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이 큰 여행-해질녘 백제, 익산

2021. 3. 5. 11:4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익산은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 부활을 꿈꾸며 조성되었던 백제의 신도시이자 불교의 성지였다.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지는 1400년 전 백제의 뜨거운 바람이 있던 곳인데, 지금은 발굴과 복원 초기 단계를 걷고 있는 다소 허허로운 여행지이다. 이렇게 여백으로만 가득한 여행지를 찾을 땐 미리 공부를 하고 가는 게 좋다. 여행 현장에는 채움 보다 비움이 90% 많고, 그 비워진 공간은 여행자의 상상력으로 그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백제가 아까운 것은 그 뛰어난 예술 때문이다

미륵사지 전경. 왼쪽탑이 서원 구층석탑, 오른쪽이 동원 구층석탑이다.
미륵사지 정문에 서서 먼 옛날 미륵사와 미륵산, 그리고 서쪽 하늘에서 스며든 붉은 기운을 마음으로 그려보았다. 물론 여행 전 관련 자료를 뒤적거리다 본 그림을 토대로 했다. 익산의 금마에 가면 미륵산이 있고, 그 아래에 미륵사가 앉아 있다. 절의 뜨락에 들어서면 양쪽에 연못이 있다. 당연히 연꽃이 가득했을 것이다. 그런데 연못 주변으로는 늘어진 버드나무들이 천천히 춤을 추고 있다. 미륵사지를 발굴할 당시 연못 바닥의 단면을 떠 보니 점토와 낙엽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고 한다. 낙엽을 분석해 보니 버드나무였다. 1400년 전 미륵사 연못에 늘어져 있던 버드나무라니! 새삼 정겹다.

정면으로 두 기의 당간지주가 있고 그 뒤로 담장과 함께 세 개의 문이 있다. 아직 상상화를 그려본다. 이미 중문과 서문, 동문 뒤로 거대한 9층 목조탑과 석조탑이 보인다. 가운데 문 뒤의 목조탑은 9층으로 규모가 대단하다. 높이 약 70m 규모의 경주 황룡사 급으로 생각하면 된다. 동문과 서문 뒤의 석조탑 역시 9층탑인데 높이가 14.6m이다. 불교에서 9는 꽉 채워짐을 의미한다. 나무로 짓든 돌로 짓든 9층탑을 올릴 때는 분출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백제·고구려·신라의 대표적인 사찰의 탑들이 대개 9층으로 지어진(고구려의 정릉사는 7층) 이유도, 삼국통일을 자기들이 하겠다는 끓는 염원을 담았기 때문이 아닐까. 탑이 세 기가 있는 것은 미륵사에 본존불을 모시는 금당이 세 곳 있다는 뜻으로, 이것만으로도 그 규모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이다. 금당과 금당 사이는 회랑이 있어서 오갈 수 있고, 그 뒤 승방과 강당 등에서 스님들이 수행과 생활을 영위했다. 상상화는 여기서 끝.

오늘 눈에 잡히는 미륵사지의 건축물은 석탑 2기뿐이다. 두 석탑은 원래 똑같은 형태였겠으나 지금은 사뭇 달라 보인다. 오른쪽 동탑은 복원 과정을 통해 완성된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왼쪽 서탑은 탑의 상층부가 무너져 내린 채 중심을 잃은 모습으로 서 있다. 미륵사 석탑은 맨 아랫기단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사방으로 나 있는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동탑의 경우 지금도 출입이 가능하다. 똑같은 탑이지만 복원된 동탑보다 무너진 모습으로 서 있는 서탑에 더 관심이 간다. 어쩐지 그곳에 진짜 시간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느낌 때문이다. 실제로 미륵사의 원형은 아직은 누구도 모른다. 동탑 복원도 원형의 도면이 있어서 그것을 갖고 복원한 게 아니라 여러 자료를 취합하고 참고해 복원을 위한 도면을 만들고, 그것에 입각해 건축을 한 것이다. 상층부가 무너진 모습으로 있는 서쪽탑 역시 일제 시대 때 무너져 내린 것을 무지한 일본 관료이 콘크리트를 쏟아 부어 탑의 꼴을 지탱이나 하는 정도로 버텨오다 2001년에 완전히 해체한 후 가능한 부분까지만 재조립한 모습이다. 그 작업이 끝난 게 2017년이니 16년에 걸친 해체와 조립 작업이었다.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린 것은 고증 등 학술적인 확인 작업도 큰 몫을 했겠지만, 사실은 일본인들이 쏟아 부은 콘크리트를 그야말로 하나하나 제거하는 데 어마어마하게 정밀한 작업과 시간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원래 있던 돌은 살리되, 거기에 붙어있던 콘크리트를 깔끔하게 없애는 일은 새로 짓는 것보다 백배는 더 힘들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복원 작업에서 성과도 있었다. 2009년에 심주석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것이다. ‘사리장엄구’란 사리 봉안을 위한 그릇이나 병, 봉안에 즈음한 발원문, 곁들여 봉안하는 물건들을 일컫는데, 미륵사 석탑 사리봉안구에는 ‘사리봉영기’가 있었다. 이것은 사리를 모시게 된 연유를 정리한 글로, 글 속에 탑의 건립이 639년이었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었다. 현재 서쪽 석탑에는 사리봉안구와 함께 2015년에 재봉안된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리를 석탑 어느 곳에 봉안했는지는 비밀이다. 출입이 금지되어 있지만, 문화재 도굴꾼들의 표적이 되었을 게 뻔한 이상, 사리의 위치는 누구도 찾을 수 없도록 해놓지 않았을까?

