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년' 명문 토기에 담긴 백제멸망기의 6가지 비밀

이기환 선임기자 2021. 2. 16. 09: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부여 부소산성에서 출토된 ‘을사년’명 토기의 명문해독. 645년 3월15일 모시산 출신의 국이라는 장인이 만든 항아리라는 뜻으로 해독된다.|이병호 공주교대 교수 제공

‘백제 멸망기에 일시에 폐기된 이유는 뭘까’ ‘을사년 글자를 두번 쓴 까닭은 무얼까’ ‘을사년(645년) 명문토기의 마지막 글자의 정체는 무얼까’ ‘제작지는 어디일까’ ‘백제의 공납제를 증거하는 획기적인 자료일까’ ‘백제중앙의 주문생산품이 각지방에서 왔을까.’

백제 사비도성의 배후성이자 왕궁성으로 추정되는 충남 부여 부소산성(사적 5호) 안에 궁녀사라는 사당이 있다. 삼천궁녀의 한을 달래주기 위한 사당이라는데 1965년 건립되었으니 역사·고고학적 의미는 없는 곳이다.

■궁녀사에서 출토된 수백점의 유물들

그런데 지난해 7월부터 부소산성 내에 재난 방재 관로를 구축하다가 이 궁녀사 구간에서 물을 모으는 집수시설이 확인됐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본격 발굴결과 이 집수시설에서는 ‘을사년(乙巳年)’과 ‘北舍(북사)’라는 글씨가 새겨진 토기, 중국제 자기, 칠기(漆器) 등 중요유물과 더불어 백제 사비기 토기 수백점이 쏟아져나왔다. 이중 을사년(乙巳年)’ 명문 토기의 잔존 길이는 길이 43.8㎝, 너비 46.7㎝정도였다.

이 토기에는 ‘乙巳年三月十五日牟尸山菊作?’(을사년삼월십오일모시산국작□)이라는 14자의 명문이 보였다. 을사년은 주변 유적과 비교를 통해 645년으로 추정됐다.

제대로 된 ‘을사년 명문’에서 약 5cm 떨어진 곳에 ‘을사년’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이병호 교수는 “잘못 쓴 오른쪽 글씨를 그냥 두고 왼쪽에 다시 쓴 것”이라 해석했다.|이병호 교수 제공

연구소측은 “이 토기명문은 ‘645년 3월15일 모시산 사람인 국이 제작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두 글자를 합친 것으로 보이는 맨 마지막 글자가 문제였다. 이 수수께끼 글자의 정체는 무엇이고, 이 명문 토기는 어디서 왜 만들어졌을까. 여러 견해가 나왔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와 한국목간학회는 16일 연구소 회의실에서 ‘2020년 신출토 문자자료와 목간’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어 부소산성 궁녀사 구간에서 출토된 명문목간 등의 실체를 규명한다. 발굴을 담당한 김대영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와 이병호 공주교대 교수, 방국화 경북대 인문학술원 HK 연구교수 등이 발표한다.

부여 능산리 사지 및 익산 왕궁리 유적 출토 명문토기들. 맨 마지막에 토기의 기종을 나타내는 수수께끼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백제 멸망기에 왜 한꺼번에 폐기되었을까

발굴자인 김대영 학예사는 명문토기가 확인된 집수시설 내부에는 수백점의 토기가 시기차 없이 동시에 매몰됐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런 측면에서 김 학예사는 10년전인 2011년 공산성 백제왕궁 관련유적 저수시설에서 확인된 ‘정관 19년(645)명 옻칠갑’ 옷을 떠올린다. 역시 저수시설 내부에서 확인된 옻칠갑의 양상도 백제 멸망기에 누군가 한꺼번에 묻어놓은 자료로 인식되고 있다.

