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유희형이 쓰는 나의 삶 나의 농구④ 19세에 출전한 멕시코올림픽

민준구 2021. 2. 2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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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편집부] 점프볼이 유희형 전 KBL 심판위원장이 쓰는 <나의 삶 나의 농구>를 연재합니다. 1960~1970년대 남자농구 국가대표를 지낸 유희형 전 위원장은 이번 연재를 통해 송도중에서 농구를 시작한 이래 실업선수와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살아온 농구인생을 독자들에게 담담하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 본 기사는 점프볼 2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19세에 태극기를 달고 올림픽에 출전했다. 제19회 멕시코시티올림픽은 1968년 10월 12일부터 27일까지 16일간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열렸다. 112개 국가에서 5,500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한국 선수단은 10개 종목(전체 20개) 55명의 선수로 구성되었다. 단체종목인 남자농구, 여자배구 외에 육상, 수영, 유도, 복싱, 레슬링, 사격 등이었다. 예산 부족 때문에 최정예 선수를 선발했다고 한다. 남자농구도 엔트리보다 1명 부족한 11명이었다.

조종사 훈련시설에서 고지대 적응훈련
멕시코시티는 해발 2,300m 고지대여서 어려움이 많았다. 남자농구 대표팀은 올림픽을 대비한 강화훈련에 돌입했다. 고지대 적응 훈련도 했다. 장소는 대방동 공군 조종사 훈련시설, 멕시코시티와 같은 고도로 맞추어진 시설에 한 명씩 들어가 사이클을 타는 것이다. 얼굴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15분간 달리는데 녹초가 될 만큼 힘들었다. 그러면서 산소 섭취량 등을 측정한다는데 과연 효과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멕시코 언어인 스페인어 교육도 받았다. 강사는 외국어대학교의 나이 많은 원로교수, 프린트 교재의 첫 문장이 "엘 엘레환테 에스 운 아니말(el elefante es un animal) 코끼리는 동물이다.” 그 구절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인사말이나, 숫자 등 일상용어가 필요한데 동물 이야기부터 나오니 모두 어이없는 반응을 보였다. 스페인어 권에 갔을 때 한 번씩 읊으면 웃음이 터진다.

대표팀은 시설이 좋은 서울 용산의 미군 부대에서 강화훈련을 실시했다. 미국인 장교가 감독을 맡고 있어 가능했다. 태릉선수촌의 체육관은 냉, 난방 시설이 없어 여름에는 찜통이다. 그곳의 시설은 쾌적했다. 시원했고 주전자도 필요 없었다. 시원한 정수기 물을 마음껏 마실 수 있었다. 훈련 마치고 오는 길에 가스폴 감독 집에 가서 먹었던 아이스크림은 환상의 맛이었다.

모로코, 세네갈에만 승리…16개국 중 14위
올림픽의 막이 올랐다. 미국 LA에서 10일간 적응 훈련을 한 후 선수촌에 입성했다. 숙소는 멕시코 대학 내 새로 지은 아파트였다. 올림픽이 끝나면 기숙사로 사용할 것이라고 했다. 고지대 영향으로 3층만 올라가도 숨이 찼다. 어떻게 경기에서 뛸지 걱정되었다. 너무 힘들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 아닌가? 16개국이 참가한 남자농구에서 미국이 압도적으로 우승을 했고, 우리나라는 14위를 했다. 아프리카 대표인 모로코(76-54)와 세네갈(76-59)에만 승리했다. 예선리그 1승 7패를 한 후 순위 결정전에서 필리핀에 63-66으로 패했다. 한국선수단 단장인 이병희 대한농구협회 회장께서 대로(大怒)했다. 1년 전 장충체육관에서 필리핀에 패한 원한을 멕시코에서 풀어주길 바랐는데, 또 패한 것이다. 막판 내가 범한 공격자 반칙이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외출 금지령이 내려졌다. 근신하라는 강력한 지시로 며칠 동안 감금된 상태로 있다가 귀국했다.

