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의 좋은 작별을 위한 거짓말, 영화 '페어웰'[플랫]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2021. 2. 12.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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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실제 거짓말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영화 <페어웰>의 첫 장면은 알쏭달쏭한 안내문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실제라는걸까 허구라는걸까.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장면에서 의미는 조금씩 선명해진다. 뉴욕에 사는 빌리와 중국에 사는 할머니의 통화는 절반이 ‘거짓말’이다.

“추운날엔 머리를 따뜻하게 해야해.”

“모자 썼어요.”

“뉴욕에선 귀걸이도 훔쳐간다더라.”

“귀걸이 안했어요.”

걱정 많은 할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한 빌리 나름의 배려다.

하지만 할머니를 생각해서 한 거짓말이 정말 할머니에게도 좋은 것이었을까.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빌리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거짓말에 동참하게 된다. 할머니가 폐암에 걸려 3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가족들은 당사자인 할머니에게 이 사실을 숨기기로 결정한다.

“사람을 죽게하는건 암이 아니라 공포야.”

전세계에 흩어져 살던 가족들은 사촌동생의 결혼식이라는 ‘명분’까지 급조해가며 한 자리에 모인다. 그렇게 할머니만 모르는 할머니와의 작별인사(페어웰)가 시작된다.

영화 <페어웰>은 전세계 33관왕 157개 노미네이트를 기록하며 북미 배급사들 간의 이례적인 판권전쟁을 일으킨 화제작이다. 오드 제공

“좋은 의도지 않습니까. 중국 가정은 이런 경우 말씀 안드려요.”

할머니 주치의까지 동참한 이 연극이 빌리는 너무나 불편하다. 손자의 결혼 소식에 들뜬 할머니와 초상집에 온듯 죽상을 한 가족들. 작별 인사는 은밀하고 일방적이다. 어쩌면 삶의 마지막 순간 할머니도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지 않을까. 빌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첫 장면이 말해주듯, 영화는 룰루 왕 감독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했다. 왕 감독은 2013년 첫 장편 영화를 준비하던 중 할머니가 시한부 선고를 받았음을 알게 되고, 가족들은 그에게 ‘선의의 거짓말’에 동참하라고 요구한다. “그 당시 <페어웰>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걸 깨달았어요. 파토스와 부조리가 섞인 이야기요.” 왕 감독은 가족들의 거짓말에 가려진 진심을 따뜻하게 그려내면서, 불편함을 느끼는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는 가족에게 얼마나 솔직했고, 얼마나 솔직해야 하느냐고.

어쩌면 할머니도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지 않을까. 무엇이 할머니를 위한 선택인가. 할머니가 폐암으로 3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빌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오드 제공.

영화에서는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입장과 ‘거짓말도 거짓말’이라는 두개의 입장이 끊임없이 충돌한다.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과 일본이라는 낯선 땅에 자리를 잡은 두 아들이 두 입장의 대변자 역할을 한다. 스스로를 ‘미국인’이라 생각하는 첫째 아들(빌리의 아버지)와 어디서든 ‘중국인’임 잊지 않는다는 둘째 아들(빌리의 삼촌)은 미묘한 입장차. 이는 곧 슬픔을 마주하는 동양과 서양의 차이이기도 하다.

빌리의 고민은 미국과 중국,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인’의 고민으로 확장된다. 한국인 어머니와 중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계 배우 아콰피나(본명 노라 럼)의 호연은 이러한 빌리의 입체적 면모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4살때부터 할머니 손에 자란 아콰피나는 할머니와의 유대관계가 강한 빌리 역할에 미끌리듯 빨려들어갔다고 고백한다. 그는 이 작품으로 지난해 7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뮤지컬·코미디영화 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아시아계 배우 최초의 기록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의 ‘뼈있는 대화’부터 할머니 집 특유의 요란한 벽지까지. 영화 <페어웰>에서는 한국과 같은 듯 다른 중국 문화를 관찰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드 제공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의 ‘뼈있는 대화’부터 할머니 집 특유의 요란한 벽지까지. 한국과 같은 듯 다른 중국 문화를 관찰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원형 식탁에 모여앉아 샤오빙(밀가루 반죽을 납작하게 구운 중국의 전통 음식)을 나눠먹는 빌리 가족의 모습은 명절에 다같이 전을 부쳐먹는 한국 가족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밖에도 영화에 사실성을 더하기 위한 감독의 장치는 곳곳에 포진해있다. 영화의 배경이 된 중국 창춘(長春)은 왕 감독의 실제 고향이다. 빌리의 이모할머니(홍 루) 역은 왕 감독의 실제 이모할머니가 맡았다.

2019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후엔 넷플릭스를 포함한 북미 배급사들 간에 이례적인 판권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제치고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즈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는 등 전세계 33관왕을 달성했다.


심윤지 기자 sharpsim@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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