김대영 학예사는 “공산성 옻칠갑과 부소산성 명문토기의 연대가 공교롭게도 똑같은 645년으로 추정된다”며 “동시 폐기된 두 유구를 연구하면 백제멸망기의 상황을 짐작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병호 교수도 “부소산성 북문지 주변 조사에서 통일신라 극초기(7세기 중후반)에 해당하는 토기들이 여러 점 보였다”며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가 이곳을 진입해서 어떤 시설을 설치하는 어수선한 상황을 반영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백제멸망 후 이곳에 진입한 신라인들이 기존 백제 시설물과 그 잔재를 이곳에 한꺼번에 묻어두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부여 부소산성에서 출토된 ‘을사년’ 명 토기와 유사한 글자가 새겨진 일본의 토기들. |이병호 교수 제공

■아차! 실수로 잘못 쓴 을사년 글씨

지난해 12월에는 발표하지 못한 명문 자료가 더 있다. ‘을사년’ 명문 오른쪽 옆 약 5㎝ 떨어져 새겨진 또 하나의 ‘을사년’ 석자이다. 김대영 학예사는 “명문이 적혀있는 위치가 거의 동일한 지점이며, 같은 내용의 글자가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별도의 내용을 적으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왜 ‘을사년’ 석자를 별도로 쓴 것일까. 이병호 교수는 “아마도 명문을 새긴 백제인이 ‘을사년’을 잘못 썼다가 다시 왼쪽에 ‘을사년’을 쓰고 제작일자와 제작지, 제작자, 토기명을 새기지 않았겠느냐”고 추정했다. 이 교수는 “그러나 제대로 썼다는 ‘年’자도 통상의 ‘年’보다 획이 더 많다”며 “글씨를 새긴 이가 ‘年’자를 쓰는데 서툴렀던 모양”이라고 추정했다.

그렇게 연(年)자에 서툰 분은 누굴까. 이 교수는 “남아 있는 글자를 확대해보면 거의 모든 글자에서 필획이 끝난 부분에 흙이 밀린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면서 “따라서 토기에 명문을 기재한 이는 토기의 성형 및 조정작업을 끝낸 뒤 건조장으로 이동하기 전에 도공(토기제작자)가 쓴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일본 규슈 후쿠오카현 우시코비 가마터에서 발견된 대형 토기 파편에 새겨진 명문자료 중 부소산성에서 나온 명문과 똑같은 자료가 보인다. 그런데 이번 부소산성에서 우시코비 토기와 흡사한 ‘을사년’ 명문토기가 발견됨으로써 백제에서도 지방 특산물인 토기를 현물로 납부하는 공(조)납제가 시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병호 교수의 발표문에서

■마지막 글자의 정체는?

김대영 학예연구사는 “쉽게 특정할 수 없는 맨 마지막 글자는 일단 ‘물장군 장(기와 瓦+길 長)’와 비슷하며 이른바 ‘배가 볼록하고 목이 좁은 아가리가 있는 질그릇’ 혹은 항아리로 해석할 수 있다”고 밝힌다. 토기에 기종을 기록하는 예는 백제왕실의 사찰터인 능사와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도 보인다는 것이다.

이병호 교수도 “마지막 글자의 획 일부가 명확치않아 이견이 있을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도 “일단 발굴자의 견해대로 ‘물장군 장’자의 이체자로 해석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일본 아스카이케(飛鳥池)에서 출토된 글씨연습용(習書) 목간과, 헤이조큐(平城京宮)의 술빚는 관청에서 나온 ‘꼬리표(부찰) 목간’, 규슈(九州)의 우시쿠비(牛頸) 가마터에서 확인된 대형 스에키(須惠器·3세기 말~8세기 초에 유행한 도질토기) 항아리의 목부분 등에 이와 똑같은 글자가 확인된다”며 “특히 이 글자는 모두 ‘대형의 저장용 항아리’ 자체를 가리키는 그릇 이름”이라고 추정했다.

