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문턱이 낮은 글자.. '한글전' 앞으로 나흘 남았습니다

2021. 2. 24.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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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중] 요즘 핫한 소설가 최영이 본 'ㄱ의 순간'

◇프롤로그- RM도 관람한 “불휘기픈 전시”

한글특별전 'ㄱ의 순간'을 관람한 BTS 리더 RM(김남준)이 전시장 벽면에 남긴 글. '세종대왕님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라고 썼다. 전시는 2월28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과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에서 열린다.

만약 세종대왕이 ‘알파벳’ 모양의 글자를 창제한 뒤 ‘훈민정음’이라고 이름을 붙였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산’ 대신 ‘San’, ‘바다’ 대신 ‘BaDa’라고 표기하게 되었다면 글을 읽는 데 지장이 있었을까? ‘사랑해’를 ‘SaRangHae’로 바꿔 쓴다면 사랑의 감정이 여실히 드러나지 못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산을 ‘Gom’이라고 표기하기로 하였대도 마찬가지. 시니피에(기의)와 시니피앙(기표) 사이에 필연적 관계가 없다는 소쉬르의 ‘자의성(arbitrary)’은 소리와 문형(紋形) 사이의 관계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결국 정하기 나름이라는 뜻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음에 무슨 수로 ‘그에 맞는’ 형을 입힌단 말인가? 그러나 예외 없는 원칙이 없듯이 인류 언어사에도 한 가지 예외가 있기는 하다. 바로 훈민정음, 훗날 ‘한글’이라 불리게 되는 문자체계이다.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과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ㄱ의 순간 -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 특별전』은 그 ‘정음’이 탄생하는 순간을 기점으로 한글이 어디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를 ‘찬란하게’ 밝히고 있다. 찬란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단지 백남준을 필두로 47명의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 미술가들이 총출동하고 <천전리암각화>, <훈민정음 해례본(영인본)> 등 귀중한 유물들이 대거 출품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뒤늦게 한글을 깨친 전남 곡성 할머니들의 손글씨와 그림, 일제강점기 한글을 지키고자 애쓴 독립운동가들의 육필 원고, 한국전쟁 당시 훈민정음 해례본을 품고 피난길에 올랐던 간송 전형필의 정신까지 한 자리에 모은 그야말로 한글의 잉태와 탄생에서부터 현대 미술의 근원적 지향까지 아우르는 심원한 ‘불휘기픈’ 전시이기 때문이다.

◇한글은 어디서 왔는가?

2월28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과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에서 열리는 한글특별전 'ㄱ의 순간'. 백남준의 'W3'와 김종원의 '태극', 천전리 암각화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정음은 소리에서 출발한다. 해례본 후서인 <정인지 서(序)>는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필연적으로 천지자연의 문양이 있기 마련이다’라고 앞머리에 적고 있다. 이는 미국의 독립선언문에 나오는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이 자명하다고 받아들인다’는 표현처럼 자명(self-evident)한 사실, 즉 공리(公理, axiom)로 기능한다. 한마디로 기본전제인 것이다.

언어학자이자 현대미술가인 노마 히데키는 “이 땅에 이 땅의 에크리튀르가 있는 것은 천지자연의 이치”이며 “지성사대(至誠事大)와 같은 인간사, 인간의 법 따위가 아니”라고 후서 첫 문장의 의미를 해석했는데, 천지자연의 도(道)에 기초한다는 이 기본 전제에 따라 정음은 ‘삼극(三極, 천지인)’과 ‘이기(二氣, 음양)’까지 갖추게 된다.

이러한 정음창제의 이론적 기초를 찾을 수 있는 작품이 전시장에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김종원의 <태극>이다. 음양은 신묘(神妙)하여 만물을 생성한다. 양성자와 전자로 물질이 구성되듯 만물의 상이 제각각이어도 결국 음양의 변용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삼라만상에는 음양이 깃들어 있다.

