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풍모방을 통해 바라보는 현대 한국과 대서울(Greater Seoul)

2020. 12. 2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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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덕의 직업적 책읽기] <원풍모방 노동운동사> <공장이 내게 말한 것들> <풀은 밟혀도 다시 일어선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오늘 소개할 책은 옛 원풍모방 노동조합의 행적과 조합원들의 구술을 담은 원풍모방노동운동사발간위원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원풍모방 노동운동사>(삶이보이는창, 2010), 원풍동지회가 낸 <공장이 내게 말한 것들>(실천문학사, 2016), 역시 원풍동지회의 <풀은 밟혀도 다시 일어선다>(학민사, 2019)이다. 이 글에서는 원풍모방이라는 대상을 ①원풍모방의 민주노조 운동 ②원풍모방 노동조합원들이 걸은 네 가지 길 ③원풍모방과 아파트단지들 ④대서울의 확장이라는 네 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것이다.

민주노조운동

1970년 11월 13일에 전태일 선생이 분신(焚身)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민주노조 운동은, 1978년 2월 21일에 쟁의 중이던 동일방직 노동조합원들에게 회사 내의 반대파 남성들이 똥물을 부은 사건, 1978년 8월 11일에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이던 YH무역 노조원들을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김경숙 선생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사건 등을 거쳐, 오늘의 주인공인 원풍모방 노조원들이 1982년 9월 27일부터 10월 1일에 걸쳐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의 공장 안에서 쟁의를 벌이다가 구사대·폭력배·경찰에 진압되고 정선순 조합장은 납치되어 화곡동 쓰레기장에 버려진 사건을 마지막으로 일단 종료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견뎌낸 "청계피복, 동일방직, 원풍모방, 반도상사, 삼원섬유, YH무역 등이 주류를 이룬 민주노조운동" (전YH노동조합・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엮음, YH노동조합사, 형성사, 1984, 251쪽)은 전두환 정권의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공식적인 활동을 중단했다.

▲원풍모방 지도. ⓒ<원풍모방 노동운동사>

여성 공장 노동자들이 주축이 되고 소수의 남성 노동자들이 함께한 이 민주노조운동은 "1980년대 노동운동사에서 마치 공백기나 빈 괄호처럼 처리되"(<원풍모방 노동운동사> 703쪽)는 경향이 있다. "70년대 민주노조의 마지막 보루였던 원풍노조가 파괴되자, 지식인 운동권 일부에서는 70년대 노동운동을 경제주의니 조합주의니 하면서 매도했다."(<풀은 밟혀도 다시 일어선다> 167쪽) 계급적·젠더적인 편견에서 비롯된 이러한 비판에 대해 원풍모방 노조원이던 박순희 선생은 이렇게 반론한다.
70년대 노동운동은 연대투쟁하지 않았다는데 70년대만큼 연대투쟁한 적도 없어. 연대라는 용어를 쓰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조합원들 다른 사업장 싸움에 얼마나 두드려 맞고 경찰서를 내 집 드나들 듯이 했는데. 방림방적에서 '한 시간 일찍 출근하고 한 시간 늦게 퇴근하기'라는 새마을운동을 해서 두 시간 임금 착취하는 거 그거 받아내기 위해서 투쟁할 때 우리도 가서 유인물 돌리고 함께했지. 그뿐 아니야. 남영나이론, 해태, 롯데, 하여튼 어디든 싸움할 때 우리 조합원들이 끼지 않으면 그 홍보 작업이 되지 않았다니까. 동네 집집마다 다 유인물 넣고 다니고, 집회라는 집회는 다 쫓아다녔지. 우린 안간힘을 써서 했어. 그게 연대지. (<원풍모방 노동운동사> 337쪽)

이렇듯 1970년대에 맹렬히 활동하다가 박정희·전두환 정권에 의해 노조를 강제로 해산당하고 블랙리스트와 경찰의 감시에 시달린 여성 민주노조운동가들의 활동을 폄하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대학생"으로 상징되는 지식인 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노동자들에게 사상성이 없다고 비판했고, 자신들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노동자들을 대했으며, 자신들이 뜻하던 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대개는 금방 현장에서 떠났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서는 자신들이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었다고 자처하며, 노동자·민중·피해자들을 대변하기 위해 정치인·국회의원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변명하고 있다. 2020년 5월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당사자인 이용수 선생이 그간의 사정에 대해 폭로하고 비판한 것도 이와 마찬가지 맥락이었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지식인 집단과는 반대로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선생은 김대중 선생이 1987년 국회의원 출마를 제안했을 때 "만일 노동자들이 이소선이 국회의원으로서 노동자를 위해 일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여겼다면, 이소선은 아마도 그 요청을 받아들였을지 모"르지만, "이소선은 보통 노동자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여"(전순옥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 - 1970년대 한국 여성노동운동에 대한 새로운 자리매김>(한겨레신문사, 2004) 276쪽)겨서 이를 거절했다. 국가 권력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노동자 당사자들은 여전히 비정규직으로 고생하는데, 피해자들을 대변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민주화 경력을 내세워 영달을 누리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일이다.

