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경계선에서 나는 당신을 모른다.

2021. 2. 3.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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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촬영

사랑은 현존과 부재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시계추다. 특히 사랑의 부재가 드러날 때 우리는 더욱 사랑을 갈망한다. 누구든지 기억의 장소에는 사랑의 흔적이 있다. 어느 맑은 날이든지 몹시 흐린 날이든지 일상이 잠시 물러나는 날에 올라오는 사랑의 기억은 그나마 이 척박한 세상을 살면서 우리에게는 달콤한 수액이 아닐 수 없다. 그 사랑이 아득하게 멀어진 외국 땅처럼 낯설게 느껴져도 그것은 인생의 광맥처럼 언제든지 이야기를 꺼내오며, 현실의 반란을 잠시 일으키는 기억의 장소다. 오늘 읽어보는 시는 조용미 시인의 “그날 저녁의 생각”이다. 이 시는 사랑의 부재가 주는 아련함과 쓸쓸함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의 완전한 고독을 안겨준 타자성을 느낄 수 있는 시다.

「손을 주머니로 가져갔던 그 저녁은 살아있는 듯 몹시 추웠다. 물건처럼 나는 한쪽 손을 전달했다 낯선 골목을 익숙한 듯 바라본다당신은 나의 괴로움을 모른다 당신은 나의 정처 없음을 모른다 당신은 이 세계가 곧 무너질 것을 모른다우리는 잠시 코트 주머니 속의 공간을 절반씩 나누어 가졌다 당신이 그 순간을 기억해 낼 수도 있다는 희미한 가능성을 나는 염두에 둔다우리가 아주 오래전에 한 번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당신이 하게 되려는 그 순간 손은 주머니에서 문득 빠져나왔다그날 밤은 몹시 추웠던가 당신의 주머니에 들어갔다 나온 손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 단정하게 손목 아래 가만 놓였다당신이 하려던 생각처럼 우리는 죽기 전에 한 번쯤 만났을지도 모른다 온전하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기억이란 무엇인가나는 당신의 거짓을 모른다 당신의 죽음을 모른다 저녁의 감정을 가장한 당신의 슬픔을 모른다 이 세계가 실재가 아님을 모른다」

손을 주머니에 넣고 맞잡던 그날 저녁, 주머니 속에서 절반씩 나누어 가졌던 공간은 현존이었으나 그 날의 낯선 골목은 부재의 암시다. 화자의 손이 그의 손에 전달되었지만 사물이 된 듯한 현존이다. 그것은 일방통행처럼 나의 고통을 모르는 정처 없는 사랑으로 그에게로 건너갔고, 염두에 둔 희미한 가능성은 실체 없음으로 사라진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말하기를 부재를 겪는 것은 남아있는 자이며, 사랑했던 그/그녀는 끊임없는 출발, 여행의 상태라고 한다. 떠난 자는 철새이며, 부재를 말하는 자는 사랑을 곱씹고 있는 사람이란다. 그러므로 화자는 칩거하고 있으며 움직이지 않고 사랑을 언표하고 있는 유보된 자가 되어 그 날 저녁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한 날 한 시에 죽자”는 고백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의 초기 증세다. 초기 증세는 질병적 이라고 말해도 과하지 않다.(사랑이 끝난 후 돌아본다면)

진한 감동의 에로스적 사랑은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진다. 그러나 어떤 사랑이건 둘은 같은 사랑의 무게로 사랑하지 않는다. 더 사랑하고 있는 한 사람, 덜 사랑하고 있는 한 사람이 존재한다. 사랑이 끝나면 더 사랑하는 사람이 남겨지며, 사랑의 대상을 소환하는 이도 더 사랑에 빠졌던 사람이다. 이것이 사랑의 생태계일지도 모른다.