정음은 ‘상형이자방고전(象形而字倣古篆)’, 즉 형태를 본뜨되 글자는 고전을 본받았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본보기 삼은 ‘옛날의 전(篆)’이 과연 무엇인가가 문제 된다. 이에 대해 (1940년에 해례본 원본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에도) 산스크리트 기원설, 가림토 문자 기원설 등 여러 견해가 여전히 남아있기는 하나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최대한 반영하면 전서체를 특정하고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자모의 형태에 있어 자음은 신체의 발음기관을 본떴고 모음은 천지인을 시각화한 것이기 때문에 ‘자방고전’에서 의미하는 字는 자모가 결합된 글자의 전체적인 형태가 최초의 한자 서체인 전(篆)을 좇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에 대해 글자의 형태가 아닌 획의 형태를 의미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 때의 전은 단순히 ‘전, 예, 해, 행, 초’로 구분되는 오체 중 하나라는 의미가 아니다. 바로 글자의 근원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 ‘전’이라는 서체는 전각(篆刻), 즉 도장을 새길 때, 그리고 비석 이름을 새길 때 사용한다. 여기서 ‘각(刻)’한다는 말이 중요한데, 전은 본래 종이가 없던 고대에 나무나 돌에 새겼던 서체이다. 그래서 전은 획의 굵기가 일정하고 형태에 치우침이 없다. 태극기의 ‘건곤감리’를 떠올리면 된다.

전시장 한 면에는 64괘를 상징하는 모니터 64대로 W자 획을 그은 백남준의 대형 작품 <W3>가 휘광한 빛을 발하고 그 맞은편에는 호랑이, 고래, 멧돼지, 산양 등 온갖 동물과 동심원, 마름모, 소용돌이 등 기하학 문양이 새겨진 <천전리암각화>가 전시되어 ‘1만 년을 건너뛴 대화’를 나누고 있다. <W3>는 정보화 시대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www(world wide web)’을 뜻한다. 우리는 인터넷이라는 공간에 정보를 ‘각’하고 있다. 결국 백남준이 모니터에 새긴 화면도 선사시대 누군가가 <천전리암각화>에 새긴 문양과 그림도 모두 새롭고 오래된 ‘자(字)’이다.

◇한글은 무엇인가?

2월28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과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에서 열리는 한글특별전 'ㄱ의 순간'. 오인환의 '남자가 남자를 만나는 곳'은 이번 전시에서 가장 사랑받은 문제작이다.

한글은 삶이다. 한글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문자는 삶이고 삶이 되어야 한다. ‘字’라는 글자 자체가 집 안에 아이가 있는 모양이다. 사랑하고 혼인하고 낳고 양육한다는 자전의 뜻풀이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세종은 왜 훈민정음을 창제했을까? 창제했다기보다 창제할 수밖에 없는 운명 같은 것이었을까? 왕조가 바뀐 지 오래지 않은 조선 초기, <용비어천가>에서 드러나듯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고려도 있었을 터이고, <동국정운>에서 보듯 제각각 어지럽혀진 한자음을 바로잡아야 하는 실용적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또 ‘바람소리’나 ‘학의 울음소리’까지 담고 싶은 순수한 학문적 지향도 놓칠 수 없다. 그러나 해례본 서문을 한글로 풀이한 언해본의 ‘이런 전차로 어린 백성이 니르고져 할배 이셔도’ 제대로 뜻을 표현하지 못하는 상황을 ‘어엿비’ 여긴 애민의 정신이 가장 컸다고 액면 그대로 믿고 싶다.

그렇기에 한글은 세상에서 가장 문턱이 낮은 글자가 되었다.

여든 넘어 깨친 한글로 일군 전남 곡성 서봉마을 할머니들의 <시화> 작품들을 보라. 예술이다. “한글 덕에 내 이름자도 써 보고, 세상 구경 잘하면서 재미나게 살지요”라는 김막동 할머니의 기쁜 고백을 ‘숨결 그대로 들을 수’ 있는 까닭은 우리에게 한글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쉽게 익혀서 편히 쓰게 하고자’ 했던 창제의 뜻이 오롯이 실현된 장면이다.

문턱 너머의 삶은 소외다.

오인환은 전시장 바닥에 향 가루를 깔고, 그 위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 산재한 게이바들의 이름을 쓴 뒤 천천히 타들어가도록 <남자가 남자를 만나는 곳-서울>을 설계했다. 선을 따라 타들어가는 향은 가느다란 획이 되어 공간으로 퍼진다. 가까이 다가가서 쓸쓸한 냄새를 맡으면 서울에 살고 있는 나와 다른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는 법. 삶에는 비애도 있지만 흥도 있다.