이렇듯 사변적이고 조급했으며 무책임한 지식인 집단에 대한 공장 여성노동자들의 비판과 반감은 다음과 같은 발언들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소위 말하는 이들 활동가의 문제점은 여러 가지다. 첫째, 그들은 인내심이 없다. 그들은 빠른 시일 내에 무언가를 이루고 싶어 한다. 무언가를 해서, 성공할 수도 없는 파업을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면 그들은 떠나버린다. 정치적으로 의식화된 노동자들이 학생들을 경멸하고 그들과 함께하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전순옥, 같은 책 370쪽에서 재인용)

나는 학생들이 단기간 개입하는 방식이 싫고, 또 노동자의 일터가 그들의 실험무대가 되는 것도 싫다. (전순옥, 같은 책 370쪽에서 재인용)

그들의 열정이 강하면 강할수록 거꾸로 변혁이론에 현실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식의 문제점들이 속출하기도 했다. 하루빨리 성과를 얻어내야 한다는 조급성도 큰 문제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는 노동자들과 다른 그들의 존재 그 자체에 있었다. 즉,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노동자로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숙명적 노동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원풍모방 노동운동사> 686쪽)

민주화투쟁의 광장에서 최루가스도 꽤 마셨다. 그 역사의 현장에 항상 노동자들이 있었다. 훗날 같은 자리에서 시선을 함께했던 많은 지식인들이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하는 것도 보았다. 같이 바라보았던 진실을 왜곡하고 부정하는 사람들도 보았다. 인간이 마음 한번 뒤집는 순간 간악하고 잔인해지는 것을 보며 스스로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도 처음 그 자리는 늘 우리 자리였다. (<풀은 밟혀도 다시 일어선다> 412~413쪽)

지식인 집단과 남성 중심의 노동조합들이 여공들의 민주노조운동을 폄하하고 공백기로 치부하려는데 대해, 동일방직 똥물사건의 당사자였던 이총각 선생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남한 노동운동이 1987년 이후 엄청나게 진보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외부인들은 그 모든 일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났다는 인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오늘날 노조 지도자들이 누리는 안락한 생활은 그들 자신이 노력한 결과가 아니라 이전 세대가 투쟁해 온 결과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1970년대 노동자들의 희생은 모두 잊혀져버렸다." (전순옥, 같은 책 363쪽에서 재인용). 1950~70년대에 인천에서 산업 선교 활동을 하다가 1974년의 인혁당 사건과 관련되어 추방된 목사 조지 오글(George E. Ogle)도 "1980년대 중반 남성 노동자들이 스스로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십 년 넘게 정의를 위해 투쟁해 온 여성 노동자들의 어깨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전순옥, 같은 책 348쪽에서 재인용)라고 지적한다.

남자이자 대학을 나온 지식인 집단이 아닌, 여성 공장 노동자들이야말로 현대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희생을 치르면서도 가장 끈질기게 국가 폭력에 맞서 투쟁한 집단이었다. 이들에 반해 지식인 집단은 당시의 사회 운동을 해석할 때 과대 대표되어 있고 그들의 행적은 과대평가되고 있다. 자신들의 입장을 글과 말로 표현할 방법을 알고 통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이러한 함정에 빠지기 쉽다고 생각하며, 원풍모방 노동조합이 해산하는 마지막 순간인 1983년 1월 19일까지 함께 한 이우정 선생(<풀은 밟혀도 다시 일어선다> 423쪽)과 같은 분이 대안적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초기에 그는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노동자들에게 거부당했다. 노동자들은 지식인들이 노동운동에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의욕적으로 뛰어들었다가도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아주 쉽게 돌아서는 지식인의 행태에 환멸을 느낀 탓이었다. 더욱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이 중년 여성의 높낮이 없는 어조와 귀티 나는 분위기는 노동자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이우정은 자신이 '노동자의 벗'임을 가장하는 건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한계와 가치에 대해서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노동자는 아니다. 내가 아무리 노동자를 이해한다고 해도 내가 노동자가 될 수 없고 당신들도 나를 노동자로 봐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이 노동운동을 하는 데 필요한 것, 예를 들면 우리의 노동법이 ILO(국제노동기구) 규정과 어떻게 다른지, 우리의 인권상황을 국제사회에 어떻게 알려야 하는지 등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통로로 나를 이용해라. 대신 나는 내가 못 가진 당신들의 투지, 끈질긴 신념 등을 배우겠다." 그렇게 말했어. 그랬더니 나를 받아들여주더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년 12월 29일 <낮은 이들의 작은 처소, 이우정 1>)

