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이 큰 여행-해질녘 백제, 익산
익산은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 부활을 꿈꾸며 조성되었던 백제의 신도시이자 불교의 성지였다.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지는 1400년 전 백제의 뜨거운 바람이 있던 곳인데, 지금은 발굴과 복원 초기 단계를 걷고 있는 다소 허허로운 여행지이다. 이렇게 여백으로만 가득한 여행지를 찾을 땐 미리 공부를 하고 가는 게 좋다. 여행 현장에는 채움 보다 비움이 90% 많고, 그 비워진 공간은 여행자의 상상력으로 그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백제가 아까운 것은 그 뛰어난 예술 때문이다
정면으로 두 기의 당간지주가 있고 그 뒤로 담장과 함께 세 개의 문이 있다. 아직 상상화를 그려본다. 이미 중문과 서문, 동문 뒤로 거대한 9층 목조탑과 석조탑이 보인다. 가운데 문 뒤의 목조탑은 9층으로 규모가 대단하다. 높이 약 70m 규모의 경주 황룡사 급으로 생각하면 된다. 동문과 서문 뒤의 석조탑 역시 9층탑인데 높이가 14.6m이다. 불교에서 9는 꽉 채워짐을 의미한다. 나무로 짓든 돌로 짓든 9층탑을 올릴 때는 분출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백제·고구려·신라의 대표적인 사찰의 탑들이 대개 9층으로 지어진(고구려의 정릉사는 7층) 이유도, 삼국통일을 자기들이 하겠다는 끓는 염원을 담았기 때문이 아닐까. 탑이 세 기가 있는 것은 미륵사에 본존불을 모시는 금당이 세 곳 있다는 뜻으로, 이것만으로도 그 규모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이다. 금당과 금당 사이는 회랑이 있어서 오갈 수 있고, 그 뒤 승방과 강당 등에서 스님들이 수행과 생활을 영위했다. 상상화는 여기서 끝.
오늘 눈에 잡히는 미륵사지의 건축물은 석탑 2기뿐이다. 두 석탑은 원래 똑같은 형태였겠으나 지금은 사뭇 달라 보인다. 오른쪽 동탑은 복원 과정을 통해 완성된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왼쪽 서탑은 탑의 상층부가 무너져 내린 채 중심을 잃은 모습으로 서 있다. 미륵사 석탑은 맨 아랫기단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사방으로 나 있는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동탑의 경우 지금도 출입이 가능하다. 똑같은 탑이지만 복원된 동탑보다 무너진 모습으로 서 있는 서탑에 더 관심이 간다. 어쩐지 그곳에 진짜 시간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느낌 때문이다. 실제로 미륵사의 원형은 아직은 누구도 모른다. 동탑 복원도 원형의 도면이 있어서 그것을 갖고 복원한 게 아니라 여러 자료를 취합하고 참고해 복원을 위한 도면을 만들고, 그것에 입각해 건축을 한 것이다. 상층부가 무너진 모습으로 있는 서쪽탑 역시 일제 시대 때 무너져 내린 것을 무지한 일본 관료이 콘크리트를 쏟아 부어 탑의 꼴을 지탱이나 하는 정도로 버텨오다 2001년에 완전히 해체한 후 가능한 부분까지만 재조립한 모습이다. 그 작업이 끝난 게 2017년이니 16년에 걸친 해체와 조립 작업이었다.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린 것은 고증 등 학술적인 확인 작업도 큰 몫을 했겠지만, 사실은 일본인들이 쏟아 부은 콘크리트를 그야말로 하나하나 제거하는 데 어마어마하게 정밀한 작업과 시간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원래 있던 돌은 살리되, 거기에 붙어있던 콘크리트를 깔끔하게 없애는 일은 새로 짓는 것보다 백배는 더 힘들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복원 작업에서 성과도 있었다. 2009년에 심주석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것이다. ‘사리장엄구’란 사리 봉안을 위한 그릇이나 병, 봉안에 즈음한 발원문, 곁들여 봉안하는 물건들을 일컫는데, 미륵사 석탑 사리봉안구에는 ‘사리봉영기’가 있었다. 이것은 사리를 모시게 된 연유를 정리한 글로, 글 속에 탑의 건립이 639년이었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었다. 현재 서쪽 석탑에는 사리봉안구와 함께 2015년에 재봉안된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리를 석탑 어느 곳에 봉안했는지는 비밀이다. 출입이 금지되어 있지만, 문화재 도굴꾼들의 표적이 되었을 게 뻔한 이상, 사리의 위치는 누구도 찾을 수 없도록 해놓지 않았을까?
