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통해 나를 넘어 내가 사는 세상 보게 돼" [차 한잔 나누며]

김준영 2021. 1. 11.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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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내언니전지현과 나' 박윤진 감독
'일렌시아' 둘러싼 게임속 세상 담아
"우리사회 게임 보는 시각 부정적
순기능 있는 점도 잊지 않았으면"
사회적 거리두기 불구 관객들 호응
"앞으로는 캐릭터 접근 넘어서
생태계 전체 조망·고민 하고파"
‘내언니전지현과 나’의 박윤진 감독이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의 호우주의보 사무실에서 영화 제작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허정호 선임기자
“유병장수~!”

넥슨이 1999년 출시한 온라인 게임 일렌시아에서 한 이용자가 소원을 빌며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졌다. 10년 넘게 이벤트는커녕 업데이트조차 한 번 없이 방치돼 온갖 버그가 난무하는 게임이지만, 서비스가 중단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소박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버그도 버그 나름이다. 게임이 강제종료되는 버그(팅버그)까지 발생해 접속조차 힘든 지경이 되자 ‘내언니전지현’ 아이디를 쓰는 이용자 박윤진(29) 감독이 앞장서 넥슨과 직접 대화에 나섰다. 지난달 3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의 대략적인 줄거리다.

지난달 29일 배급사 ‘호우주의보’ 사무실에서 만난 박 감독은 “2018년 2월경 첫 촬영에 나선 뒤 다른 게이머를 비롯해 영화계와 게임업계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주변에서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게임을 하면서 살고 있음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

그간 우리 사회에서 게임을 바라본 시각은 부정적 일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독’이나 ‘과금’ 등의 이미지를 덧씌우다 못해 국제기구까지 나서 질병코드를 부여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적으로 대유행하는 와중에 질병코드 부여에 앞장섰던 세계보건기구(WHO)가 돌연 게임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자는 ‘플레이 어파트 투게더(Play Apart Together)’ 캠페인을 부르짖는 아이로니컬한 상황으로 마무리되기는 했지만. 박 감독은 “게임을 질병으로 치부하는 논리는 공부나 일 등 다른 어떤 것에 붙여도 마찬가지”라며 “게임의 순기능도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게이머들이 주도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 몇 안 되는 사례로 꼽힌다. 지난달 3일 개봉 이후 2400명이 넘는 관객이 영화를 관람하며 ‘조용히’ 응원을 보냈다. 최근 개봉한 주요 다큐멘터리 영화의 관객이 1000여명에 그치는 것을 감안할 때 이례적인 호응이다. 특히 사회적 거리두기가 매우 강화된 기간이었다는 것에 비춰 보면 아쉬우면서도 고무적인 대목이다.

박 감독이 직접 사태 해결에 앞장선 계기는 간단명료했다. 사람이 좋아서. 직장이든 학교든 사람이 모이면 어떤 차원으로든 커뮤니티(공동체)가 발전한다. 박 감독이 10년 가까이 운영해온 ‘마님은돌쇠말쌀줘’ 길드 또한 여느 커뮤니티처럼 부침을 겪었다. 생업으로 활동이 뜸해져서, 불화로, 때론 그냥 등 저마다 이유로 떠나거나 크고 작은 위기를 겪었지만 사람이 좋아서 남은 길드원들이다. 박 감독은 “‘게임이든 길드든 망해서 다 떠나도 상관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지만, 나마저 손을 떼면 정말 끝날 수 있을 것 같아 중심이 돼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회고했다.

박 감독은 넥슨의 노조 지회장과 전 임원 등 여러 관계자를 만나고 조언을 구하며 결국 넥슨과 얼굴을 마주했다. 박 감독이 직접 선정한 9명의 이용자가 함께 앉았지만 여기서 새로운 문제가 터졌다. 일렌시아의 발전을 위해 모였다고 생각했는데, 그 목표를 이루는 방식은 제각각이었던 것. ‘업데이트를 하면 어느 선까지 할 것인가’, 혹은 ‘업데이트를 하다가 매크로(반복작업을 자동화하기 위해 만든 프로그램)까지 모두 막히는 것은 아닌가’, ‘운영자의 복귀가 정말 좋은 것인가’ 등 다양한 지점에서 이견이 분출했다.

그렇게 지난한 여정을 거쳐 첫 만남을 마쳤지만 결과적으로 큰 변화는 없다. 10년 만의 첫 이벤트가 열리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잔 버그들이 좀 해결된 거 외에는 내세울 만한 게 없다. 박 감독은 “이런 경험이 처음인 터라 자료조사 등 여러모로 부족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첫 간담회는 대화의 시작에 의미를 뒀다”고 말했다.

‘노사 협상’이나 ‘동물국회’ 등 제3자의 입장에서 별생각 없이 넘겼던 우리 주변의 협상과 갈등 상황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3년여 제작 기간은 박 감독의 영화인생에도 새로운 동력이 됐다. 그는 “지금까지 습작이나 단편을 하면서 나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었다면 앞으로는 나를 넘어 내가 사는 세상을 볼 수 있게 됐다”며 “캐릭터를 넘어 생태계 전체를 조망하고 고민하는 감독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김준영 기자 papeniqu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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