▲서울 영등포산업선교회의 흔적. ⓒ김시덕

원풍모방 노동조합의 길

1978년의 똥물 사건 때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은 인천도시산업선교회로 피신했다. 조지 오글 목사가 1961년에 개설한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현재도 일꾼교회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이다. 인천의 문화단체인 스페이스빔은 지난 2020년 10월 24일에 "어느 여성 노동자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동일방직에서 일꾼교회까지 걷는 행사를 개최했다. 이 "어느 여성 노동자의 길"이라는 아이디어에 촉발되어, 원풍모방 민주노조와 관련된 네 가지 길을 노조원들의 증언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이 네 가지 길은 민주노조 전성시대에서 해직과 명예회복에 이르기까지 기승전결의 구조를 띠고 있다.

첫 번째는 서울 신대방동의 원풍모방에서 신길역 근처의 삼성새마을중고등학교 및 영등포역 근처의 한림학원 등으로 가는 고학(苦學)의 길이다. 원풍모방의 노조원들은 공장에서 이들 학교·학원까지 걸어 다니며 아낀 돈을 고향에 보냈다. 이필남 선생은 야간 근무를 마치고 한림학원까지 걸어가면서 졸다가 신길동 신풍시장 길가의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혀 피를 흘리기도 했다. "12시간 철야를 하고 졸면서 길을 걷다 생긴 일이었다. 쥐꼬리만 한 월급에 학원비 500원을 내는 것도 부담스럽다 보니 차비 10원이라도 아끼기 위해 꾸벅거리며 걸어갔던 것이다." (<공장이 내게 말한 것들> 25쪽).

두 번째는 1979년 10월 26일의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이후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의 짧은 정치적 해방기에서 막판에 해당하는 5월 13~14일에 여의도의 노총회관에서 노동법 궐기대회를 연 뒤 해산식을 하고 대방지하차도를 통과하여 신대방의 원풍모방까지 비 맞으며 걸어간 투쟁의 길이다. 이로부터 나흘 뒤에 광주 민주화 운동이 발생한다.

여의도에서 해산식을 하고 노총회관에서 원풍모방 있는 대림동(신대방동 - 옮긴이)까지 걸어왔어요. 뭔지 설명은 못 들었는데, 여기서 해산하지 않으면 큰 문제가 생긴다면서 해산을 선언하고 방용석 지부장과 함께 조합원들 몇 백 명이 쭉 걸어오는데, 비는 내리고 그때 굉장히 참담하더라고요. (<서울역사 구술자료집 7 미싱은 돌고 도네 돌아가네>(서울역사편찬원, 2016) 169쪽)

대방동 지하도를 지날 때 캄캄한 굴속에서 부르는 우리들의 노래가 가슴을 찡하게 울렸다. 형언하기 어려운 심정으로 아무도 듣는 이 없는 두터운 벽 속에서 <오 자유>를 부르며 노동운동은 참 외로운 것이다라는 생각에 잠겼다. (<원풍모방 노동운동사> 438쪽)

세 번째는 1982년 9월 27일에서 10월 1일 사이의 추석 연휴 시기에 노조원 243명이 연행되고 퇴직 처분 받은 뒤, 10월 13일에 동작구 신대방동의 원풍모방 정문에서 출근 투쟁을 하다가 관악구 신림동의 서울남부경찰서로 연행되어간 탄압의 길이다. 1972년에 개설된 남부경찰서는 옛 영등포구에서 떨어져 나온 관악구·구로구·금천구를 관할했으며, 2006년에 금천경찰서로 이름을 바꾼 뒤에도 한동안 관악구 신림동에 있다가 2018년에 금천구 시흥동으로 옮겨갔다.