이 교수는 “‘을사년’ 토기의 잔존길이를 토대로 원크기를 추정 복원하면 적어도 높이 90㎝ 이상의 대형 항아리였을 것”이라며 “한성기(기원전 18~기원후 475년)부터 사비기까지 백제에는 다양한 크기의 토기들이 존재했다”고 전했다. 그 중 ‘을사년’ 토기의 맨 뒤에 붙은 ‘瓦+長 모양’은 높이 80㎝, 구경 35㎝보다 훨씬 더 큰 초대형 항아리를 지칭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瓦+長’은 높이 80㎝ 이상, 구경 30㎝”라고 한 일본 ‘호류지(法隆寺)유기 자재장’의 기록을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방국화 경북대 교수는 “일본 쇼소인(정창원·正倉院)의 기재사항 등 여러 자료를 찾아보면 ‘瓦+長’의 용량이 다양한 것으로 적혀있다”면서 “부소산성 출토 ‘을사년’ 토기를 초대형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방 교수는 “또 일본 나가야 왕(長屋王·684~729년) 저택지에서 출토된 목간에는 ‘瓦+長’ 토기를 ‘대(大)’와 ‘차(次)’, ‘소(少)’로 구분지었다”며 “여러 크기의 ‘瓦+長’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부소산성과 쌍북리, 관북리, 궁남지 등에서 출토된 다양한 ‘북사’명 토기. 임금이 거주하는 왕성의 관청인 북사의 주문을 받은 각 지방이 토기를 제작해 납품하며 찍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병호 교수 제공

■제작지 모시산은 어디일까

이병호 교수는 토기 제작지인 모시산(牟尸山)과 가장 유사한 지명이 <삼국사기> 등에 보이는 ‘마시산(馬尸山)’일 가능성이 짙다고 주장한다. 즉 <삼국사기> ‘지리지’와 ‘제사지’에는 마시산의 지명이 보이는데, 지금의 충남 예산군 덕산면으로 비정되고 있다. 마시산에는 신라의 국가제사 중 하나인 중사(中祀)를 지낸 곳으로 중시된 4진 중 서진의 가야갑악(충남 예천 가야산)이 위치하고 있다.

이 교수는 “마시산성은 웅진·사비기 대중국 교류의 요충지여서 일찍부터 백제 중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며 “명문의 ‘모시산’은 아마도 마시산 산하의 대형토기 가마제작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관련 방국화 교수는 “언어학적으로도 모음 ‘아(a)’와 ‘오(o)/우(u)’는 음교체가 되기 어렵다”면서 “모시산은 마시산의 이표기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방 교수는 “모시산이라는 명문과 이표기할 수 있는 백제 지명을 찾아볼 때 ‘무시이(武尸伊)’일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무시이’의 현재 지명으로 비정되고 있는 전남 영광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부소산성 내 명문출토지점. 1966년 삼천궁녀의 한을 달랜다는 명목으로 세운 궁녀사 인근에서 획기적인 발굴 자료가 쏟아졌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백제에서 최초로 보이는 획기적인 공납 자료?

이병호 교수와 방국화 교수는 부소산성 출토 ‘을사년’명 토기의 맨 마지막 글자(瓦+長)를 본 뒤 유사한 일본 자료를 뒤져보았다.

그랬더니 일본 후쿠오카현(福岡縣) 우시쿠비(牛頸) 가마터에서 발견된 대형 토기 파편에 새겨진 명문자료가 눈에 확 들어왔다. 우시코비 가마터는 6세기 중엽부터 9세기 전반까지 300년간 300기의 가마가 축조된 것이다. 그 중 5곳에서 대형토기에 한자를 새겨놓은 40여점의 토기가 발견된 바 있다.

바로 그 중 몇몇 토기파편에서 ‘瓦+長’자가 보였다. 그런데 이 명문을 해석하면 “713년(화동 3년)…3명이 조(調·공납·지역특산물을 바치는 일)로 ‘瓦+長’(대형 항아리)를 바친다”는 것이다. 일본은 다이호 율령(대보령·大寶令 시행·701년) 이전에 이미 토기 등을 현물로 납품하는 공(조)납제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백제의 경우 “백제의 세금제도는 고구려와 같다”(<구당서>)고 했고, “고구려는 명주·베 및 곡식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바에 따라 빈부의 차등으로 헤아려 받는다”(<주서>)고 했다.

