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선의 풀무질] 두루미와 나

한겨레 2021. 2. 7.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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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선 ㅣ 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지난 주말, 나는 두루미를 보러 갔다. 두루미는 겨울 철새다. 러시아에서 여름을 보내고 매년 10월, 한국을 찾는다. 전세계 2000명 정도 남은 멸종위기종이다. 그중 1000여명이 지금 비무장지대에 있다.

나는 두루미가 좋다. 자태가 멋지다. 화투장과 십장생도에서 볼 때마다 매혹되었다. 그래서 출판사 이름도 ‘두루미’로 지었다. 한데 생각해보니, 두루미를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나에게 두루미는 영험한 만큼 괴리된 존재였다.

재작년 이맘때, 내비게이션에 무작정 ‘두루미’를 검색했다. 철원 ‘두루미마을’에 도착하니 거짓말처럼 100여명이 모여 있었다. 나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두루미가 이렇게 크다니. 키가 160㎝에 달한다. 타조보다는 작지만 나는 새들 중에는 가장 크다. 범과 곰이 사라진 한반도에서 단연코 가장 카리스마 있는 동물이다. 나는 넋을 놓고 관찰했다. 아니, 경배했다. 앞으로 매년 그들과 조우하기로 다짐했다.

작년에 다시 철원을 찾았을 때, 나는 군인들에게 가로막혔다. 아프리카돼지열병과 코로나19로 인해 민통선 출입이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가끔씩 한둘이 민통선 밖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그것만 학수고대할 수는 없었다. (‘학수고대’란 두루미처럼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린다는 뜻이다. 두루미가 한자로 학이다.) 허탕 쳤다. 북녘땅, 나아가 유라시아 대륙으로부터 나를 막는 철조망이 이제 두루미마저 가렸다. 나는 먼 산을 보며 다음해를 기약했다.

올해는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조류독감이 터진 것이다. 두루미가 집단감염될 수도 있었다. 나는 연천에 거주하는 지인을 수소문하여 먼발치에서 그들을 보았다. 두루미와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했다. 순간, 내가 쓴 마스크와 두루미를 둘러싼 철조망의 본질이 같다고 느껴졌다.

비무장지대의 역설이다. 이름과 달리 한반도에서 가장 무장된 지대다. 전쟁의 기운이 농후하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평화로운 곳이기도 하다. 문명의 때가 적게 묻었다. 두루미가 그래서 굳이 찾아온다. 의도치 않은 생태보전지역이다.

원래 두루미는 한반도 전역에서 볼 수 있었다. 학을 그리고 노래한 조선의 수많은 양반들이 모두 철원과 연천에 살았던 게 아니다. 한국전쟁 때부터 서식지가 줄었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이후에는 북한에도 먹이가 없어서 개체수가 급감했다. 이제 한반도에는 두루미가 겨울을 날 만한 곳이 비무장지대밖에 없다. 궁지에 몰렸다.

두루미는 공룡 시대부터 지구상에 존재했다. 살아 있는 화석이다. “두루두루” 운다고 하여 두루미다. 일부일부제를 유지하며 가족 단위로 움직인다. 30년에서 50년을 살고 80살을 넘기는 경우도 있다. 구애할 때 추는 춤이 압권이다. 예부터 사랑과 평화, 장수와 행복의 상징이었다.

내가 두루미의 매력을 열거하는 건, 그들을 어떠한 마스코트로 대상화하려는 게 아니다. 물론 세계자연기금이 판다를 내세우듯, 한반도에서는 두루미를 꼽을 수도 있겠다. 나도 처음에는 그들의 카리스마에 끌렸다. 하지만 지난주, 멀찌감치 두루미의 안부를 확인하며 느낀 건 강렬한 동질감이었다. 사랑하기에 떨어져 있어야 하는 당신. 요즘 우리의 일상 아닌가.

코로나19와 아프리카돼지열병과 조류독감 모두 기후생태위기의 증상일 뿐이다. ‘인류세’라는 핵심 사건의 발단은 야생의 식민화다. 이제 우리는 더이상 정복할 곳이 없다. 한반도에서는 민통선이 마지노선이다. 환경보호나 생명보전 같은 시혜적 태도로는 부족하다. 해법의 시작은 ‘우리는 모두 동물이다’라는 자각이다. 두루미와 나는 결국 같은 처지다. 지구의 제6차 대멸종기를 함께 목도하고 있다. 기후생태위기 앞에서는 인간도 멸종위기종이다. 내년에도 나는 두루미와의 연대를 위해 비무장지대를 찾을 것이다.

2020년 1월 강원도 철원구 이길리 소란탐조대 앞에서 겨울비를 맞고 있는 두루미 ’소란이’(오른쪽) 가족.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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