▶미륵사에서 백제의 미래를 꿈꾼 무왕과 백제인들

사리봉영기에서 확인되었듯이 미륵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600년~641년 사이이다. 백제 국왕 중 마지막(의자왕)에서 두 번째 왕인 무왕이 집권한 시기였으니 아무리 국운이 쇠퇴했기로서니 그 건축 예술의 능력이 어디 갔을까! 게다가 나라는 어려워졌지만 귀족들의 삶은 달라진 것 하나 없이 부유했으며 백성 부리기가 너무도 쉬웠던 왕조 시대였으니 건축의 수준은 단순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백제의 건축을 그대로 보여주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어느 날 백제 무왕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에 가고 있었다. 용화산 아래에 도달했을 때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고, 왕과 왕비는 이 영험한 경험을 겪으며 무언가 신비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때 왕비가 무왕에게 연못을 메우고 절을 세워달라고 간청했다. 무왕은 왕비와 공감하여 연못을 메우고 탑과 금당, 그리고 회랑 등을 건설했다고 한다.

미륵사는 백제를 대표하는 사찰로 자리매김 했다. 그곳에는 무너져 내리던 백제의 부흥을 기원하는 무왕 부부와 백성들의 염원에 담겨 있었다. 하지만 당시 무왕의 꿈은 불과 19년 만에 사라지게 된다. 백제가 660년에 망했고 고구려 또한 668년에 역사에서 사라진다. 두 나라 모두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패망했다. 한반도 일부를 통일한 신라는 당시 삼국의 공통된 종교였던 불교를 더욱 번성시켰고, 통일신라가 사라진 뒤 패권을 차지한 고려 또한 독실한 불교국이었다. 나라는 망했지만 미륵사는 여전히 주요 사찰로 유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교를 숭앙하는 조선이 등장하면서 미륵사는 결국 무너져 내리고 폐사하게 된다. 그렇게 내팽개쳐진 상태로 일제 시대와 해방을 맞았으나 미륵사의 존재가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1974년 동탑의 터를 발굴하면서부터였다. 그로부터 또 48년이 흘렸다. 그새 미륵사는 석탑 2기를 복원하고, 이곳을 멸망기 백제의 유산을 삼기 위해 국립익산박물관을 세워 유물과 역사적 의의를 정돈한 게 전부다. 역사의 시간은 참으로 길고 또 길다.