여기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바에 따라’는 그 지역 특산물을 지칭하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한마디로 백제도 고구려와 같이 공(조)납제가 시행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자료를 뒷받침할만한 고고학적 증거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부소산성에서 우시쿠비 가마터 출토 토기와 흡사한 ‘을사년’ 명문토기가 발견됨으로써 백제에서도 지방 특산물인 토기를 현물로 납부하는 공(조)납제가 시행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됐다는 뜻이다.

즉 모시산이 충남 예산이든, 전남 영광이든 그 지역 도공인 ‘국’이라는 사람이 만든 지역 특산품(토기)을 중앙(부소산성)에 공납하면서 그 내용을 토기에 새긴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병호 교수는 “부소산성 ‘을사년’명 토기는 지금까지 확인할 수 없었던 백제 공납제도를 증거하는 자료일 뿐 아니라 일본에 이와같은 공납제도를 전해주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는 획기적인 고고학적 자료가 될 것”이라고 의미를 두었다.

부소산성 전경. 백제 사비도성의 배후성이자 왕궁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북사’명 도장이 비밀?

이병호 교수는 이 대목에서 이번에 ‘을사년’명 토기와 함께 출토된 ‘북사’명 토기에 눈길을 돌렸다. 이 북사(北舍)명 토기는 이곳 뿐 아니라 백제 말기 중앙이라 할 수 있는 부여와 익산 등지에서 7개체 이상 확인됐다. 그런데 이 ‘북사’명 토기는 공통적으로 지름 2~3㎝ 원 안에 도장을 찍었는데, 출토된 곳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다. 이병호 교수는 “이 ‘북사’명 토기는 임금이 거주하는 왕성의 관청인 북사의 주문을 받은 각 지방이 토기를 제작해 납품하며 찍은 것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백제 중앙 관청이 지방 몇몇 곳을 납품업체로 인정해주고, 각 지방의 납품업체들은 중앙에서 주문한 토기들을 제작한 뒤 ‘북사’ 도장을 찍어 ‘중앙 납품용’임을 인증했다는 것이다.

장수 침령산성에서 확인된 철제열쇠에서 ‘신대(인)외’(新大人畏)명문이 나왔다.|조명일 군산대가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발표문에서

■열쇠에서 웬 글씨가?

한편 이날 열리는 발표회에서는 조명일 군산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 연구원이 삼국~나말여초의 성인 전북 장수 침령산성에서 확인한 명문자료들을 소개한다. 하나는 사비백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철제 열쇠이다. 열쇠 몸 부분에서 ‘신대(인)외·新大(人)畏(?)’라는 명문이 확인됐다. 조명일 연구원은 “이 열쇠는 시설물을 보호하기 위한 열쇠로 판단된다”며 “명문은 열쇠가 제작된 후 끌과 정을 이용하여 새긴 것으로 직선적”이라 밝혔다.

장수 침령산성에서 출토된 명문목간. ‘別(列)道中在道使村□□□□□□□六八日(本人)’로 보이는 문구가 확인된다.| 조명일 군산대가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발표문에서

이와 함께 나무의 가지를 가공하여 제작한 목간을 촬영해본 결과 표면을 둘러가며 쓰인 묵서가 발견되었다. 대부분 그 흔적만 남아있었지만 한쪽 열에 ‘別(列)道中在道使村□□□□□□□六八日(本人)’로 보이는 문구가 확인됐다. 이 문구에 보이는 ‘도사’는 삼국시대 촌(村) 단위 행정단위에 파견되어 조세의 수취 및 행정적 임무, 각종 요역의 동원 등을 담당했던 지방관으로 알려져 있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