박순자 선생의 고모님은 이날 아침의 출근투쟁 장면을 찍으러 텔레비전 방송사에서 나와 있는 것을 보고는 "이놈들아, 방송도 똑바로 하지 않으면서 왜 카메라로 찍느냐."(<풀은 밟혀도 다시 일어선다> 366쪽)라며 기자의 카메라를 부수기도 했다. 9월 27일의 폭력 진압 당시 구사대와 함께 나타난 텔레비전 기자들이 "이렇게 쉽게 노조를 깰 수 있는 것을 왜 그토록 오랜 시일이 걸린 거지?"(같은 책 468쪽)라며 비웃고, 사실을 왜곡한 방송을 내보낸 데 대한 반감의 표출이었다.

이날 노조원들은 전경과 형사들에게 쫓길 때마다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면 그들은 쫓다말고 "가슴에 손을 얹고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 시절만 해도 애국가가 나오면 가던 길도, 하던 행동도 멈추고 국기 방향을 향해 예의를 갖춰야 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애국가를 밤새도록 부르다보니 처음엔 1절만 하던 것을 나중에는 4절까지 부르게 되었다. 1박 2일 동안 투쟁가와 애국가는 남부경찰서를 뒤흔들었다."(같은 책 538쪽). 이처럼 현재 비어있는 남부경찰서 청사는 1970년대 민주노조의 최후 저항 활동이 펼쳐졌던 곳이다. 현재 이 청사와 부지를 어떻게 활용할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뒤에서 서술하듯이 원풍모방 공장 부지는 이미 아파트가 되어 있으니, 이 국가 소유의 남부경찰서 청사 부지를 민주노조운동 기념 공간으로 활용하면 어떨까.

마지막인 네 번째 길은 1982년 크리스마스이브, 노조 분쇄 이후 조합원들이 임시로 머물던 영등포 산업선교회에서 8명의 노조 간부가 수감되어 있던 고척동 구치소까지 촛불을 켜고 걸어가던 인내와 부활의 길이다. 이 길에는 원풍모방을 비롯한 여러 공장의 노동자들도 함께 했고, 교도소에서도 원풍모방과 콘트롤데이터 구속 노동자들의 이름을 모두 외쳐서 연대의 뜻을 표했다.

노동교회에서 성탄예배를 마치고 초롱불을 들고 고척동 구치소로 새벽송을 하러 갔다. 대다수가 원풍노동자들이었지만, 다른 공장 노동자들도 많이 동행해주었다. 초저녁에 화려했던 성탄 트리도 잠이 든 듯 꺼져 있는 늦은 밤길을 수십 명이 무리지어 걸어갔다. 적막하다 못해 괴괴하기까지 한 구치소 정문 앞에 서보니 가슴이 먹먹했다. 우리는 찬송가 대신 구속자들의 이름을 한 사람씩 부르기 시작했다.

"방용석! 박순희! 정선순! 박순애! 양승화! 김숙자! 차언년!"

그리고 콘트롤데이터 노조구속노동자 "이태희! 박영선!"

목이 터져라 불렀다.

구치소 안 어디쯤 갇혀 있는지를 짐작할 수 없던 우리는 그 어둡고 침침한, 그래서 괴괴하기까지 한 구치소 울타리를 끼고 돌면서 구속자들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공장이 내게 말한 것들> 335~336쪽)

구약성경의 "여호수아" 6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포위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니 성벽이 무너졌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1982년 12월 24일에 이들 노동자들이 구속된 자들의 이름을 외치며 돌았던 고척동 교도소 역시 철거되었고, 노동자들은 명예를 회복 받았다. 1982년 9월 27일의 원풍모방 노조 탄압 사건 당시, 아래의 인용문에 나오는 극히 일부의 인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종교인·정치인·지식인 집단은 이들 노동자를 외면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를 구원했다.

운동장으로 뛰쳐나갈 때 신발이 벗겨져 맨발이었다. 나 말고도 맨발로 끌려 나온 사람들과 함께 양문교회로 갔다. 어떤 목사님이 양문교회 문을 막 두드렸더니 문이 열렸다. 그 분은 원풍모방 노동자들이 쫓기는데 왜 문을 안 열어 주냐고, 하늘에서 하느님이 다 보고 계신다고 막 호통을 쳤다. (<풀은 밟혀도 다시 일어선다> 387쪽)

남편은 그 이후부터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헐벗고 병든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교회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같은 책 89쪽)