정희진 작가에 의하면 사랑에 삶을 더하면 이별이라고 한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부식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더욱이 사랑은 시간 앞에 가장 무력하게 쓰러진다. ‘사랑한다’의 반대말이 ‘사랑했다’라고 하듯 언제나 사랑은 유동적이며, 과거형의 언어를 포함한다.

사랑이 끝난 후 사랑의 대상이 귀환을 결정하는 일은 드물다. 그래서 남겨진 자는 더 아프고 쓰린 기억 속에 있다. “당신이 하려던 생각처럼 우리는 죽기 전에 한 번쯤 만났을지도 모른다 온전하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기억이란 무엇인가”처럼 그 기억은 심지어 미학적인 영상으로 남으며, 한 동안 일시적인 세상의 스크린으로 작용한다.

“우리가 아주 오래전에 한 번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당신이 하게 되려는 그 순간 손은 주머니에서 문득 빠져나왔다”는 시구에서처럼 감정 선의 교차가 주는 아슬거림은 인연의 어긋남을 선언하고 만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면서 수많은 인연들을 만나고 흘려 내보내며 살아왔다. 마치 하늘이 내려준 선물 같은 사람도 어느 순간 흐르는 강물처럼 자신의 길로 흘러나가고, 어떻게 이런 인연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불행한 인연도 해석불능 상태로 운명적 수용을 하는 인연도 있다.

인연이란 무엇인가? 기독교에서는 결혼 같은 중요한 관계는 하나님의 뜻을 물어 결정하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억겁의 인연이 이 세상에서 옷깃을 스친다고 하지 않던가. 그 만큼 인연은 신성하며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그 신성은 이 세계에서 시간과 장소가 주는 우연성의 산물처럼 우리에게 온다. 우연은 결국 필연과 만나 짝을 이루며 이야기의 맥을 형성한다. 우리 각자의 이야기 속 인연이 주는 기쁨과 슬픔은 얼마나 다양한가. 이 지구에는 70억 개의 이야기가 지금도 이어지며 발생하고 사라진다. 이야기들은 한 인간의 삶을 좌지우지하며 고통과 회복을 반복시키고 있다.

이 시의 화자는 옛 연애의 기억 속에서 사랑하던 그/그녀를 회상하지만 모르는 사람으로 소환되는 것에 놀란다. “나는 당신의 거짓을 모른다 당신의 죽음을 모른다 저녁의 감정을 가장한 당신의 슬픔을 모른다 이 세계가 실재가 아님을 모른다” 코트 주머니를 나누어 가졌던 사람이었지만 아는 것이 없었다는 것, 이것은 타자성에 대한 깊은 사유를 던져준다. 내가 당신을 알고 있는 것이 맞는가? 나의 원함이 당신의 원함과 일치할 수 있는가? 나는 단언컨대 이불을 수십 년 같이 덮어도 상대와 일치하는 그 무엇이 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또한 “저 사람의 속은 알다가도 모르겠어”가 수시로 우리를 괴롭게 만들지 않던가.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에서 “그가 그인 것은 성격이나, 외모나 그의 심리 상태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의 다름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다. 어쩌면 나 아닌 다른 타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모험을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나는 사랑은 언제나 아름다운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은 때로는 찌그러짐과 아픔을 동반한 아름다운 예술이다. 장 다비드 나지오의 ‘사랑은 왜 아플까’에서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를 흥분시키고, 그 흥분을 절정에 이르게 한다는 믿음을 준다. 그는 우리를 자극해서 꿈꾸게 만들면서 실망시킨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의 결핍이다.” 또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은 외투걸이란다. 우리는 거기에 우리의 환상을 걸어놓는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빠지는 것과 동일하다. 그리고 사랑이 떠난 후 남는 회한 역시 자기 자신에 대한 회한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 후에 자기 자신을 다시 재발견하는 작업을 거치는 것이다. 시의 화자가 온전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기억 속에서 만질 수 없는 타자를 통해 자신의 깊은 실재를 되묻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온미영 우버객원칼럼니스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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