나는 19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모든 경기에 베스트 멤버로 기용되었다. 힘겨웠지만, 최선을 다했다. 말단이라 주전자, 수건도 들어야 하고, 숙소에 오면 손빨래도 해야 했다. 한 농구 선배 때문에 마음고생도 많이 했다. 그분은 우리 팀 승패에는 관심이 없었다. 기용되지도 않았다. 경기를 끝낸 타 종목 선수들과 카드놀이를 하면서 파김치가 된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선수촌 국제센터에 코카콜라 회사에서 각종 음료를 무료로 마실 수 있도록 해놓았다. 선수들이 열광했다. 콜라, 환타 등의 맛좋은 음료수가 무한정 쏟아지는 것에 환성을 질렀다. 그 선배는 콜라를 주전자에 받아오라고 시켰다. 하루에 한 번이 아니었다. 숙소에서 그곳까지 2km나 되는 거리였다. 밤이 늦은 시간에도 예외 없이, 잔뜩 들어있는 콜라가 식었으니, 버리고 환타를 받아오라고 한다. 캄캄한 밤에 먼 거리를 걸어가면서 한심한 생각이 들고, 울화통이 났다. 음료를 담아 가지고 올 때 더 힘들었다. 대형 주전자라 무거워서 몇 번 쉬어야 했다. 선배는 하늘이니 참아야 한다지만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멕시코시티 올림픽은 미국의 독무대였다. 금 45개로 1위, 소련이 2위(금 29개)를 했다. 우리나라의 성적은 초라했다. 복싱에서 은, 동을 하나씩 획득한 것이 전부다. 염원하던 건국 후 올림픽 첫 금메달은 물거품이 되었다. 출전하기 전 언론은 레슬링, 복싱에서 금메달이 틀림없이 나올 것이라고 떠들어댔다. 예상 선수는 이창길(복상)과 오정룡(레슬링) 이었다. 근거도 있었다. 세계선수권 대회 등 국제대회 성적이 좋았기 때문이다. 연일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인터뷰 때문에 훈련도 소홀히 했다. 그들은 금메달을 금방 딸 것처럼 자신만만했고, 거들먹거리기도 했다. 결과는 충격적인 예선 탈락이었다. 예상하지 않았던 복싱 48kg급 지용주가 은메달을 획득했다. 나는 그러한 상황을 여러 번 경험했다. 언론이 지목한 선수는 모두 실패했다. 원인은 하나, 주변의 압박감 때문이다. 올림픽경기의 수준은 예상보다 높다. 4년간 칼을 갈고 나온 선수가 하나, 둘이 아니다. 입상하면 자기 인생이 바뀌는데, 얼마나 노력을 했겠는가?

미국 흑인선수, 인종차별 항의로 메달 박탈
당시 우리나라는 육상, 수영에서 후진국이었다. 경영은 여자선수 1명이 출전했고, 육상은 마라톤 외에 투포환 백옥자 혼자였다. 모두 예선 탈락했고, 격차가 너무 컸다. 어느 날 수영경기를 응원하고 들어오는 레슬링 감독에게 물었다. 우리 선수 어떻게 되었습니까? “독탕이디 뭐!” 이북 사투리 쓰는 분이다. 한참 생각했다. 상황을 알고 웃었다. 400m 예선에서 꼴찌로 한 바퀴를 혼자 헤엄쳤으니 ‘독탕’ 아닌가? 기준기록이 없던 시절이라 가능했다. 지금은 그러한 장면을 보기 어렵다. 최고의 선수에게만 출전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경건한 올림픽에 사건도 발생했다.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를 한 것이다. 미국의 흑인 육상선수 스미스와 칼로스는 200m에서 1, 3위를 했다. 이들은 검은 양말과 검은 장갑을 끼고 시상대에 올랐다. 미국 국가가 연주되자 게양대 반대쪽을 향해 스미스는 오른손, 칼로스는 주먹 쥔 왼손을 높이 들었다. 맨발이었고, 검정 스카프도 목에 걸었다. 검은 양말은 흑인의 가난, 스카프는 흑인의 긍지, 왼손은 단결, 오른손은 흑인의 힘을 나타냈다고 한다. 올림픽 정신을 훼손시켰다는 비난을 받았다. 두 선수는 선수촌에서 쫓겨났고, 메달도 박탈되었다. 영구 제명되어 그 후 육상화를 신어보지 못했다. 칼로스는 미식축구로 전향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우리나라는 해방 후 금메달이 한 개도 없는데 귀중한 것을 팽개치다니, 그들의 행동과 판단은 옳지 않았다고 본다.

멕시코시티 올림픽 참가 후, 우리나라 남자농구가 올림픽에 다시 출전하는데 꼭 20년이 걸렸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다. 개최국이어서 가능했다. 이렇듯 올림픽의 벽은 높다. 아시아 45개국 중 1위를 해야 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올림픽대회를 세계대회의 정화(精華)라고 일컫는 것은 아닐지.

유희형은…
1949년 3월 10일 충북 청원군에서 출생했다. 송도중 1학년 때 농구를 시작해서 송도고를 거쳐 전매청에서 민완 가드로 활약했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 남자농구 대표팀에 선발되었고, 1969년 방콕 아시아선수권대회와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한국남자농구 우승 주역중 한 명으로 주목받았다. 남자농구 명가드 계보를 열었던 그는 1978년까지 대표선수로 활약했고, 은퇴 후에는 관계로 입문, 문화체육부와 월드컵조직위원에서 체육행정가로 매끄러운 일솜씨를 발휘했다. KBL 출범 후에는 심판위원장과 경기이사를 역임했다. 1984년부터 1997년까지 KBS해설위원을 맡아 해박하고 명쾌한 입담을 과시하기도 했다. 한양대 겸임교수와 마천청소년수련관장도 지냈다. 만년(晩年)에 글을 쓰는데 재미를 붙였다. <수필춘추> 2020년 가을호에 응모한 ‘스승을 만나다’로 신인상을 수상하며 수필가로 데뷔했다.

# 사진_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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