이들 원풍모방 노조원들은 1984년, 원풍모방에서 영등포역에 이르는 신길로 중간에 있는 연립주택에 공동 자금으로 "원풍의 집"을 마련하고 오늘날까지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1982년 크리스마스이브의 행진은 이 수십 년에 걸친 단결과 저항을 위한 새로운 첫 걸음이었다. 이 네 갈래 길을 걸으며, "민중의 지팡이"여야 할 경찰, 그리고 동료인줄 알았던 남성 노동자들로부터 폭행당하면서도 민주노조를 지키려 했던 원풍모방 민주노조원들을 생각한다.
▲<원풍모방 노동운동사>, <공장이 내게 말한 것들>, <풀은 밟혀도 다시 일어선다> ⓒ프레시안

원풍모방과 아파트단지들

이상의 원풍모방 노동조합 이야기는 수많은 책과 기사에 소개되어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이 인생을 걸고 국가과 회사의 불법적인 탄압에 맞서 싸운 과정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한 되풀이하여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원풍모방에 대한 자료를 읽어보면, 주로 노동조합에 관심이 집중되는 그 가운데 회사의 소유주 변동 및 이에 따른 공장의 통폐합과 이전 문제가 스쳐가듯이 언급되고는 한다. 또한, 회사가 위치한 오늘날의 동작구 신대방동 보라매공원 일대는 옛 공군사관학교 부지로서, 이 지역에는 한국전쟁 당시 남편·아버지를 잃은 가족을 수용한 모자원(母子院), 상이용사들을 수용한 재활용사촌·신생원호아파트와 같은 군사 관련 시설이 밀집해 있었다. 이들 시설은 현재 대부분 재건축·재개발되어 사라졌으나 원풍모방 노동조합이 해체되는 시점까지는 아직 이 지역에 남아 있었다. 따라서 이들 시설의 변천사를 파악한다면 원풍모방 노동조합의 활동을 좀 더 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원풍모방 노동조합의 활동을 공간적 차원에서 이해함으로써 대서울(Greater Seoul)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다.

원풍모방의 전신인 한국견방을 1953년에 설립한 이는 개성상인 단사천, 임실 사람 최주호, 김재현 등 세 명이다. 1961년에 김재현 사장이 사망하면서 최주호가 새로이 사장으로 취임했고, 1963년에 회사 이름을 한국모방으로 바꾼다. 이 해는 이 회사에서 최초의 노동조합이 결성된 해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7년 뒤인 1970년에는 국세청이 단사천을 탈세 혐의로 수사하면서 경영진이 백태하 사장 등으로 교체되었고, 청와대 경호실 출신의 연세개발 사장 박용운이 한국모방을 인수했다. 1973년에는 회사에 부도가 발생하면서 노사 협의체인 수습대책위원회가 발족했고, 1974년에는 이상순의 원풍그룹이 한국모방을 인수하면서 원풍모방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79년에는 양정모의 국제상사그룹이 원풍산업을 인수하면서 노조 탄압을 본격화하여 1982년 9・27 사태에 이르게 된다. 전두환 정권을 등에 업고 노조를 무력으로 파괴한 국제그룹은,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전두환 정권에 의해 1985년에 도산된다. 국제그룹 해체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권력이 재계(財界)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사례로서, "대기업이라 할지라도 권력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취약한지, 권력에 의해 공권력과 금융 기관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유감없이 보여"(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원풍모방 노동조합원들의 눈으로 보자면 인과응보이자 토사구팽이다.

국제그룹이 해체된 뒤의 원풍모방은 1987년에 옛 소유주인 우성건설의 최주호에게 다시 인수되어 우성모직으로 이름을 바꾸고 충청북도 청주시로 이전한다(<중앙일보> 1987년 5월 14일자 '한국모방 10여년 "방랑" 끝에 다시 창업주손에'). 그리하여 해직 노동자들은 민주화운동 관련자로서 명예회복이 된 뒤인 2004년에 우성모직에 복직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한국은 아파트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원풍모방을 둘러싼 소유주 변화 역시 아파트로 상징될 수 있다. 우선 한국견방의 공동 설립자인 단사천은 1970년에 연세개발의 박용운에게 소유권을 넘겼는데, 당시 연세개발은 서울 마포구 연남동 마포구 372-4에 연세생산성멘숀아파트를 짓고 있었다. "연세" 개발이 건설한 "생산성"을 추구한 "멘숀" "아파트"라는 이름은 오늘날의 아파트 작명 감각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생산성'이라는 단어에 대해 1970년 5월 3일자 <조선일보> 1면 하단에 낸 광고에는 "생산성이란… 아파트 일부 구역에 가내수공업수출쎈타를 설치하여 희망에 따라 주부들의 여가선용으로 수익성을 높인다"라고 해설되어 있다.