강익중의 <트롯아리랑>은 임영웅, 영탁, 이찬원 등 ‘미스터트롯’ 가수들의 노랫말을 타일에 새겨 붙인 12미터 크기의 대형 작품이다. 트로트라고 해서 노랫말이 마냥 흥겨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숨 속에 묻힌 사연 지워보려 해도(보랏빛엽서)’, ‘황소처럼 마냥 일만 하셔도 살림살이는 마냥 그 자리(막걸리 한잔)’라는 가사에도 볼 수 있듯 한과 같은 애잔한 감정이나 사연이 서려 있다. 신명은 바람과 파도에 맞서는 바다 위 솟대(진또배기) 같은 기상, 서걱거리는 삶을 곱씹어 살아내는 끈질긴 생명력이 남루한 삶을 승화시키는 과정이다. 그 농축된 에너지는 한국전쟁 이후 1인당 국민소득을 500배 ‘뻥튀기’시키며 최빈국 대한민국을 단기간에 선진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트롯아리랑>은 오방색이라는 한국 전통의 색에 가사를 음절 단위로 새겼다. 이는 초성·중성·종성을 음절 단위로 조합하는 ‘음절문자’로서의 한글의 특징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마치 문자 언어가 떡으로 육화된 느낌이다.

2월28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과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에서 열리는 한글특별전 'ㄱ의순간'. 강이연이 한글을 세계에 알린 K팝그룹 BTS와 팬덤 아미에서 영감을 받아 설치한 미디어 아트 작품 '문'

강이연의 미디어아트 <문>은 소외의 반대편에서 한글의 확장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 언어의 확장은 곧 그 말과 문자를 사용하는 언중의 확장이다. 작품의 제재가 된 방탄소년단(BTS)의 팬클럽 ‘아미’는 한국어를 이해하고, 한국어로 노래하며, 한글을 배워 쓴다. 이제 한글은 더 이상 한(韓)민족'만'의 글자가 아니다. 인도네시아 북부 찌아찌아족의 교과서는 한글로 되어 있다. 이렇게 한글이 확대되어 가는 이유는 배우고 사용하기 쉬운 과학성뿐 아니라 조형적 미감도 큰 역할을 한다. 이미 2006년에 글로벌 패셔니스타인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향우회’라는 단어가 적힌 초록색 원피스를 입었고, 다른 외국인들도 ‘소유권 이전’이나 ‘근저당 해지’, ‘한국횟집’ 같은 단어가 새겨진 셔츠를 입고 세련된 감각을 뽐내곤 한다. 문구는 어차피 그 의미를 알게 되면 자연히 고쳐진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한글이 이미 조형적으로 아름답다는 사실이다.

서예가 ‘읽는 서예’에서 ‘보는 서예’로 세계를 확장하였듯이, BTS는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음악의 세계를 확장했다. 시서화삼절(詩書畫三絶)이라는 표현이 있듯 그들의 음악에 열광하는 세계인들은 멜로디와 퍼포먼스, 그리고 가사에 담긴 메시지를 함께 느낀다. 그 중 압권은 퍼포먼스다. BTS의 춤사위는 서체추상(書體抽象)의 재현이기도 하다. 몸짓 하나 하나가 스트로크(stroke) 곧 획(劃)이 된다. 강이연의 <문>은 아미의 소리에 획이라는 조형을 입혀 세계와 공명하는 감동적인 떨림을 연출하고 있다.

◇한글은 어디로 가는가?

2월28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과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에서 열리는 한글특별전 'ㄱ의순간'. 신문지에 펜으로 활자를 지우는 작업을 지속해온 최병소의 '무제'.

우리는 길을 잃었다. 의미과잉의 시대에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길을 잃었다. 예술이라고 별 수가 있겠는가. 동파육이라는 위대한 레시피를 남긴 소동파는 <석창서취묵당(石蒼舒醉墨堂)>이라는 시에서 ‘글자를 알면서 인생의 우환이 시작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름이나 대충 쓸 줄 알면 그만인데 초서(草書) 빨리 써봐야 뭐 하냐’고 ‘책 펼치면 창황해서 사람들을 시름케 할 뿐’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최병소는 ‘글자’를 지운다. 작품 제목도 없다. <무제>라고 써 놓은 작품명이 아이러니가 된다. 글자가 와해되는 순간은 글자로 상징되는 문명이 붕괴되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최병소가 볼펜과 연필로 무수한 획을 그어 신문용지의 글자를 지우는 행위는 문명이 없던 최초의 시절로 시간을 되돌리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 작업은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너무 지루하고 고되어서 몇 년을 쉰 적도 있을 만큼” 지난한 여정이다. 잉크와 흑연이 빈틈없이 스며들어 용지의 물성마저 숯처럼 변화된 그 탄소 덩어리에는 문명을 반성하는 성찰이 새겨져 있다. 칠흑의 암흑 세상에 전시장의 조명이 살짝 깃들면 작품이 거대한 암벽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암벽이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아까 본 천전리의 거대한 각석(刻石)이다. 이렇게 나는 원형의 시간으로 되돌아왔다. 시간과 공간조차 없는 무의미의 어느 지점이다.

