 옆에 서있다 기자가 일어난 자리에 앉은 남성에게 “아저씨, 오늘 앉아서 가겠어. 계탔네”라고 농담을 건넸다. 6411번 버스의 노동자들은 서로 얼굴을 안다. 급하게 내리려다 인파를 뚫지 못해 하차하지 못한 기자를 보고, 꽃무늬 장갑을 낀 여성이 “이 버스는 사람이 많아서 내리려면 미리미리 준비해야 돼”라며 안타까워했다.


노회찬재단이 지난해 신희주 가톨릭대 교수에게 의뢰한 ‘6411번 버스 첫 승객 분석을 통한 청소노동자의 노동에 대한 연구’를 보면 6411번 첫차를 타는 이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월 170만원, 10명 중 9명이 월 200만원 이하를 받는 저임금 노동자다. 지난해 3월16~18일 진행된 조사에서 응답자 10명 중 8명은 여성이었고, 85.1%가 저임금·불안정 노동인 청소 업무에 종사했다.

오전 5시 무렵 6411번 버스가 지나는 여의도환승센터 승강장은 분주한 노동자들로 가득했다. 이들은 안양, 구로, 양천, 중랑, 청량리 등에서 첫차를 타고 왔다. 승강장에 버스가 들어설 때마다 20~30명의 중년 여성들이 쏟아져 나왔다. 횡단보도 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50명 가량의 노동자들이 건너편 여의도공원을 향해 잰걸음으로 이동했다. 뛰다시피 하는 인파 사이 그나마 느리게 걷는 최의남씨(69·가명)에게 다가갔다. 목동에서 5012번 버스를 타고 여의도에 왔다는 그는 “오늘은 좀 여유있게 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오전 4시에 일어났다는 의남씨는 “난 (집이) 가까우니까 4시지, 먼 사람들은 2~3시에도 일어난다”고 말했다. 최씨는 퇴근 뒤에도 집에 가 재봉일을 한다. 그는 “멋 모르고 청소일을 시작했는데 벌써 3년이 됐다. 원래 본업은 재봉”이라며 “여기(청소일)는 언제든 그만 다닐 수 있지만, (재봉은) 아가씨 때부터 한 ‘기술’이라 계속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앞서 걷던 노동자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빌딩 숲 사이로 흩어졌다. 오전 5시30분 여성 노동자들의 ‘러시아워’가 끝나자 승강장은 이내 한산해졌다.

여성노동자들이 8일 오전 5시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환승센터에서 하차해 노회찬재단에서 준비한 장미꽃과 마스크를 받고 있다. 오경민 기자.

오경민 기자 5k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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