"싸우면서 건설하자"라는 1969년의 기록영화 제목이 상징하듯이,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아파트에서도 생산과 수출을 요청하고 있었다. 생활과 생산을 결합시킨다는 개념은 일찍이 신앙과 생산을 일체화한 감람나무 박태선 장로의 전도관·신앙촌(1957년)에서 시도된 바 있고, 연세생산성멘숀아파트를 거쳐 잠실주공아파트의 새마을회관(1976년)으로 이어진다. "전업주부 약 200명을 모아 봉제작업 등으로 월 160만 원 정도의 소득을 올릴 수 있도록 하자는" 잠실주공아파트의 새마을작업장에 대해 손정목 선생은 "실로 기발한 착상"(<서울도시계획이야기 3>(한울, 2003) 231쪽)이라고 평가하지만, 사실은 연세생산성멘숀아파트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도 이 '생산성'이라는 단어는 꽤나 이질감을 불러일으킨 듯, 1970년 9월 15일자 <대한뉴스>는 "연세맨션아파트 상량식"이라고 하여 '생산성'이라는 단어를 빼고 준공식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길쭉한 외형이 인상적이던 연세생산성멘숀아파트는 연세맨션아파트·연세맨션·연세아파트(<중앙일보> 1972년 6월 17일자 '연세아파트, 서울은서 인수') 등으로 불리다가 2003년에 코오롱 하늘채 아파트로 재건축된다.

▲연세생산성멘숀아파트 준공식 장면. ⓒ대한뉴스 화면 캡처

한편 1974년 한국모방을 인수한 이상순은 1965년에 원풍산업을 설립한 뒤 원풍그룹 총수로 활동했는데, 한국모방 인수 과정에서 김용환 재무부장관의 특혜를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져 물의를 빚은 바 있다(<조선비즈> 2014년 11월 7일자 [한국의 큰손들]④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을 외손녀사위로 둔 '대부' 이상순). 원풍모방 노동조합의 역사를 살피다보면 노량진의 "원풍모방 제2공장"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곳이 원풍산업 자리를 가리키는 것 같다. 1989년에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서울특별시 동명연혁고 XIII 관악·동작구편>에서는, 동작구 노량진동 빨래골을 설명하면서 "원풍산업(현 국제상사 창고) 뒤편에는 관악산 줄기에서 졸졸 흘러 내려오는 맑은 물을 이용해서 아낙네들이 빨래를 했다고 해서 빨래골이라 했다."(147쪽)고 적고 있는데, 이상순이 1979년에 원풍그룹의 지분을 국제상사에 넘긴 것과 맞추어보면 2001년에 삼익아파트가 들어선 노량진동 330이 원풍산업=원풍모방제2공장=국제상사창고인 것 같다. 다만 이 추정을 확신하기에는 아직 정보가 부족하니, 혹시 관련 정황을 잘 아시는 분이 계시면 가르침을 부탁드린다.

한편, 1970년 한국모방을 잃은 뒤 1987년에 원풍모방을 다시 인수한 최주호는, 그 사이에 중랑천 동쪽 중화동에서 보도블럭을 제조·판매하며 재기를 꿈꾸었다. 그의 넷째아들 최승진은 1974년에 중화주택개발을 설립하고 1975년 중화동에 중화아파트, 묵동에 우성아파트를 건설했다. 고급아파트단지의 대명사 '우성아파트'를 건설한 우성건설의 시작이다. 중화동의 중화아파트는 1986년에 우성타운아파트로 재건축되었지만, 묵동의 우성아파트는 아직도 남아 있다. 이 최초의 우성아파트는 "상가아파트"(황두진 <가장 도시적인 삶>(반비, 2017))라 불리는 초기 형태의 주상복합 아파트로서, 당시 전국적으로 널리 지어지던 상가아파트들과 유사하고, 그 후 전국에 세워진 우성아파트들과는 다르다. 우성아파트라는 브랜드를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한 반포우성아파트는 현재 철거되어 다른 아파트단지로 재건축되고 있지만, 최초의 우성아파트는 아직 남아있어서 현대 한국의 기업사(企業史)와 아파트 문화를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2017년 철거 전의 반포우성아파트. ⓒ김시덕

