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난민의 피난처죠"..직장인들, 호텔 월세로 몰린다
서울 강남권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30대 직장인 A씨는 비즈니스호텔에서 출근한다. 지난해 하반기 전세 대란으로 이사할 집을 구할 시점을 놓치자, 전셋집을 마련하기 전까지 회사 근처 호텔에 6개월~1년간 살기로 했다.
프리랜서 강사인 40대 B씨도 호텔살이 중이다. 이사 대신 현재 거주하는 집을 전체적으로 리모델링하기로 결정하면서 한 달 가까운 수리 기간 동안 가족들과 호텔에 머물고 있다.
16일 호텔업계에 따르면 국내 3·4성급 비즈니스호텔들이 최근 ‘내국인 세입자’ 모시기에 적극 나섰다. 특히 서울 등 도심 지역에 들어선 호텔들이 1~6개월짜리 장기 투숙 상품을 적극적으로 판매하고 있다. 2년 단위 임차가 기본이고 보증금으로 목돈이 필요한 월세 주택과 달리 1년 이내로 몇 개월만 머물 수 있는 ‘호텔 월세’인 셈이다. 보증금이 따로 없어 큰 돈을 마련하기 어려운 직장인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투숙객의 60~80%를 차지하던 외국인 관광객이 사라져 고사위기에 놓인 도심 호텔들이 월세 상품을 적극 판매하면서 나타났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외국인 입국자 수는 약 249만명으로, 직전해보다 85.5% 감소했다.
장기 투숙객을 받는 호텔은 전기세, 수도세 같은 관리비를 신경 쓸 필요 없고 청소 등 호텔 서비스(컨시어지)를 받을 수 있는 숙박시설이라는 점을 장점으로 내세운다. 호텔 대부분이 도심 지역에 있어 주요 상권이나 중심업무지구와 가깝다.
직장과 가까운 호텔이라면 단기간 머물 숙소로 활용할 만한 경제적인 이점도 있다. 한국부동산원이 집계한 올해 1월 기준 서울 도심권 중위월세가격(중간값)은 109만4000원, 동남권은 월 121만2000원이다.
지점별 운영 자율성이 높은 라마다 브랜드 호텔이 적극적이다. ‘라마다 서울 동대문’은 최단 1개월에서 최장 6개월 투숙할 수 있는 장기 투숙 상품을 판매한다. 별도 보증금 없이 체크인할 때 전체 요금을 사전결제하면 된다. 객실에 따라 가격이 조금씩 다르지만, 월 80만원 안팎이면 된다. 6개월 이용한 후에도 투숙기간을 연장할 수 있고, 한달 단위로 투숙일이 나뉘지 않으면 일할 계산한 요금을 추가로 내면 된다.
‘평택 라마다 앙코르호텔’도 장기 출장이나 파견 근무 등으로 1개월 이상 임시 거처가 필요한 경우,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호텔에 장기 투숙할 수 있다고 홍보한다. ‘페어필드 바이 메리어트 영등포’는 월 140만원대에, 글래드호텔의 강남·여의도·마포·코엑스 지점은 월 200만원대에 한 달 살기 패키지를 이용할 수 있다. 주 1~2회 객실 정돈, 주차장 이용, 식당 할인 등 혜택을 볼 수 있다.
윈덤그룹은 다른 글로벌 호텔 체인들과 비교해 자사 브랜드를 사용하는 호텔의 운영에 개입을 거의 하지 않아, 지난 2010년대 중반 분양형 호텔 개발이 인기를 끌면서 라마다 브랜드 호텔도 빠르게 늘었다. ‘평택 라마다 앙코르호텔’과 ‘김포 한강 라마다호텔’, ‘라마다 호텔 앤드 스위트 평창’ 등이 분양자를 모집해 지은 호텔들이다. 투자자들이 객실을 개별 소유하는만큼 호텔 운영 수익을 배분해 달라는 압박이 크고, 호텔 체인 본사의 운영 지침보다 호텔 소유주들이 영업전략을 크게 좌우할 수 있다.
서울 시내 한 라마다호텔의 총지배인은 "그동안 도심 호텔은 외국인 바이어나 경영자들이 장기간 투숙했지만, 코로나19(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로 외국인 유입이 급감하면서 내국인 유치가 호텔업계의 관건이 됐다"면서 "객실 판매율이 낮아진 상황에서도 직원에게 급여를 지급하고 건물 관리비 등 고정비를 충당해야 하니 장기 투숙객을 유치하는 비즈니스호텔들이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주요 호텔 체인의 비즈니스호텔도 장기 투숙 수요를 공략하고 있다. 신라스테이는 지난해 말부터 오는 4월 30일까지 기간 한정으로 서울 광화문, 마포, 부산 해운대, 제주 등 전국 12개 지점에서 '한 달 살기' 패키지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2030세대에서 인기를 끈 ‘해외 도시에서 한 달 살기’ 유행의 국내 버전이다.
최단 14일(2주)에서 최장 30일까지 투숙일을 정하면 된다. 조·중·석식 뷔페 50% 할인권, 프린트 무료 이용권 등을 담은 ‘한 달 살기 쿠폰북’과 ‘하하포포네숲’ 브랜드의 DIY(소비자가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 상품) 취미 키트를 제공한다. 신라스테이 마포를 기준으로 1박당 6만6800원(부가가치세 10% 별도)부터로, 한 달 동안 머문다면 220만원 정도를 내면 된다.

모임을 갖거나 일하는 공간으로 호텔 객실을 활용할 수 있는 상품들도 나왔다. 하얏트그룹 계열인 ‘안다즈 서울 강남’은 ‘하얏트 홈 오피스: 일일 오피스 패키지’를 판매한다. 재택 근무가 가능하지만 기분 전환이 필요한 직장인을 겨냥한 상품이다.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12시간 동안 사무용 편의시설을 갖춘 객실에서 전망을 즐기고, 업무 중간 피트니스센터를 이용할 수 있는 상품이다. 객실에서 차와 커피 등은 무료로 제공하고, 프린터 등 업무시설도 추가 요금을 내고 이용할 수 있다. 평일 기본 객실을 기준으로 하루 이용 요금은 18만~20만원(당일 표준 요금) 정도다.
안다즈 서울 강남 관계자는 "재택근무나 소규모 회의 등 때문에 호텔을 이용하려는 수요가 늘어나는 동향을 보고 개발한 상품으로, 이용 문의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면서 "코로나19 때문에 대규모 행사가 줄면서 호텔 연회장이나 회의실을 대관하기 부담스러운 소규모 업무 모임을 위해 호텔 객실을 찾기도 한다"고 말했다.
롯데시티호텔은 통상 3시 체크인, 12시 체크아웃인 투숙 시간을 오후까지 늘려 30시간 동안 머물 수 있는 ‘30시간 스테이’ 상품을 판매했다. 현재 마포점과 김포공항점을 제외하면 판매를 종료했지만, 높은 인기를 감안해 다시 판매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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