사리봉영기에서 확인되었듯이 미륵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600년~641년 사이이다. 백제 국왕 중 마지막(의자왕)에서 두 번째 왕인 무왕이 집권한 시기였으니 아무리 국운이 쇠퇴했기로서니 그 건축 예술의 능력이 어디 갔을까! 게다가 나라는 어려워졌지만 귀족들의 삶은 달라진 것 하나 없이 부유했으며 백성 부리기가 너무도 쉬웠던 왕조 시대였으니 건축의 수준은 단순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백제의 건축을 그대로 보여주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어느 날 백제 무왕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에 가고 있었다. 용화산 아래에 도달했을 때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고, 왕과 왕비는 이 영험한 경험을 겪으며 무언가 신비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때 왕비가 무왕에게 연못을 메우고 절을 세워달라고 간청했다. 무왕은 왕비와 공감하여 연못을 메우고 탑과 금당, 그리고 회랑 등을 건설했다고 한다.
미륵사는 백제를 대표하는 사찰로 자리매김 했다. 그곳에는 무너져 내리던 백제의 부흥을 기원하는 무왕 부부와 백성들의 염원에 담겨 있었다. 하지만 당시 무왕의 꿈은 불과 19년 만에 사라지게 된다. 백제가 660년에 망했고 고구려 또한 668년에 역사에서 사라진다. 두 나라 모두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패망했다. 한반도 일부를 통일한 신라는 당시 삼국의 공통된 종교였던 불교를 더욱 번성시켰고, 통일신라가 사라진 뒤 패권을 차지한 고려 또한 독실한 불교국이었다. 나라는 망했지만 미륵사는 여전히 주요 사찰로 유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교를 숭앙하는 조선이 등장하면서 미륵사는 결국 무너져 내리고 폐사하게 된다. 그렇게 내팽개쳐진 상태로 일제 시대와 해방을 맞았으나 미륵사의 존재가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1974년 동탑의 터를 발굴하면서부터였다. 그로부터 또 48년이 흘렸다. 그새 미륵사는 석탑 2기를 복원하고, 이곳을 멸망기 백제의 유산을 삼기 위해 국립익산박물관을 세워 유물과 역사적 의의를 정돈한 게 전부다. 역사의 시간은 참으로 길고 또 길다.
미륵사지를 더욱 여유롭게 해 주는 것은 오늘까지 미륵사를 감싸고 있는 미륵산이다. 미륵산은 백제를 닮은 산이다. 능선이 뫼 산(山)자의 양쪽 궤처럼 비스듬하면서도 반듯한 사선으로 이뤄져 있고, 봉우리는 날카로움 없이 그야말로 봉긋하다. 또한 산세가 마치 사람처럼 생겨, 동에서 태어나 봉우리 청년 시절을 정점으로 서서히 서쪽으로 사그라진다는 한자의 원리와도 일치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산 속에는 사자암, 미륵산성 등 작은 도시가 갖춰야 할 기반 시설을 갖고 있다. 백제가 멸망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운 것은 멸망 군주가 된 이후 온갖 거짓 사실로 인격을 말살 당하고 조롱과 멸시의 상징으로 묘사되곤 하는 의자왕과, 대대로 문화 예술을 발전시킨 왕족에 대한 연민만이 아니다. 그동안 공주와 부여에서 침 흘리며 보았던 그 찬란한 예술 작품들과 건축물들, 어디에 왕궁을 세워도 꼭 공방을 만들어 전문가를 대접했던 그들의 문화 인식과 결과물들이 아깝고 안타까운 것이다.
▶미륵사지의 당간지주
▶조선시대 기왓가마
▶국립익산박물관에서 들여다본 역사
위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로 362
▶문화의 샘물, 왕궁리유적
익산의 백제 왕궁 유적지는 용화산 능선의 끝자락에 위치한다. 발굴된 유적을 근거로 왕궁의 담장, 석축, 정전건물지, 와적기단 건물지, 정원과 후원, 공방, 사찰 관련 시설 등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물론 지금은 모두 흙바닥 정리 차원으로 정돈되어 있을 뿐이다. 단지 오층석탑만이 이곳이 백제의 왕궁이자 사찰의 터였음을 어렴풋이 알려주고 있다. 공허하기까지 한 이런 풍경은 여행자를 허탈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오래 전 사라진 백제를 상상하게 하는 힘 있는 상징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편으로는 이 갈증을 해소하는 방법이 공주의 공산성이든 부여의 낙화암이든 백제문화단지 등 또 다른 백제 여행뿐이라는 생각과 함께 헛웃음이 나왔다.
어디를 가든, 자연이든, 건축물이든 꽉 차 있는 모습만 보게 되는 게 여행인데, 오늘 백제의 황혼 시간을 찾은 여행은 보이는 것보다 생각해야 할 일이 훨씬 많았던 여행이었다. 왕궁터도 그랬고 미륵사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왕릉터 전시관과 미륵사지의 익산박물관은 오아시스 중에도 정말 달콤한 문화의 샘물이었다.
▶가람 이병기선생 생가
위치 전북 익산시 여산면 가람1길 76
운영 시간 (3~10월)09:00~18:00
[글과 사진 이영근(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69호 (21.03.09)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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