나는 중고등학교 때 신반포 한신2차아파트에 살면서 이웃한 우성아파트를 신기하게 바라보고는 했다. 신반포 지역은 "한신랜드"라 불릴 정도로 한신공영에서 세운 아파트가 많았는데, 그 속에 우성아파트라는 독특한 이름의 아파트 단지가 홀로 놓여 있는 것이 기이하게 비쳤다. 손정목 선생은 최승진이 반포우성아파트를 건설하는 과정을 <서울도시계획이야기 3>에서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오늘날의 서울 강남 지역을 탄생시킨 영동 개발 과정에서 건설업자들이 어떻게 큰 부를 쌓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내용이므로, 다소 길지만 인용한다.
그의 넷째아들 승진은 어려서부터 사업능력이 있었다. 외국어대학교 무역학과를 다니면서 아파트사업을 시작했다. 1974년에 중화주택개발(주)이라는 회사를 차려 아버지가 하던 보도블록 공장터에 5층짜리 아파트 14개동을 지어 분양했고, 이어서 그 이웃에 4개 동의 아파트를 또 지어 분양했다. 첫 번째 것은 중화아파트였고 다음 것은 우정아파트(우성아파트를 잘못 쓴 것 같다 - 옮긴이)였다. 최승진이 대학을 졸업한 것이 1976년이었으니, 천일기술단의 김익진을 찾아간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안 되어서였다. 영동지구에서 아파트사업을 하겠다고 김익진을 찾아갔을 때의 나이는 불과 22~23세였으니 대단히 조숙했던 셈이다.

최승진은 김익진의 권유에 따라 고속버스터미널 맞은편, 잠원동 74-1번지의 땅을 사 모았다. 순순히 매각하겠다는 지주도 있었으나 끝내 매각을 거부하는 지주도 있었다. … 최승진이 고속버스터미널 맞은편, 잠원동 74-1번지에 확보한 토지는 26,561m2(약8,035평)였다. 그는 이 대지에 12층 4개 동 408호분의 아파트건설 허가를 받고 입주희망자를 모집하는 분양공고를 냈다. 1977년 초의 일이었다. 아파트 이름은 우성(각주9 어떤 점술가에게 작명을 의뢰했더니 우성을 권했다는 것이다. 집 우자에 이룰 성자, 우주가 이루어진다는 뜻도 되고 이 집에서 거주하면 성공한다는 뜻으로도 풀이될 수 있는 이름이었다)이었다. 이 분양공고에 응하여 입주를 희망한 것은 4천 명이 넘었다. 10대 1의 성황을 이루었던 것이다. 최승진에게도 뜻밖이었고 다른 건설업자들도 모두 놀라운 대성황이었다.

당시의 최승진에게 어느 정도의 경제력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겨우 태릉 근처 중화동에 5층짜리 아파트단지를 조성 분양한 것밖에 다른 실적이 없었으니 그 경제력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묘안이 생겼다. 당초의 분양계약금으로 기초공사에 착수했고 나머지 건축자금은 한국주택은행에서 융자를 받았다. 은행에서 융자를 받는 데는 담보가 필요했다. 바로 입주자와의 분양계약서가 둘도 없는 담보가 되었던 것이다. (<서울도시계획이야기 3> 317~319쪽)

이렇게 아들 최승진이 설립한 우성건설이 번성하자 우성그룹 회장에 취임한 최주호는, 1987년에 원풍모방을 되찾아 청주로 이전한 뒤 1988년 신대방동의 공장 부지에 신대방우성1차아파트를 세웠다. 1987년 9·27 사태로 해고된 원풍모방 노동조합원 이영남 선생은 어느 날 속상한 일이 있어 무작정 서울로 향해서는 "영등포역에 내려 원풍모방이 있던 대림동 주변을 돌아다녔다. 나도 모르게 발길 닿는 대로 간 곳이 거기였다." 하지만 "사라져버린 공장 자리에는 아파트가 서 있고 기숙사가 있던 언덕도 흔적이 없었다." (<풀은 밟혀도 다시 일어선다> 380쪽)고 증언했다. 이영남 선생이 본 아파트가 신대방우성1차아파트였다.