동탑과 서탑 뒤로는 미륵사 금당터가 있는데, 지금은 그 터를 복원하는 정도의 작업이 진행 중이다. 미륵사의 복원이 어디까지 이뤄질지는 누구도 모른다. 세금을 투입해 대대적인 공사를 하지 않는 이상 이곳에 9층 목조석탑이 복원되고, 금당과 회랑이 다시 세워질 기회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복원을 한다 해도 그 까다로운 고증을 밝혀내는 데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가늠할 수 없다. 아직은 원본이라 할 만한 자료나 근거를 찾지 못했으며 그 가능성도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달랑 석탑 2기와 유물 보관소, 조선 시대 때 지은 가마 정도만 있는 이곳에 익산 등 전라도 지역 사람들은 물론 전국에서 여행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백제 문화에 대한 그리움은 한국인의 유전자 속에 단단히 박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미륵사지를 더욱 여유롭게 해 주는 것은 오늘까지 미륵사를 감싸고 있는 미륵산이다. 미륵산은 백제를 닮은 산이다. 능선이 뫼 산(山)자의 양쪽 궤처럼 비스듬하면서도 반듯한 사선으로 이뤄져 있고, 봉우리는 날카로움 없이 그야말로 봉긋하다. 또한 산세가 마치 사람처럼 생겨, 동에서 태어나 봉우리 청년 시절을 정점으로 서서히 서쪽으로 사그라진다는 한자의 원리와도 일치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산 속에는 사자암, 미륵산성 등 작은 도시가 갖춰야 할 기반 시설을 갖고 있다. 백제가 멸망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운 것은 멸망 군주가 된 이후 온갖 거짓 사실로 인격을 말살 당하고 조롱과 멸시의 상징으로 묘사되곤 하는 의자왕과, 대대로 문화 예술을 발전시킨 왕족에 대한 연민만이 아니다. 그동안 공주와 부여에서 침 흘리며 보았던 그 찬란한 예술 작품들과 건축물들, 어디에 왕궁을 세워도 꼭 공방을 만들어 전문가를 대접했던 그들의 문화 인식과 결과물들이 아깝고 안타까운 것이다.

▶미륵사지의 당간지주

‘당간’은 사찰에서 행사를 할 때 세워두는 깃발 장대를 말한다. 이 당간을 세워두는 곳을 ‘지주’라고 한다. 깃발을 장대에 묶어 지주에 세워두는 것이다. 이것은 삼한 시대 때 성스러운 장소를 표시하는 솟대와도 같은 의미다. 미륵사의 당간지주는 백제가 아닌 통일신라 때 설치되었다. 역시 불교 국가였던 통일신라는 삼국시대 때 고구려 정릉사, 신라의 황룡사와 함께 한반도 3대 대찰로 명성을 떨친 미륵사를 중창했다. 그때 미륵사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세운 것이 당간지주이다. 조사 결과 두 기의 당간지주 거리는 약 90m로, 4.5m의 높이, 구성 양식, 제작 기법 등이 일치하는 것이 드러났다.

▶조선시대 기왓가마

미륵사지 동탑을 지나 조금 올라가면 오른쪽에 현대적으로 마감한 건축물이 있다. 미륵사지 발굴 당시 미륵사 동쪽 언덕 주변에서 통일신라, 고려, 조선의 가마가 각각 2기씩 발굴되었다. 그중 조선시대 기왓가마가 복원되었는데, 관람의 편의를 위해 가마는 최대한 살려두고, 그 주변 동선을 만들기 위해 건축을 입힌 것이다. 1호 가마는 불을 떼는 화구와 굴뚝은 대부분 소실되었고 남은 808cm의 모습만 볼 수 있다. 2호 가마 또한 923cm 부분만 남아있다. 조선 시대 때 이곳 가마에서 생산한 기와는 주변의 건축물 재료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익산박물관에서 들여다본 역사

익산 미륵사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1980년부터 1996년까지 이뤄졌고 그 과정에서 1만9000여 점의 문화재가 수습되었다. 또한 2009년에는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으며, 이런 문화 유산의 발굴 결실에 따라 미륵사지와 근처의 왕궁리 유물터 일대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문화에는, 특히 지나간 문화를 발굴하고 시민과 공유하는 일에는 많은 돈이 들어간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자 국가 차원의 지속적인 발굴 및 관리가 필요했고, 그 연구와 전시를 담당한 국립박물관의 설립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국립익산박물관은 외관이 특이하다. 멀리서 보면 그저 잔디가 덮여 있는 평지 같지만, 사실은 살짝 지하로 들어간 매립 건축물 형태를 취하고 있다. 문화 유산이라는 게 대개 맨땅을 파고 호미와 붓으로 조금씩 캐고 쓸어가며 확인하는 초정밀급 작업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매장 문화재를 연상하게 하는 익산박물관의 외모는 박물관의 의미와 그럴싸하게 맞아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박물관에는 후기 백제 때 사실상 백제의 신도시로 건설 중이었던 익산의 백제 문화를 담은 익산백제실이 있다. 또한 미륵사 발굴 과정에서 나온 치미, 수막새, 기와 등 기와들과 청동 공예품, 사리를 담은 외호, 관모 꾸매개, 유리가공품 등이 전시되어 있는 미륵사지실도 흥미롭다. 역사문화실은 익산과 군산 지역의 오래된 이야기와 금동모관, 금동신, 청자항아리, 칼, 낫 등을 통해 당대 민초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기획전시실에서는 3월28일까지 ‘100년 전 사진에 담긴 미륵사지, 1300년전’이 열리고 있다.