그 원점에서 무언가가 그어진다.

태초에 획이 있었다.

나는 쓱싹거리는 소리를 따라 이건용의 <바디스케이프 76-1> 앞에 선다. 두터운 획들이 카오스에서 빠져나와 질서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늘빛 획은 괘의 모양이다. 삼 효(爻)와 음양이 만물을 피어낼 준비를 한다. 그 만물에 인간도 속한다. 인간의 형은 신체이다. 그러므로 이건용의 ‘신체 드로잉’은 형으로 형을 구축하는 몸의 예술이 된다. ‘아음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닫는 모양을 본떴다’고 훈민정음은 말하였다. 정음은 신체를 본뜬 문자이다. 정음의 ‘ㄱ’이 ‘기역’이라는 음을 붙잡아 획이 되는 그 순간, 획이라는 형은 언어 의미의 최소단위인 음소(phoneme)와 동일체가 된다. ‘ㄱ의 순간’은 형·음·의가 조응하는 환희의 순간이다.

획은 끊임없이 나아간다. 꽃을 피우고 나비를 부르고 사슴을 뛰놀게 한다.

최정화의 연작 <ㄱ의 순간(The Moment of ㄱ)>은 획을 인류 문명사적 관점에서 조망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도 천전리의 각석과 같은 암석이 있다. 커다란 암석을 어떻게 가느다란 쇠꼬챙이에 꽂아 놓았을까 싶지만, 사실은 바다에서 부표로 사용하다 버려진 스티로폼이다. 그리고 작가는 <천전리암각화>의 새로운 버전으로 암각'화'를 구현했다. 쓰고 버린 조화를 구해다 스티로폼 암석 틈 사이로 몇 점 틔어 놓은 것이다. 그 놀라운 연금술에 넋을 잃는다. 그렇다. ‘ㄱ의 순간’은 생(生)을 ‘각’하는 순간이다. 새기는(刻) 순간이며 깨닫는(覺) 순간이다.

생명은 제 살 길을 찾아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쯤에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씨앗도 뿌리게 된다. 그리고 씨앗을 뿌리기 시작한 지 5천 년쯤 후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획이 땅에 그어진다. 바로 쟁기질이다. 쟁기에서부터 인류 문명은 출발하였다. 최정화는 석기시대 아프리카 쟁기에 형형색색 네온으로 한글을 새겼다. 문명의 출발과 문명의 최신이 만나 오묘한 풍광을 자아낸다. 현대 문명이 낭비한 것들로 만들어진 작품에는 버려지고 소외된 것들을 살피는 따스함과 문명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공존한다. 우리가 문명으로 인해 풍요로워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그만큼 인간은 자유롭고 행복해졌는지, 또 지금 우리가 누리는 문명이 다음 세대에게 떳떳할 수 있는 것인지, 혹여 식자우환(識字憂患)처럼 우리가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들이다. 어둑한 공간, 작가가 네온으로 밝혀 놓은 원시인의 낙서 같은 한글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혹시 그는 미술이 쌀로, 싹으로, 사랑으로, 마음으로, 밥으로, 엄마로 돌아가야 한다고, 그것이 예술과 문명의 초심이라고 웅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한글이야말로 문명의 초심을 잃지 않은 글자이니 미술 또한 한글의 획으로 한 걸음, 아니 열 걸음 나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에필로그

학계의 다수 견해에 의하면 훈민정음 창제에는 집현전이라는 당대 최고 지식 집단의 역할이 컸다. (창제 주체에 대해 세종 단독 창제설, 집현전 학사 조력설, 공동 창제설, 박연 창제설, 신미대사 창제/조력설 등 여러 견해가 있다는 점을 밝혀 둔다.) 세종의 총애를 받던 집현전 학사들도 세종 사후에는 운명처럼 현실 정치로 나아가게 된다. 정치란 비정한 세계이다. 학사들 중 누구는 죽었고, 누구는 살았으며, 누구는 영화를 누렸고, 누구는 역사의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1443년 훈민정음이 반포되던 무렵에는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모두 자신들의 명운을 알지 못한 채 서로를 의지하며 세종을 도와 문자혁명에 매진하고 있었다. 정인지는 훈민정음 후서에 이렇게 적었다.

“정음은 지극하다.”

♣글쓴이 최영은 2019년 수림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로 ‘로메리고 주식회사'를 썼다.

소설가 최영. '로메리고 주식회사'로 2019년 수림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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