여기까지 살펴본 원풍모방의 소유주 변화를 아파트단지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53년 원풍모방 설립(1988년 신대방우성1차아파트 준공) - 1965년 원풍산업 설립(2001년 삼익아파트 준공) - 1970년 연세생산성맨숀아파트 준공(2003년 연남동 코오롱 하늘채 아파트 준공) - 1975년 중화아파트 준공(1986년 우성타운아파트 준공)·우성아파트(현존) - 1978년 반포우성아파트 준공(2020년 현재 반포르엘아파트 건설 중). 서북쪽으로 마포구 연남동, 동북쪽으로 중랑구 중화동·묵동, 동남쪽으로 서초구 반포동, 서남쪽으로 동작구 신대방동에 이르기까지 서울시 사방의 아파트단지를 살피면 원풍모방의 연혁을 따라갈 수 있다. 과연 현대 한국은 아파트단지 공화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 중랑구 묵동 우성아파트. ⓒ김시덕

숱한 사연을 뒤따라 넓어져 가는 대서울

원풍모방의 전신인 한국견방이 애초에 신대방동에 자리한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 당시에는 섬유산업이 군수산업으로 간주되어, 안보를 이유로 노동쟁의가 금지되었다(<미싱은 돌고 도네 돌아가네> 160쪽).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전쟁 후에 미망인 가족 64가구를 신대방동 343번지 일대에 정착하게 한 뒤로 '모자원(母子院)'이라는 지명이 생겨났고(<동명연혁고 XIII>, 251쪽), 1958년에 공군사관학교가 이곳 신대방동에 자리한 뒤 1985년에 충청북도 청주로 옮겨가기까지 이 일대에 군사 관련 시설들이 밀집해 있었음을 생각하면, 한국견방 설립 당시에도 막연하게나마 섬유산업은 군수산업이라는 개념에 따라 이곳에 자리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공군사관학교에 이어 박정희 정권 초기에는 상이용사 78가구가 공군사관학교의 서북쪽에 자리하면서 재활용사촌이라는 지명이 탄생했고 신생원호아파트도 건설되었다. 원풍모방 노조원들의 회고에 '의용촌'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등장하는 지역(<풀은 밟혀도 다시 일어선다> 317·478·766·776쪽)이 이 재활용사촌・신생원호아파트 지역이다. 신생원호아파트는 2003년에 보라매롯데낙천대아파트로 재건축되었는데, 이 아파트의 머릿돌에는 "사업주: 신생아파트 재건축조합"이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어서 이 땅의 옛 역사를 전하고 있다. 신생원호아파트의 서남쪽에 자리한 대방동 재활용사촌의 집단주택도 1990년에 철거되었지만(<경향신문> 1990년 6월 23일자 '서울 마지막 상이용사촌 헐린다'), 아파트단지로 재건축되지 않고 당시의 지번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신대방우성1차아파트 앞에는 1970년대 초에 만들어진 구옥이 한 채 남아 있어서 원풍모방이 이곳에 있던 시절의 모습을 상상하게 해준다.

한편 경기도 성남시 상대원동 공단 끄트머리에는 "대방용사촌(대방동 재활용사촌 복지조합)"이라는 이름의 군납업체가 자리하고 있다. 회사 소개에 따르면 설립일이 1982년 3월 3일이고 군용양말 등을 생산한다고 하는데(☞ 참고 링크), 육영수 여사가 기증한 양말 짜는 기계로 대방동 재활용사촌에서 군용양말을 생산했다는 기록(경향신문 같은 기사)과 부합한다. 현재 이 공장 정문 왼쪽에는 "대방용사촌"이라 적힌 나무간판이 걸려 있는데, 10여 년 전의 카카오맵 로드뷰에는 같은 자리에 "대방동 재활용사촌 복지조합"이라고 적힌 나무 간판이 걸려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정문 오른쪽에는 "미군의 원조 UNITED STATES 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와 "이 공장 및 기계설비 일체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분부로 원호처장이 국고보조금으로 설치한 것임 1969년 5월 12일"이라고 적힌 동판이 붙어 있다. 서울 청량리 등지의 철거민이 강제 이주되어 형성된 성남시, 옛 광주대단지의 끄트머리에 신대방동의 상이용사들도 이주해왔음을 전하는 이 동판을 보고 깊은 감회에 사로잡혔다.

식민지 시대에 강남이던 영등포의 남쪽 경계 지역에 세워진 공군사관학교와 원풍모방은 1985년과 1987년에 청주로 옮겨갔고, 상이용사들은 대서울의 동남쪽 성남시로 옮겨갔다. 원풍모방 민주노조 조합원들은 국가 폭력에도 불구하고 신길동에 거점을 두고 끈질기게 싸운 끝에 명예를 되찾았다. 사람은 끈질기게 살아가고, 대서울은 사연 많은 사람과 시설들을 뒤따라 깊고 넓어져간다.

▲경기도 성남시 대방용사촌 공장 정문의 동판. ⓒ김시덕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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