위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로 362

▶문화의 샘물, 왕궁리유적

건립시기가 확인되지 않은 오층석탑
‘백제 무왕도 갈팡질팡하지 않았을까?’ 왕궁리 유적을 돌아보며 그런 추측을 해 보았다. 무왕은 점점 나약해지는 백제의 부흥을 위해 신라, 고구려와의 소규모 전쟁은 물론, 왕권의 권위를 살리기 위한 토목공사를 벌이기도 했다. 자신의 고향인 익산에 신도시를 건설해 되살아날 백제의 미래를 기원하기도 했다. 미륵사를 지은 것은 미륵부처의 힘을 빌어 이곳에 백제의 미래를 건설하겠다는 꿈도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여에 도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익산에 새로운 왕궁을 건설하려 했던 것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부분이다. 세력이 자꾸 밀리고 있으니 수도를 옮겨서라도 왕국의 명맥을 유지하려 했을까? 이해되는 일이기도 했지만, 유적 발굴 결과에 의하면 그 왕궁 건설은 어느 때부터인가 중단되었고, 왕궁을 부수고 사찰을 짓기 시작했다. 엄두가 나지 않았을까? 아니면 종교에 더욱 의지하겠다는 신심이 작용한 걸까. 여러가지 생각을하게 한다. 왕궁리 유적은 유적지와 함께 전시실도 있어서 당시 백제 왕가와 백성들의 삶을 엿볼 수 있게 했다.

익산의 백제 왕궁 유적지는 용화산 능선의 끝자락에 위치한다. 발굴된 유적을 근거로 왕궁의 담장, 석축, 정전건물지, 와적기단 건물지, 정원과 후원, 공방, 사찰 관련 시설 등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물론 지금은 모두 흙바닥 정리 차원으로 정돈되어 있을 뿐이다. 단지 오층석탑만이 이곳이 백제의 왕궁이자 사찰의 터였음을 어렴풋이 알려주고 있다. 공허하기까지 한 이런 풍경은 여행자를 허탈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오래 전 사라진 백제를 상상하게 하는 힘 있는 상징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편으로는 이 갈증을 해소하는 방법이 공주의 공산성이든 부여의 낙화암이든 백제문화단지 등 또 다른 백제 여행뿐이라는 생각과 함께 헛웃음이 나왔다.

어디를 가든, 자연이든, 건축물이든 꽉 차 있는 모습만 보게 되는 게 여행인데, 오늘 백제의 황혼 시간을 찾은 여행은 보이는 것보다 생각해야 할 일이 훨씬 많았던 여행이었다. 왕궁터도 그랬고 미륵사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왕릉터 전시관과 미륵사지의 익산박물관은 오아시스 중에도 정말 달콤한 문화의 샘물이었다.

▶가람 이병기선생 생가

교과서에서 자주 만났던 시조 시인 이병기 선생은 익산 출신이다. 그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시조 시인이자 한글 애호가이자 국문학자로 평생을 살았다. 1891년에 이 집에서 태어나 1968년에 바로 그 집 동산에 묻혔으니 그의 일생은 비록 일제시대 때의 고초는 있었을지언정 대체적으로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생가에는 200살쯤 되었다는 탱자나무와 그의 살림 공방이자 선비로서의 삶을 펼친 수우재, 벗들과 세상 이야기를 나누었을 승운정 등 우리나라 시골 선비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건물들이 초가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생가 옆에는 가람문학관이 있어서 선생의 작품과 시집, 인생사를 엿볼 수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가람일기’. 19세인 1909년부터 쓰기 시작해서 1966년 6월까지 쉬지 않고 기록한 그의 일기장은 우리 근현대사의 중요한 자료로서의 가치도 지니고 있다. 문학, 농촌, 유적에 관심 있는 익산 여행자라면 꼭 한 번 들러볼 만한 소중한 공간이다. 미륵사지에서 승용차로 약 20분 거리에 있다.

위치 전북 익산시 여산면 가람1길 76

운영 시간 (3~10월)09:00~18:00

[글과 사진 이영근(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69호 (21.03.09)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티라이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